포도쥬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6건 조회 509회 작성일 20-08-09 08:11본문
사방이 암흑이었고, 등불 켜진 곳 주위만 조금 암흑이 내몰려져있었다. 여자가 온 것은, 도개교가 높이 올려지고 한참 뒤였다. 도개교도 보이지 않았고, 여자도 보이지 않았다. 글라디올러스 구근(球根)이 투명한 유리컵 물 속에 반쯤 잠겨있었다.
나는 며칠 전부터 치통을 느꼈고, 글라디올러스 구근 곁에 덜 숙성된 치아 하나가 떠있었다. 검은 벽들을 따라 걸었다. 밤하늘을 갈라내는 예리한 가지들과 무성한 잎들이 꿈틀꿈틀 위로 기어올랐다. 혈관이 피부 위로 불뚝 솟았다. 떡갈나무 성채 안으로부터 밤 새 유리종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여자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자기 혈관을 끊었다. 여자의 혈관은 금 간 투명한 유리 같다. 여자는 둥글게 뭉쳐져서 유리컵 물 속에 반쯤 잠겨있었다. 물에 부푼 거울의 껍질이 조금씩 벗겨질 때마다, 눈알 하나는 위로 떠오르고 다른 눈알 하나는 바닥으로 영원히 가라앉았다. 글라디올라스 구근은 반으로 잘려져서 상반신은 강 이쪽에 하반신은 강 저쪽에 버려져있었다.
나는 포도쥬스가 담긴 투명한 글라스에 별빛도 투과하여보고 나뭇가지에 간드라지게 걸린 작은 호롱불빛도 투과하여본다. 글라스에 손을 대자 글라스 안쪽으로부터 도시 절반의 불빛이 한꺼번에 꺼졌다.
댓글목록
빛날그날님의 댓글
빛날그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단아한 시 잘 읽습니다. 밤의 이미지를 따라가는 솜씨가 날렵합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제의 문제와 제목이라는 시제의 문제만 조금
해결하셨으면 하는 바람 내려 놓습니다. 즐거운 일요일 밤 되시길...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시간은 일부러 섞어놓은 거구요, 사건들도 섞여 있습니다.
프라하 카페에서 마셨던 포도쥬스와 밤 - 그런데, 포도쥬스를 따랐던 글라스에서 어린 시절 글라디올라스 구근을 키웠던 그 글라스를 떠올렸구요. 포도쥬스를 마시는 시점은 현재, 그런데 글라디올라스는 과거입니다. 그런데 나는 현재 치통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치통이 과거의 글라디올라스를 그녀가 찾아온 오늘밤과 연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밤 온 여자 - 그 여자로부터 나는 언젠가 보았던 강물에 떠밀려왔던 익사체를 연상합니다. 그 익사체가 부풀어 물에 떠있던 것으로부터 글라디올라스를 연상하구요. 여자 -> 글라디올라스 -> 글라디올라스를 담은 글라스 -> 글라스에 담긴 포도쥬스 -> 쾌락으로 연결됩니다. 이 시에서는 시제나 시점같은 것이 의미가 없는 세계를 의도하였습니다.
원래 이런 변화하는 시간과 시점, 상징들 속에서 영원한 것에 해당하는 환상을 끄집어내고 싶었는데, 제 역량이 아직 거기 닿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통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만이, 마르셀 프루스트 냄새가 너무 나서요. 마르셀 프루스트도 이미 낡았고.
그리고 시가 너무 안정적인 것도 싫구요. 처음 이런 시를 쓸 때만 해도 곳곳이 덜컥거리고 불안정적이고 비례가 맞지 않고 하는
거친 힘이 있었는데요.
제목을 포도쥬스로 바꾼다고 했던 것이, 깜빡했네요. 밤이라는 제목은 그냥 임시로 붙여두었는데 깜빡했습니다.
빛날그날님의 댓글
빛날그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포도주를 마시는 밤, 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성인에게 포도쥬스는 좀 해롭지 않나요?
밤에는 은근한 포도주 한 잔 하면 딱인데요.
그걸 우리말로는 십문칠, 이라고 합니다.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제가 그때 포도쥬스를 마셔서요. 저는 경험한 것만 쓰기 때문에, 상상해서는 잘 못씁니다. 원래는 익사체이자 글라디올라스였던 여자와 포도쥬스를 마시는 것으로 끝맺음하려 했는데, 그때 포도쥬스를 함께 마신 사람이 남자여서요, 상상으로는 도저히 못쓰겠더군요. 그래서, 여자는 빼고 나만 포도쥬스를 마시는 것으로 했습니다.
포도쥬스는 이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 연결되는 쾌락을 상징해서 그것을 제목으로 하려고 생각했습니다.
빛날그날님의 댓글
빛날그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제가 쬬 위에서 말씀드린 바 있는데...자신의 시를 설명하는 순간,
그 시는 생명이 끝! 단호하게 말하는 것 보이시지요?
설명하지 마십시오. 그럼 이만~
암튼, 열정에 다시 박수 세 번 "짝" "짝" "짝"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그렇군요. 하지만 제 시에 대해 오해하는 분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해서 한번 설명해보았습니다. 그냥 내용 없이 꾸며쓴다고 오해하는 분도 있고 해서요.
박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