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
─ 덕유산 향적봉
활연
**겨울 산은 정물이 아니라 동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육식성이 아니라 채식성, 그러니까 너른 들판에서 풀을 한가로이 뜯고 있는 소의 목덜미나 발정기에 든 엘크처럼 더러 사납다가도 또 목을 늘어뜨리고 바닥에 지천한 풀과 꽃을 뜯는 그 식물성이 연상된다. 풀과 나뭇잎으로 배를 채우고도 저녁 무렵 제집이라고 찾아오는 가축이거나 힘없는 산짐승이거나 어쩌면 밤불을 켜고 덤비는 야행성 포식자들의 발걸음 소리에도 낙엽 바스락 깨지는 소리에도 놀라는 순한 짐승이 연상된다.
**짐승들은 노을이 붉어지면 붉어진 마음을 한적한 섶 구석에 뉘고 언제라도 두리번거리는 잠, 그 풋잠으로만 생을 관통해야 하는 풀먹이동물들에겐 두려움이 단단해져 이마에 뿔이 솟는다. 그 뿔은 공격보다는 방어용 무기이므로 꽃나무처럼 언제라도 꽃잎을 달듯 아름답고 또 처연하다.
**그러나 겨울 산은 비루먹은 짐승처럼 헐벗었으나 칼날 같은 바람과 산다. 그 바람이 날아와 꽃을 달기도 하지만, 그 꽃은 나비나 벌이 물어갈 수 없는 꽃이다. 그러므로 설산의 눈꽃은 입으로 먹는 꿀이 아니라, 눈으로 마시는 향기다. 나뭇잎이 사라진 흉터마다, 푸르고 세찬 강이 흘렀던 줄기마다 눈부시게 매달린 꽃들은 나뭇가지에 잠시 앉았다 떠나는 새들이다. 겨울나무들은 수시로 새떼를 쏘아 올린다. 빙벽을 긁어 새하얗게 내린 것들은 시각적으로는 따뜻하다. 그러나 나뭇가지는 얼마나 속이 시릴까. 꽃을 뱉어낼 때 통증은 아마도 짐승이 탯줄을 끊을 때와 비슷하리라. 어쩌면 시각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끼고 감탄하는 순간에도 그 찬란을 내뿜는 것들은 차디찬 절망이 떠받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높은 설산은 신들의 영역이라는데, 신들은 가혹한 바람이 불고 눈안개가 앞을 가리는 곳에 앉아 지상을 어떻게 조망하고 있을까. 사람에게 시련이란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구르는 돌멩이들처럼 단단할까. 나무들이 얼크러져 산을 붙들고 거대한 암벽이 흘러내리는 산을 막고, 그런데도 칼바람이 빗물이 무시로 산을 깎는다. 그래서 산들은 서로 스크럼을 짜고 흘러내리는 것을 막는 자세로 유장하게 뻗어 있다. 그러므로 한 봉우리라도 허투루 서 있지 않고 그 고단한 마디나 옹이로 서서 우뚝하다.
**바다로부터 자란 키, 해발 몇 미터는 사실 추상일지 모른다. 누구나 직선으로 산을 오를 수는 없다. 산은 어슷하게 혹은 굽이를 돌고 돌아야 한다. 어처구니(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 또는 상와(像瓦)라는 동물장식을 설치하는데 이것이 어처구니다.)들을 밟고 하염없이 걸어야 공중의 한 바닥에 닿을 수 있다. 어처구니가 없다면 아마도 해수면까지 미끄러지지 않을까. 그러므로 겨울 산은 추상을 눈에 적시며 구상을 밟고 걸어야 한다.
**어처구니없게도, 우리는 산을 정복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나폴레옹이나, 우주의 군주를 꿈꾸었던 테무친이나 그들은 한때 광활한 영역을 정복했으나 사실 그것은 신기루였다. 인간이 정복할 수 있는 건, 두 개의 심실과 두 개의 심방을 가진 마음 하나를 정복하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산을 오른다는 건, 잠잠한 해수면처럼 낮은 곳에서부터 자신의 키가 자라는 것이다. 조금씩 공중부양하는 것이다. 그러나, 산꼭대기에 올라도 자신의 키가 한낱도 자라지 않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산을 오른다는 것은 수평적인 기준으로 높이가 높아지는 건 사실이지만, 시야가 트인 만큼 인간이라는 아주 작은 생체를 확인하는 것이고, 인간의 욕망이란 것이 대자연의 감정에 비하면 보잘것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겠는데, 그런 엄숙한 자연과 만나야 아주 작은 소리, 이를테면 소곤거리는 소리를 자신의 귓가에 흘려주고 자신의 목구멍 깊이 잠긴 소리를 자신에게 들려주는, 그야말로 자신의 감각이 무수한 기공을 열고 그 숨구멍을 열고 환해지는 장면과 만나기 위해서, 주춤서기하듯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은 아닐까.
