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원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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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410회 작성일 20-08-21 10:32본문
처음 건조한 화물 운반선 위에서
우리가 납품한 기계들 시운전하느라
정신없는 사이에 거제도 앞바다엔
희끗희끗 눈발이 날리고 있었지
네가 충청도 고향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전화기 너머 떨리는 목소리가 전해 왔어
흰 눈은 눈썹을 덮고 속은 울렁이고
눈은 풀어지고 손은 떨려 왔어
오래전 가을 너를 따라가서 걸터앉아 보았던
베를린 공과대학의 나선형 철제난간이며
네가 머물던 남의 나라 하숙집과
사람 좋은 주인 아주머니, 코 큰 너의 친구들
그리고 여전히 여기에 남아 있는 고향 사람들과
네가 땀 흘리던 성전과 마당과 꽃과 나무들을
남겨 두고 건물이 무너지듯 너는 그렇게 떠나갔지
난생 처음 갔던 스키장에서 눈두덩 위가 찢어진
나를 덜덜거리는 너의 중고차에 태우고
병원 찾느라 헤매던 충청도 그 외진 산길 어딘가에서
너는 아직도 웃고 있을 것만 같아
우리는 대나무를 보며 함께 하늘의 시들을 읽었지
내가 너의 마디가 되고 네가 나의 마디가 되어
우린 고요한 아가雅歌를 불렀고, 대숲에서 온종일을 거닐었지
그럴 때면 짙고 검은 눈썹 아래 네 눈은 빛이 났어
당신은 죽어도 내 맘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이 말을 남기고 떠난 네 여자를 얘기하면서
사랑하는 이에게 죽음보다 슬픈,
슬픔을 남기지 말라고
너는 쓴 커피를 마시며 내게 말했었지
세월이 지나면 식어지고 잊혀지는 법이라지만
차가운 바람이 불고 꿈결처럼 눈이라도 내릴라치면
옛노래가 무심결에 우리의 입가에 머물듯
너는 갑자기 떠오르곤 해
잘 지내니
그때는 안부 인사 한 마디 못하고
너를 보내야만 했지
잘 지내니
그때는 불타는 네 주검 위로
성긴 눈송이들 아스라이 흩날렸지
[이 게시물은 창작시운영자님에 의해 2020-08-24 13:13:14 창작시의 향기에서 복사 됨]
댓글목록
빛날그날님의 댓글
빛날그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누군가 보낸 편지를 대나무 숲에서 읽는다면
마음이 정갈하고 단순해질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박형권 시인님이 눈오는 날을 배경으로 쓸쓸함의 비결, 을 노래했다면
대나무 숲에서는 단순함의 비결, 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참고로, 저는 댓글도 시 같아야 한다는데 동의하는 편입니다.
너덜길님의 댓글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댓글 이야기를 하셨으니,
적어도 시마을의 댓글은 시, 혹은 그에 준하는
수준의 향기와 진실성을 머금은 글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똥내, 막장 냄새 나는 인터넷의 익명의 댓글과는 달라야겠지요.
여긴 시를 쓰고 읽는 우물 곁 뒷뜰과 같으니깐요.
창가에핀석류꽃님의 댓글
창가에핀석류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네요.
꿈결타고 흘러오는 야상곡으로 들립니다.
남겨진 자의 아픔이 서정으로 드리워진 시인님의 시가 맑고 아름다워서
한참 젖었다 갑니다. 고맙습니다.
너덜길님의 댓글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나의 외로움이 너의 외로움을 부른다는 시와 노래가 있지요.
또한 나의 깊음이 너의 깊음을 부르기도 하구요.
늘 제 깊은 곳에 있는 먼저 간 친구,
정말 좋았던 친구였습니다.
읽고 감상해주신 말씀 너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