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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김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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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김용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500회 작성일 18-01-10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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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이른 새벽 누가 창문을 살폿살폿 두드린다.
여명을 알리는 봄의 여신이겠지, 눈길을 주지 않았다.
서재의 창호지가 살핏하게 호수의 파문처럼 젖어 번진다.
읽던 책을 접어두고 동이 트는 뜨락으로 새벽을 마중 나갔다.
정원의 나무 위에도 뜰 안의 화초에도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였다.
활짝 피기를 몇 번이나 망설이던 매원梅園의 매화를 포근히 감싸고 있다.
오랜만에 설중매를 만나는 기쁨에 가슴이 벅차 오른다.
한참을 그냥 멍하니 바라다보았다.
달빛 아래가 제격임을 알지만 그래도 이것만으로도 어딘가.
정원 등을 켜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마음
을 달빛 아래 설중매 감상으로 모아갔다.
뒤란 장독 위에도 앙증맞게 동그라미를 그린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장독대 뒤 대나무 한 무리는 일제히 나에게 큰절을 하고 있다.
가슴이 벅차 오른다.
4월 중순, 한참 봄이 농익을 때다.
음력 3월 초다.
때아닌 눈이 이렇게 많이 내렸을까. 기온은 영하를 가리킨다.
이곳 산막山幕으로 거처를 옮긴 지 10년째지만 올해같이
변덕스런 날씨는 처음이다.
봄을 여는 산수유 꽃과 매화는 시련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특히 매화는 꽃망울을 맺고 접기를 서너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매화꽃을 시샘하는지 눈과 찬바람을 동반한 영하의 날씨가 훼방꾼이다.
지구촌 곳곳에서 이상기후의 조짐을 진즉 부터 인류에게 경고하지 않았던가?
산이 섬세하고 물이 명징한 이곳이 좋아 대덕산 산록으로 거처를
옮겨왔다.
헝클어진 머리와 지쳐 쇠약해진 가슴을 추스르고, 자연과 동무하며
내 조그만 기쁨을 찾으려고 산중한인山中閑人이 되었다.
조그맣고 허름한 산막을 지었다.
선비 근처에도 못 간 주제에 선비 흉내라도 낼 양 사군자를
주변 경관에 어울리게 심고 가꿨다.
아침 해 떠오르는 동편 정원엔 군자의 기상 서린 국화 몇 포기,
이상향 개혁의지를 꿈꾸다 꺾인 인백仁伯 정여립鄭汝立의 원혼이 서린
천반산天盤山을 향한 남쪽 정원엔 난초 몇 포기, 저녁노을과
새벽달이 처연한 서쪽 한 마지기 비탈진 밭뙈기엔
청·홍매 쉰 그루를 심었다.
검 붉은 색 호랑이 바위 앞, 집 뒤란 북쪽은 자연 기개 높은
대나무의 자리였다. 하늘을 뚫는 왕대라 불리는 청죽, 검정 색과
자주색이 오묘하게 어우러진 오죽, 조릿대 산죽, 화살이나 붓대로
이용되는 신이대를 대여섯 그루씩 섞어 심었다.
이젠 제법 자라 대숲을 이루고 있다.
비 갠 뒤 바람결에 살 비비는 소리도 좋았다.
아침이면 이름 모를 산새들의 속삭임은 오묘했다.
달빛 아래 취객의 비틀거림 같은 흔들림도 좋기만 했다.
대숲 바람소리가 아닌 바람의 대숲 소리가 명징한 사유와
청량한 기쁨을 주었다.
그리고 처연한 추억과 연민마저 되살려 주기도 했다.
대나무의 쓰임새는 각양각색이다.
소쿠리, 바구니, 삼태기, 통발, 대자리, 조릿대 등 생활용구를 만들어
사용했고, 부채와 죽부인으로 삼복더위를 다스리기도 했다.
악사樂士에겐 훌륭한 악기가 되었고, 낚시꾼에겐 훌륭한
낚싯대가 되었으며, 간짓대와 감장지로도 변신했다.
