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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내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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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공덕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85회 작성일 18-09-18 17:31

본문

대학교 구내 식당 설겆이는 점점 헐렁한 옷이 되어간다.

처음엔 둘이서 해도 빠듯했던 설겆이가 이제는 혼자서 해도

홀에 물을 마시러 갈 시간이 생겼다. 요즘엔 플라타너스 길이라고

팻말이 붙은 길로 수레를 끌고 쓰레기를 버리러 가지 않게 되어

서운할 지경이다. 서로 가지 않으려고 미루는 일을 나는 왜

특혜처럼 여기는지 모를 일이다. 그 학교의 플라타너스는

서울 거리에서 본 플라타너스처럼 우듬지가 구름에 닿는다.

하늘을 들고 있으려니 힘이 드는지 툭툭 불거진 나무의 관절들이

바람이 불면 우두둑 소리를 낼 것 같다. 오래된 플라타너스 둥치

딱지가 다 떨어진 버즘처럼 신령한 하얀 빛을 띤다. 우리말로

그 나무를 버즘 나무라 부르는 모양이다. 그 길의 오른 쪽에는

플라타너스들이 즐비했지만, 다른 방향에도 온통 아름드리 나무들이

포진하고 있어서, 이 나무 저 나무, 울창한 잎새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나무의 눈빛인양 눈 인사를 나누고 나면 금새 쓰레기를

버리는 소방서 옆의 전봇대가 나오고, 또 그렇게 몇 그루의 나무들을

아는체 하고 나면, 빈수레에 타고 있던 요란이 내리고, 쓰대는

물의 양으로 치면 나이아가라 폭포 소리 정도는 될 것 같은 주방의

소음속으로 흡입 된다. 열개의 어른 팔뚝만한 햄을 도마에 밀가루를

뿌려서 썰고, 떡볶이에 들어간다는 오뎅도 삼각형으로 한 소쿠리 썰고,

세척실 주방의 욕조보다 더 큰 개수대에 뜨거운 물이 다 받히면

주방 입구에 학생들이 아무렇게나 쌓아 놓은 그릇들을 씻으러

달려가야 한다. 최소 삼백명의 식판과 그릇과 수저가 쏟아져 나오는데

분류만 잘하면 오히려 기껏 수십명이 오고가는 작은 식당들보다

세척이 쉽다. 우선 최신식 식기 세척기는 이제 사람의 손길을 빌리지

않는다. 그저 종류대로 꽂아 주기만 하면 케찹과 고추장과 카레로

범벅이 된 그릇들이 새로 산 것처럼 반짝반짝 닦여 나온다. 섬세하게

작은 티끌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것보다 손만 빠르면 되는 작업이 나에겐

유리하다. 손이 빠르다는 말을 참 자주 듣는다. 머리 회전이 느리니까

손이라도 빨라서 다행이다. 내 손을 펼쳐서 보여주면 짧고 통통해서

부지런하겠다는 말 또한 자주 듣는다. 나는 그 말이 듣기 싫어서 손을

잘 펼쳐 보여주지 않는다. 길고 가늘고 실반지를 끼면 예쁜 하얀손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으르고, 물을 모르는 손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한 이십년전에는 심줄이 불거지지 않아 약간 어두운데서 보면

모나리자 손 같다는 빈말도 들었는데 지금은 배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낡은 천정 같다. 반지를 끼지 않는 것은 반지를 끼면 시선이 손으로 갈 것

같아서이다.(아니, 사실은 낄 반지가 없다) 