**나는 다울라기리도 낭가파르바트도 시샤팡마도 로체도 초오유도 마칼루도… 가보지 못했다. 아니 근처에도 얼쩡거리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어릴 적 자란 동네의 14좌 정도는 수시로 정복하고 살았다. 나잇살이 끼고 몸은 천근에서 만 근까지 무거워지기 시작했는데, 더 무거워지면 바닥에 납작하게 누워 고요해지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산을 오르는 건, 나에게 살기 위해서 죽는다는 게 맞다. 그런데 그 죽을 맛이란 게 묘하게도 쾌감을 동반한다. 가령, 젖은 땅에 먼지 나도록 두들겨 맞고 정신이 혼미해졌을 때, 그래 더 때려봐라 하듯이, 온몸이 녹초가 되는 기분이 좋다. 그것은 무슨 성취동기도 아니고 정복감도 아니다. 나른한 내 안의 세포들이, 늦잠을 자는 얼굴에 찬물을 붓듯 일시적으로 각성하는 기분이랄까. 뭇매질을 당하고, 나른해지는 내 육체의 피곤이, 게으른 잠에서 드디어 깨는 느낌이랄까. 결국, 산을 오른다는 것은 내안(內案)의 권태와 슬픔과 지루함과 관습적인 동선들 그리고 묵은 때처럼 무지근한 내 타성들과 만나는 일일 것이다. 나를 한 발자국씩 발굴하는 일일 것이다.
**산을 오르는 일은 가파른 숨 가쁜 가풀막을 헐떡거리고, 또 걸어온 수만 발자국을 헤아려보기도 하는 것이어서, 참 무모한 나를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외줄로 뻗은 산길을 걷다 보면, 점점 그 생각이란 것도 하얗게 증발해버리고 만다. 어디까지 가야 닿을까. 사실은 닿고자 하는 꼭짓점도 없다. 산정엔 늘 콧날을 벨 듯 드센 바람이 휘몰아치고 눈안개가 시야를 거룩하게 한다. 자연은 더 보여줄 게 없으므로 하산하거라, 이렇게 말하는 듯. 발톱과 부리를 뽑아버린 솔개가 아니라면 꼭대기에서 차고 오를 곳은 더는 없다. 어쩌면 뾰족한 허공의 바닥을 확인하고, 더는 높이 솟을 기분 없이 또 하산하는 걸음을 재촉한다.
**덕유산 향적봉은 두 번 올랐다. 예전에 그곳에서도 눈꽃 천지를 보았는데, 그 감흥으로 졸시, '꽃 울음'을 썼다.
****죽은 사람 입술에 가만히 손을 얹어보듯
****나무 인중에 손가락을 얹으면
****희디흰 침묵
****바람을 향해 날을 세운 꽃잎이 차다
****능선엔 꽃이 버린 칼날이 수북하고 눈먼 나비떼가
****불의 뼈들을 흩뿌리고 있다
****맨살로 강철로 건너온 바람이 꽃눈 물어다 산정에 멎어야
****새벽빛을 향해 묽은 눈 씻어야
****언 나무가 열꽃 단다
****산꼭대기 안갯속에서 몸을 부풀린 새들이 나뭇가지로
****꽃을 옮긴다
****칼날을 입에 문 꽃이 청동색으로 운다
****** ─ 활연『꽃 울음』부분.
**어떤 독자가 청동색 울음이 어디 있느냐 했다. 그래서 향적봉 1,614m를 올라가면 그렇게 우는 눈꽃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했다. 청각을 시각화한 공감각적 표현이지만, 책상머리에 앉아 읽으면 와 닿지 않는 표현이다. 청동은 불상의 재료로 자주 쓰인다. 그래서 그것은 항구성과 불멸의 기원을 담은 빛이기도 하겠다.
**산을 타는 사람들은 스스로 생고생을 자처한 사람들이다. 어쩌면 생활의 여백을 찾으러 분주히 어딘가를 누비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베갯모를 일그러뜨리며 쉬는 날 내내 잠을 자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암팡진 암말의 씰룩대는 엉덩이와 잔등을 따라 걷다 보면 안다. 어딘가를 오른다는 것은 누군가의 뒤쪽에 서 있어야 하고, 누군가 찍어놓은 발자국에 자신의 발자국을 포갠다는 것을. 그리고 누구에게도 사잇길이 많아서 편히 내려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회로처럼 돌아 불빛 하나를 켜듯이 혹은 하나의 신호를 점등하기 위해, 출발했던 그곳에 옹송망송 흐릿해진 정신을 끌고 모여야 한다. 생활로 돌아오기 위해 해수면처럼 피곤해진 몸을, 그 편편해진 몸을 높은 해발에서 쿨렁거리는 바닥에 내려놓아야 한다.
**겨울 산은 간단없이 발품을 팔아야 거대한 익룡의 그 희미한 발끝이라도 볼 수 있다. 물초처럼 흥건히 젖어야 발가락에서 꼬물거리는 희미한 뼈 하나 만질 수 있다. 그러므로
**겨울 산은 뼛속으로 부는 동통(疼痛)이고 눈안개에 가려 더는 볼 수 없는 곳을 더 깊이 보는 쪽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