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디의 중요성
페이지 정보
작성자본문
∙평론
패러디의 중요성
김부회 시인, 문학평론가,칼럼리스트
기성 작품의 내용 일부를 모방하거나 혹은 구성, 문체, 소재 등을 흉내 내어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을 흔히 패러디라고 말한다. 패러디는 연극・영화를 포함하여 시・소설 등 많은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며, 패러디라는 한계를 넘어 예술의 모든 장르에서 새로운 예술의 한 부분으로 인정받는 추세이기도 하다. 시에서 패러디가 차지하는 부분은 의외로 다양하며, 이는 타인의 작품을 단순히 흉내 내는 것에서 출발하여 전혀 새로운 작품의 모티브가 되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시를 씀에 있어 패러디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논하기 이전, 문학에서 말하는 패러디의 속성에 대하여 아래 인용문을 참조해 고찰해 보기로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패러디는 문학적 수법에 대한 깊은 감식을 요하지 않는 벌레스크나 진지한 주제를 우습게만 처리해 버리는 희문(travesty)과는 다르며, 문학작품의 ‘수법’이나 ‘사상’에 있어서의 허점을 사정없이 폭로하나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 조롱의 대상이 되는 작품을 철저하게 이해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의 한 무명 시인은 최초의 패러디 작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개구리와 쥐의 전쟁(The battle of the Frogs and Mice)」을 Batrachomyomachia로 풍자한 것이 문헌상 최초의 패러디로 기록되고 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기사도를 로맨스 형식으로 패러디한 것이고, 셰익스피어는 『햄릿』의 연극 장면을 통해 크리스토퍼 말로의 고도로 극적인 기법을 흉내 냈다. 미국에서는 19세기의 포, 휘트먼, 휘티어, 브렛 하트의 시들이 동시대 작가들에 의해 모방되었으며, 패러디 기법은 20세기가 되면서 〈펀치Punch〉·〈뉴요커The New Yorker〉와 같은 잡지를 통해 발전하기 시작했고, 패러디의 취급 영역도 확대되었다.
― 출처 : 포털 다음 백과사전 일부 인용
위에서 언급한 내용 중 가장 깊이 있게 생각해야 할 부분은 패러디의 대상이 되는 작품에 대하여 철저하게 분석하고 냉정하게 판단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패러디는 단순하게 어느 한 부분만을 패러디할 수도 있겠지만, 좀 더 심도 있게 패러디가 가져올 수 있는 반향을 생각해 본다면 원작이 씌어진 사유와 배경, 배후까지 정확한 분석이나 인식이 없다면 흉내 내기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처음 시를 쓰거나, 시 쓰기 강의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잘되거나 좋은 작품에 대한 해석이다. 어떤 점이 잘된 점인지, 어떤 점이 좋은 점인지, 혹은 어떤 부분의 해석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독자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진중한 사유를 배우는 것이 가장 우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 시 창작에 대한 강의를 하다 보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패러디다. 하나의 작품(유명이나 무명, 혹은 잘되거나 그 반대거나 는 중요하지 않다)을 보여 주고 그 작품에 대한 시제부터 행과 연의 분석을 하게 된다. 시제는 이런 식으로, 혹은 이런 생각으로 만들었다는 분석과 소재는 이런 점에서 전체 맥락에서 여하의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 연과 연의 공백은 독자에게 상상과 여운을 주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배치했다는 유추해석까지 다양하게 설명하기 마련이다. 사실 시라는 것이 전체 글의 분량이 다른 장르에 비해 짧다는 것만 다를 뿐 그 속에 담긴 사유와 짧게 줄이기 위한 작가 나름의 실험은 긴 글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글을 늘리는 것보다 줄이는 것이 더 많은 창작의 산고가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를 쓰다 보면 의도적인 공백을 사용하게 될 수밖에 없다. 공백은 불필요한 사족을 생략하기에 가장 좋은 수단이며 시 속에서 외연을 줄여 내연의 사고를 단단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패러디는 시의 이런 공백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 가장 옳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감춰진 말의 그림자, 말의 여운, 문장의 실종된 줄기를 찾아내는 것이 패러디를 하기 위한 기본이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는 작가의 정확한 작품 의도 파악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는 말이며, 그 의도가 파악된 연후, 본격적인 패러디의 단초를 가늠하게 하기 때문이다.