생명줄을 끊는 화살로도 사용되었고, 죽창竹槍은 수많은 전쟁터에선
훌륭하나 잔인한 무기가 되기도 했다.
5월이 되면 죽순은 단단한 땅을 헤집고 하늘을 향한 힘찬 용 틀임을 한다.
기氣와 세勢에 따라 튼실하고 혹은 가냘프게, 아침이슬을
마시며 하늘을 뚫을 양, 로켓 치솟듯 솟아오른다.
일주일이면 하늘 길 오르기를 포기한다.
구들장도 뚫는다는 대나무 뿌리, 휘어진 마디마디에서 인생 역경과
굽이굽이 애절한 사연의 흔적을 발견한다.
큰할아버지 집 뒷동산엔 커다란 대숲이 있었다.
묵향 그윽한 큰할아버지 사랑방에는 열두 폭 병풍이
성벽처럼 진을 치고 있었다.
달빛 어린 으슥한 대숲 속에 집채만 한 호랑이가 보름달을 향해
포효하는 한 폭의 그림이 단연 압권壓卷이었다.
낚싯대로 사용할 대나무를 자르고 싶어도 호랑이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으르렁거릴 것 같은 두려움에 가까이 갈 수 없었던 금단의 성역
그 대숲을 잊을 수 없다.
고향 금강錦江은 우기가 되면 며칠씩 붉은 흙탕물로 넘실거렸다.
한국전쟁 뒤 황폐해진 발가벗겨진 산들의 탓이었으리라.
강변의 버드나무는 물 속에 며칠씩 잠겨 있었다.
키 큰 미루나무는 목을 내밀고 당당히 거센 강물과 맞서고 있었다.
장마가 그치고 강물이 줄어들면 강변은 처참한 전장戰場이 되어 있었고,
늘씬한 포플러는 전사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질식사했을 것 같던 버드나무는 나 보란듯이 싱그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
하지만 등급과 서열이 있나 보다.
기분 좋은 향기와 훌륭한 식견, 고매한 인품, 자애심과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 이런 사람들은 뭇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받는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부와 권력 고위직 앞에서 갖은 아부와 그것도
모자라 읍소泣訴하는 꼴불견이 이 시대의 초라한 자화상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좁쌀 인간들이 큰절을 받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한나절이 지나고 어스름이 다가와도 대나무는 허리를 펴지 않는다.
그들은 임금 앞에 엎드린 신하들의 모습이다.
석고대죄席藁待罪하는 죄인의 모양새다.
내 나이 이순이 되도록 누구한테 이처럼 오랫동안 큰절을
받아본 일이 있었는지 되돌아본다.
나 또한 어느 누구에게 경의 어린 큰절을 한 일이 있었는지 반추해 본다.
없는 것 같다.
단 한 번도 없었다.
젊은 시절 대나무 같은 삶이 필요했건만 미련스레 우직한
소처럼 소나무 같은 삶을 살아왔다.
시류에 영합하지 못하는 외고집 때문에 부러지고 꺾이고 짓밟히며
살아온 지난날이 통탄스럽다.
대나무처럼 때에 따라 올곧고 강인하면서도 머리를 굽혀 조아릴 줄도
알아야 하는 지혜도 모르는 미련 곰탱이였다.
때늦은 회한만 한 아름이다.
허리 굽히지 않은 소나무는 여러 갈래 가지가 무참히 부러져 있다.
오늘밤이 지나면 어김없는 내일이 올 것이다. 태양은 또다시 떠
오를 게고 햇빛은 봄눈을 녹일 것이다.
대나무는 아픈 허리를 펴고 하늘을 향할 것이다.
언제 그랬었느냐는 듯이 꼿꼿이 머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기개를
뽐낼 것이다.
인생도 이러하리라.
이제 남은 세월 소나무가 아닌 대나무 같은 삶을 살리라.
성격 바꾸기가 어려워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나잇살이나 훔친 사람이
이제 와 무슨 노망기가 들었느냐고 비웃을지라도…….

출처 : 김재환 《금물결 은물결》수필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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