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길목에서 ―임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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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북수유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45회 작성일 20-01-23 14:13본문
생활의 길목에서
―임신 1
아내가 임신 사실을 알려 왔다. 순간 나는 당황을 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어찌해야 할까 생각을 했다. 비록 딸이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애가 둘이나 있었고 무엇보다도 나이가 문제였다. 내 나이 이미 마흔이 코앞에 있었고, 아내 나이도 나 보다 몇 살 아래지만 임신해서 애를 키우기에는 힘이 부치는 삼십대 중반이었다.
아마 태어나는 아기가 남자라면 내 나이 환갑이 되어야 대학에 들어가고 군대도 갈 것이고 딸이라면 딸딸이 아빠에서 딸 딸 딸 아빠가 되는 것이다. 그나저나 그 때쯤 되어서도 경제적 능력이 있어서 애를 대학까지 무사히 보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서고 무엇보다도 애들 뒤치다꺼리 하다가 내 인생 다 보내는 건 아닌가 하는 이런 저런 상념에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지금이야 노동인구가 부족하다며 신생아 육아 보조비니 유아 복지니 뭐니 하면서 출산 장려 정책을 쓰고 있지만, 먼 옛날도 아닌 불과 십 년 전만 해도 셋째 아이가 태여 날 때는 의료보험 혜택도 받지 못하였다. 하나는 외로운 것 같고 둘만 나서 잘 기르자는 당시의 표어처럼 그렇게 둘만 나서 잘 키우려고 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임신이라니......
거기다가 원하던 임신도 아니었다. 사는데 바빴고 딸 둘이지만 둘 다 예쁘고 귀여워서 아들 없다고 해서 섭섭하지도 않았고 아들 있는 집 부럽지도 않았다. 우리 어머니는 딸을 낳지 못하고 아들만 셋을 두었는데 그래서 내가 나서 자라던 우리 집에서는 여자라고는 엄마밖에 없었다. 집안에서 여자의 정취를 느끼지 못하다 보니 여자는 내게 있어 늘 머나먼 미지의 세계처럼 아련한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먼 동산에 피어오르는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보이기는 보이나 만질 수는 없었고 가까이는 가보고 싶은데 가까이 할 수도 없었다. 아무도 모르게 그저 맘 속 깊이 간직한 보석처럼 여자란, 여신처럼 신성하고 신비한 존재여서 함부로 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꽃에서 사는 어여쁜 요정처럼 향기로운 내음이 멀리서도 풍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 다음에 장가를 가게 되면 당연히 딸이 생길 거라고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여자아이에 대한 이름도 미리 지어 보았다. 수정으로 지으면 맑고 깨끗하게 보여서 좋을 것 같은데 너무 가볍지 않을까. 아니면 다정이라고 지으면 어떨까. 사람 성품도 이름 따라 간다고 다정다감하게 느껴진다면 여성의 이름으로 더 없이 정겹지 아니할까.
이런 저런 상상 속에 너무 산뜻해서 질투심이 느껴지면 어찌할까. 차라리 부르기 쉽고 흔히 있는 상투적인 이름들이 남들로부터 더 친해질 수 있을지 모른다며 이런 의미 저런 의미를 부여해 보면서 여자아이의 사랑을 키워 나갔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착하디착한 아내를 만나 정말로 첫 딸을 얻었고, 생명에 신비에 마냥 놀라워했고 내 아이가 여자라는 사실에 또 한 번 감탄을 했다. 그러나 둘째가 생기고 산달이 되어 갈 무렵에는 나 역시 인간적 속물인지라 아들에 대한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 남아 선호사상으로 유교적인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단지 인간적인 욕망으로 딸도 있고 아들도 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순수한 마음의 인지상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막연한 기대가 있었지만 출산 일이 되어서 병원에 가 있던 제수씨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예쁜 공주님이 태여 났다고 하지 않는가. 순간 잠깐 아주 잠깐 동안의 섭섭함이 스쳐 지나가기는 했으나 둘째 역시 내 어릴 적 동경과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여자로서 이 세상에 태여 났다는 사실이 그저 행복하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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