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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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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플루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77회 작성일 19-03-26 14:31

본문

정오가 되면 나는 이미 두 군데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이다.

첫번째 호프집 청소를 하며  젖었던 양말과​ 신발 밑창이

두번째 족발집 청소를 하며, 의자 위에 걸쳐 두면 다 마르는 것이다.

봄이 왔다고, 아지랑이가 피고, 꽃이 피고, 사람들의 얼굴도 피는데

나는 외려 무슨 느낌이라도 가지지 않으면 내게서 살아있다는 증상

하나가 사라지는 것 같아, 무슨 느낌이라도 가지려니 부담스럽기만하다.

다만, 야트막한 산모롱이를 따라 늘어선 슬레이트와 기와 지붕들 사이에

내장이 다 헐린 미히라 같은 폐가 한 채와 돌로 두두을 감싼, 온통 잡초뿐인

텃밭이 마주보는 살풍경을, 무슨 뜻이라도 품은듯 지키고 있는, 고무 다라이

화분 앞을 지날때만 아주 잠깐 봄에 붙들린다. 겨울 동안은 누가 그기에

삭정이 가지를 하나 꽂아 놓았나 거들떠 보지도 않았지만, 내가 문득

그를 돌아보게 된 건 그의 모양 때문이 아니라 향기 때문이였다. 종일

가게를 지켜도 몇 장 들지 않는 지전 같은 잎사귀 몇 장이 고작이고,

빈약한 가지 겨드랑이 밑에는 흑미 밥알 몇 티끌이 붙어 있는듯이

허름하니 꽃이 붙어 있는 것이, 향기로 미루어 가만히 다가가 보니

천리향이였다. 그 폐가를 지키던 주인이,  동네 노인정이나, 이웃에게

천리향 묘목을 한그루 얻어다 밑바닥 깨진 고무 다라이에 녹슨 낫처럼

휜 허리를 하고 흙을 퍼담아 심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하늘 나라라

이곳처럼 낮은 곳 어디로 이사를 가고 말았던지, 주인이 떠나고도

집을 지키는 유기견처럼 바람결에 천리나 되는 긴 꼬리를 치며 빈 집을

지키고 있었던것 같다. 나는 축축하게 습기가 도는 비강을 흉물스럽게

넓히며, 그 영혼 뿐인듯한 꽃에게 고사상 돼지머리 같은 육기 절은 내​ 얼굴을

드리미는 것이다. 그러고는 아무 돌부리에나 엉덩이를 깔고 앉아

중얼거리는 것이다. " 내가 너였으면 좋겠다"

가난도 무명도 무재(無在)도 어쩔수 없다면, 아무렇게나 아무곳에나

꽂아놓은 대쪽 같은 생이 향기나 진동했으면 하는 것이다. ​

미스코리아 선발 대회 무대에 쭉 늘어선 장신의 미녀들처럼 해사한

꽃들을 시큰둥하니 지나쳐오던 나를 돌아보게 만들고 머물게 만든,

빨간 고무다라이에 생이 묶인 그의 시가 부러웠던 것이다.

시가 의미나 풍경이나 철학이 아니라 다만 그 존재의 냄새라는 생각이 들 때까 있다.

어떤 판단이나 경계나 짐작을 할 겨를도 없이 훅 끼쳐오는

눈과 귀가 아닌 숨의 통로로 직통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무슨 비유 입니까? 따위 물을 것도 없이

시에 노출된 존재와 환경을 압도하는 생명체의 체취를 글로 풍기고 싶다.

한 편의 문장을 조합하지 않고,

단 한 줄로도 누군가를 불러 세워야하는 것이다.

어? 하고 돌아보게 만들어야 하고

뭐지? 하고 들여다보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배고픈 고양이는 생선 냄새에 주목할 것이고

돼지는 잔반 냄새에 주목할 것이고

나비는 꽃 향기에 끌릴 것이다.

내가 어떤 싯귀에 끌리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내 영혼과 정신의 고도를 알수 있다.

우리집 고양이들은 배가 터지도록 밥을 먹고도

새를 사냥한다.

한 문장을 넘어서면

그 다음 도달해야할 시가 나오는 것이다.

모르겠다. 나는 시가 무엇인지

숱한 시인이 정의한 것을 모른다.

문학박사와 평론가가 무엇이라 떠들어대는지도 모른다.

다만 지금껏 나와 함께 숨쉬고 살아온 시는

내게 자신을 이렇게 말해준다.

내시가 자신에 관해 내게 말해주는 것을 보고

자신이 누군가에게 배운 것을 말해서는 않된다.

모두에게 시가 똑 같다면

세상에 시라는 쟝르는 없을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저 고무다라이가 별인

어린 왕자 같은 저 천리향이 되었으면 좋겠다.

고무다라이 밖의 그 엄청난 꽃들 다 놔두고

저 독거노인 같은 꽃나무가 내 꿈이다.

한 숨 자야겠다.  지구의 둥근 테두리를 쭈삣거리게

만들던, 울창한 내 꿈이 작아져서 작은 고무 다라이에도

들어가게 되어 행복하다. 발이 바깥으로 빠져 나가지 않는

전기 장판과 이불 안으로 들어가 푹 자고

오후 일을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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