고무 장갑을 끼지 않고 일할때가 많아서 오른손 검지에 낀

묵주를 닮은 금반지는 손바닥 부분이 많이 닳았다. 내 소원은 그 반지가

다 닳을 때는 더 이상 남의 집 설겆이를 하지 않고 사는 것이다. 다행히도

설겆이만큼 내 손이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자판을 칠 때다. 이제는

탕수육 만드는 집과 뚝배기 씻는 집을 다니지 않으니 오른 손 약지의

권총증(손가락이 권총을 질 때처럼 굽어서 잘 펴지지 않는 증상)이 나아서

자판은 더 빨라졌다. 그러나 이전처럼 자판보다 내 생각이 앞서가지 않아서

손가락들은 더 오래 자판 위에 발령을 기다리는 대기자들처럼 엎드려 있다

말을 하려고 생각하면 쓸 말이 적은 것 같고, 것을 쓰려고 하면 또한 쓸 말이

적어지는 것에 대해 노화탓을 돌리고 싶지만은 않다. 당장 하고 싶었던 말이

당장 해서는 않되는 말인 것 같아, 그 당장을 지나고 내 생각을 물어보면

그 당장에 묻어 둔 말에서 빛이 난다. 찌든때 묻은

쇠를 뜨거운 물과 세제로 박박 문질러서 물을 뿌려보면 나는 여윈 반짝임 같은

빛을 참이라고 하는 것일까?  말이 적어지고 웃음이 많아져 간다. 손을 많이

움직이고, 몸도 많이 움직이고, 뭐든 기꺼이 움직인다. 그러면 생각이 적어지고

몰입이 된다. 분이 가라 앉고, 자학도 원망도 씻겨 나간다. 누가 무어라 해도

사실에 의미를 보태지 않게 된다. 왜 장갑을 아무 곳에나 벗어 놓고 다녀요?

"화장실 간다고 잠깐 벗어 놓았어요."라고 혓바닥이 이전의 명령어를 따르려는데

"아! 예, 예!" 장갑을 벗어 놓은 문제는 누군가 장갑 소독기에 넣어 놓은 문제가

되버린다. 억울할 것도 기가 찰 것도 없다. 달라면 주고, 주면 받는다.

모든 불행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데서 온다. 내가 나인 그대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만족하지 못하는데서 온다. 너는 너다, 너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내 생일은 8월 4일인데, 오후반 사장의 생일은 8월 6일이다.

나는 작은 아들에게 전화를 해서 엄마 생일인데 삼만원만 쏘라고 했는데

작은 아이가 십만원을 보내 주었고, 오후반 사장은 애인이 삼십만원을

주었고, 가방을 사라고 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케잌과 선물들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어쨋다는 것인가? 나는 나의 생일을 살았고

그녀는 그녀의 생일을 살았을 뿐이다. 지구가 태양을 도니까 내가

태어났다는 그날이 다시 돌아 온 것 뿐이다. 다른 날과 같은 하루다.

인간의 병은 의미 부여에 있다. 왜 그날을 특별하게 만들지 않으면

불행하다고 판단하는 것인가? 삼십만원을 주는 늙은 그녀의 애인과

미역국을 끓여주는 남편을 나는 바꿀것인가? 아니다. 삼천만원을

주어도 그 할아버지랑 키스 할 생각이 없다. 그러면 모든 부러움은

의미의 장난이거나 사람들의 의미 놀음에 내가 속는 것이다. 삼천만원을

준다해도 키스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고귀하거나 고결한 것일까?

키스 한번 하면 삼천만원어치 노동하지 않아도 된다는데 설령

고귀나 고결을 하다해도 도대체 그놈의 결이나 귀는 무슨 소용이라는

말인가? 이전에 모 배우는 배역을 따내기 위해서라면 성상납도

마다하지 않았다는데, 배우가 무슨 짓을 해서든 배역을 따내고

싫컷 연기할 수 있었던 것은, 고결, 고귀보다 더한 무슨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무리 연기가 뛰어나도 여배우의 몸이

1+1 이던 시절에 그녀는 창녀일까?

 

맹목은 의미의 폭력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어쨌거나 인생은 운명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일이 흔치 않다.

순순간간이 내가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못하는 선택이다.

사장은 그 나이에 돈 없는 남자는 장동건이라도 사절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돈 걱정하지 않는 남자를 만나는 것이고

나는 돈을 선택의 가장 하위 항목에 넣고 있다.

결국 어리석은 선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내 체질속의

18세기는 잘 폐기 되지 않는다.

 

또 출근 시간이다.

나는 불평하지 않고 불평이 하고 싶을 때는

아직 손이 닿지 않은 묵은 때와 먼지를 찾아서

그것이 내 안의 불만불평인양 닦고 씻을 것이다.

이미 세상은 내게 내면화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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