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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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485회 작성일 20-09-06 00:05본문
풀잎
내게 풀잎은 삶 그 자체로는 포착할 수 없는 그 어떤 쾌락을 상징하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정원에 서있었다. 정원이라기에는 풀도 나무도 열매도 없는, 바위가 삐죽삐죽 솟아있고 폐선이 바위 끝에 걸려있는 높고 아찔한 곳. 그녀의 손가락뼈가 고사목으로 구름 속에 서있는 곳. 깃발처럼 펄럭이는, 아침인지 저녁인지 모를 연보랏빛 마찰음 속에서 내 피부는 찢어져갔다.그리고 나는 휘파람 소리가 곧장 떨어져내리는 광장같은 내 절망의 한복판에서 더 이상 여기 길이 없음을 깨달았다.
시계침이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더 기다렸다. 구름이 낮게 내려왔다.
풀잎 속에 기록된 시간이 날 스쳐지나간다. 칼로 얇게 저민 내 살점들이 시간을 이루고 있다. 나는 작은 중문을 연다. 그녀의 목소리가 여물지 않은 푸르덩덩한 종소리가 되어 자잘한 유리조각들이 가시 돋친 줄기 위에 잔뜩 묻어있다. 내 절망은 수정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어서 중심부에 통각신경이 잔뜩 고여있다. 내 절망은 피 흘리기를 좋아한다. 내 쾌락은 고통의 유리조각으로 형형색색 결합된 스테인드글라스다. 모든 색채는 그 나름의 성문(聲紋)으로 연결되는 것인데, 그렇다면 풀잎은 어디에서 오는가? 어느 마감이 덜 된 채색 의자에 투명한 베일이 미끄러져내리는, 그 순간으로 온몸의 피가 몰려드는, 나는 불길에 가둔 어느 명징한 얼음 갈라지는 소리에 도취한다.
댓글목록
라라리베님의 댓글
라라리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글을 읽으며 풀잎 속으로 들어가다 보니 거대한 숲이 나오고
어느새 커다란 나무 한그루가 전하는 이야기에 심취해 있네요
화자의 깊은 내면에서 나오는 가지각색의 신비로운 종소리를 듣는 듯 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지만 구체적이고 풍요를 느끼게 하는 이런 표현 방식들은
아마도 코렐리님을 따라갈 분이 없을 것 같습니다
언어의 아늑한 숲에서 꿈꾸게 하는
알라딘의 요술램프를 갖고 계신 건 아닌지요.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과찬이십니다. 그 신비로운 종소리는 제가 라라리베님 시에서 듣습니다.
라라리베님 말씀대로 일상과 현상으로부터 환상을 이끌어내려고 저는 시를 쓰는데요,
얼마나 성공적인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쓰는 동안 황홀하고 행복하니까 그것이 시에 배어나오나 봅니다.
라라리베님 시에서도 그런 것을 느낍니다. 은은한 순은의 그슬린 빛깔처럼
그윽한 것을요. 라라리베님 훌륭한 시 너무 기다리고 잘 읽고 있습니다.
창가에핀석류꽃님의 댓글
창가에핀석류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풀잎의 형상과 몸을 부딪쳐 내는 그 세밀한 떨림까지도 잡아낸 심상이
참으로 오묘하고 깊게 느껴집니다. 어쩌면, 지금 시인이 느끼는 풀잎과의
몰아일체를 독자도 함께 느끼게 하는 깊은 시 인듯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너무 예리한 눈을 갖고 계셔서 시의 세포들 속까지 다 꿰뚫어보고 계신 것 같아요.
저는 정지용을 아주 오랫동안 사숙해서 모든 것을 감각으로 환원하여 쓰기 때문에,
대상에 대해 깊이 있는 묘사를 하려면
그것을 나와 일체화시켜 내 감각으로 풀어놓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보시는지 참 신기합니다.
제 시가 석류꽃님께서 말씀하신 그정도 깊이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제 시가 말하는 바를 독자들이 함께 느껴준다면
그것은 제가 독자들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지요.
깊이와 절제미, 사색의 단단함은 석류꽃님 시가 단연 두드러집니다.
석류꽃님 훌륭한 시 깊은 인상 받으며 늘 잘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