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하루살이...01 기상청과 '구라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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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기상청과 '구라청'
하루살이: 소소한 하루하루를 값지게 여김, 그리고 살아 감
시계 초침이 새벽 3시를 가리켰다.
나는 경남 통영의 한 어촌마을로 향하고 있다.
소풍을 떠나기 전, 그 설렘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
‘소소하지만 가슴 벅찬’ 하루임에 틀림없다.
떠나기 전 설렘은 여행 중 느낄 수 있는 그 무엇만큼이나
따뜻하고 풍요로운 추억이 된다.
낚싯배 예약을 끝마쳤다.
낚을 어종에 맞는 그날의 채비도 준비해 본다.
이미 수평선 너머 푸르른 그 무언가를 만끽하고 있는 듯
분주한 손놀림이 몹시도 경쾌하다.
새벽 4시, 대구를 벗어난다.
이른 새벽이면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를 좀 더 선호하는 편이다.
이때만큼은 ‘고속’이 싫어서이다.
까다로운 기상조건에 맞춰 어렵사리 잡은 일정,
그 하루를 조금이나마 더 만끽하고 싶기에 적당한 속도가 더 매력적이다.
안전사고를 당부하듯 쉴 새 없이 깜빡거리는 신호등이 정겹다.
국도의 규정 속도에 맞춰 부드러운 주행을 이어간다.
어둡지만 희미하게 보이는 정겨운 어촌마을,
이따금씩 간담을 서늘케 만드는 도로 위 고라니 떼 그리고 귓전에 씹히는 추억의 노랫말들
이런 소소한 것들이 이른 새벽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로 발길을 내딛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남해안도로 끝자락에 위치한 간이 휴게소
그곳에서 맛보는 우동 국물에 춥고 경직된 몸을 녹여본다.
승선명부에 이름과 주민번호를 기입한 후
낚싯배에 남보다 발 빠르게 올라 선두에 자리를 잡았다.
출항한 지 불과 한 시간
바람이 거세진다.
분명 일기예보상 따뜻한 남서풍을 예상하며 낚싯배에 올랐다.
하지만 냉기를 가득 품은 '북동풍'이 옷깃을 파고든다.
낚시꾼들 사이엔 ‘구라청’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빈번히 빗나가는 기상청의 일기예보 탓에 그 아쉬움을 빗대어하는 말이다.
가끔이지만 일기‘예보’가 아닌 일기‘중계’를 하는 모습에 허탈함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기상청의 일기예보는 언제나 예측을 벋어 날 수도 있다.
우리의 삶 역시 'Routine(틀에 박힌 일상)'이 아닌 '변화무쌍' 그 자체임을 누구나 알고 있다.
다만 중요한 건 예보와는 달리 현재 남서풍이 아닌 ‘북동풍’이라는 것이다.
북동풍은 흔히 샛바람이라 부른다.
종종 냉기 품은 강한 바람과 갑작스러운 너울을 일으켜 낚시꾼들을 당혹게 만들곤 한다.
그로 인해 바다의 수온은 급격히 냉각되기 일쑤다.
살아있는 모든 어종은 은신처에 몸을 숨긴 채 결국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불리한 여건을 뒤로한 채 흐르는 조류에 찌와 채비를 연신 흘려본다.
찌가 한 번 두 번 오름과 내림을 반복한다.
얼마 후 찌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춰버렸다.
초릿대 끝이 활처럼 휘고, 손목과 팔꿈치에 느껴지는 무게감이 만만치 않다.
순간 대물임을 직감하고 녀석을 제압하기 위해 팽팽한 텐션을 유지하며 릴링을 시작했다.
이렇듯 회집에서도 쉽게 맛볼 수 없는 5자 감성돔을 낚을 기회는 결코 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 순간 기상청이 아닌 ‘구라청’의 큰 덕을 봤다는 것이다.
냉기를 가득 품은 북동풍이 불 때면 급격한 수온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어린 감성돔들은 은신처에 몸을 처박고 모습을 감춰버리기 일쑤다.
반면에 그런 수온 변화에 익숙한 놈, 즉 5자 감성돔만이 별일 없는 듯 해저를 유유히 거닐다
내가 내린 미끼를 덥석 물어주는 것이다.
기상청의 정확한 일기예보가 틀에 박힌 일상, 즉 'Routine(루틴)'이라면
구라청의 빗나간 일기예보는 ‘뜻밖의’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 선물이 된다.
서둘러 대구로 향한다.
아직 가족들에게 풀어놓지 못한 나만의 무용담과
횟집에서도 쉽사리 맛볼 수 없는 5자 감성돔..
입가에 넓은 함박 미소가 퍼진다.
이것이 바로 예기치 못한 삶이 주는 소소한 행복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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