패러디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개작 시문改作詩文
2. 우스꽝스러운 것의 흉내
3. 풍자적으로 모방하다
4. 서투르게 흉내 내다
엄밀하게 말하면 패러디의 처음은 흉내 내기다. 어떤 작품을 필사하는 것이 시 쓰기의 기본이라고 할 때, 두 번째의 실전 시 쓰기 연습은 패러디에서 출발하는 것이 매우 좋은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김소월의 작품이 좋다고 느낀다면 김소월의 작품 전부를 필사해 보는 것이다. 필사를 하다 보면 눈으로 읽는 것과 많은 차이를 느끼게 된다. 한 줄 한 단어 한 문장에서 작가의 의도된 진위를 좀 더 공감할 수 있으며 작가에 의해 선택된 단어가 어떤 이유에서 선택된 시어가 된 것인지 등, 글의 배경을 알기 위해선 작품에 대한 필사가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두 번째는 김소월의 작품에서 일부를 패러디해 보는 것이다. 가령 김소월의 진달래에서 일부분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에서 역겨워의 자리에 자신의 다른 감정을 넣고 써 보는 것이다. ‘나 보기가 두려워/ 나 보기가 행복해/ 나 보기가 서러워’ 등등, 자신만의 감성이나 감상을 넣고 따라오는 다음 문장을 ‘두려워’ ‘행복해’ ‘서러워’ 등에 맞춰 수정해 보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만의 색으로 다시 조합해 보는 것은 좋은 시를 쓰기 위해 작품의 배후를 정확하게 보는 눈을 키우는 공부가 된다.
패러디의 장점은 이런 것에 있다. 단순하게 풍자 또는 해학을 위하여 모방하는 것이 아닌,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시를 이해하고 분석하여 자신만의 작품으로 변화 또는 진화해 나가는 과정을 만들거나 인식하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이 패러디라는 공식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널리 아는 패러디 관련한 말은 이것이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
유년기에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우리는 말하는 사람의 음성과 입 모양을 무의식적으로 따라 하면서 말을 배우게 된다. 어설프지만 정확하지 않은 엄마, 아빠라는 단어에서 말은 출발하는 것이며 이런 말과 단어가 쌓여 더 많은 분량의 말을 하고, 자신의 의사표시를 하게 되며, 더 많은 학습과 경험, 대화를 통하여 지식을 습득하거나 의식의 지평을 넓히게 된다. 아기가 엄마 말을 따라 하는 것은 엄밀하게 보면, 패러디의 한 부분이다. 이는 무의식에 기초하여 유의식을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시에서 말하는 패러디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의 시가 되었던 처음 대한 시를 읽는 독자는 아이다. 아이는 작품의 입 모양을 흉내 내거나, 작품의 음성인 화자의 메시지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여 서툴게 자신의 내면을 표출하게 된다. 어설프게 흉내 내던 ‘어~마’라는 말이 발전하여 ‘엄마’라는 또렷한 단어가 되고 엄마라는 단어에서 가족과 사회와 우주가 나오는 것이다.
이미테이션Imitation은 진품을 본뜨거나 흉내 내서 만든 모조품을 말한다. 엄격하게 패러디와 이미테이션은 다른 말이다. 단순히 흉내에서 그치거나 작품의 겉 부분만 흉내 내는 것과 모방이 진화하여 자신의 것으로 재탄생하는 것에는 격格이 존재한다. 격은 곧 품격이다. 좀 더 깊이 생각하면 격은 곧 결계라는 말이다. 결계는 나의 세계와 너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너의 세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나의 세계가 너에게 인정되는 것이며 상호 다름을 넘어 본류의 세계 속 본질의 동질성을 말한다. 시에서 말하는 패러디에는 이러한 격이 존재한다. 그 격을 무시하거나 외면하거나 격을 격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패러디는 이미테이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는 글이 된다. 누구도 아가의 어설픈 엄마라는 발음을 이미테이션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엄마라는 어설픈 발음이 진화하여 아가의 새로운 세상으로 진입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가능하면 패러디 작품을 많이 쓰는 것을 권장한다. 물론 사전에 선행되어야 하는 부분은 위에서 분명하게 언급한 원작에 대한 충분한 분석과 이해, 감성에 대한 가감 없는 수용 자세이다. 원작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패러디를 통한 새로운 작품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 첩경이며 자신만의 시적 질감을 야무지게 만드는 훌륭한 방법이다.
필자는 『시는 물이다』라는 평론서에서 말했다. 시는 물이다. 시는 두 개의 원소가 결합하여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원소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패러디의 궁극적인 개념이 그렇다. 원작의 진중한 이해와 분석을 통해 아류를 만들고 실험하는 끝에 온전하며 별개의 다른 내 작품을 만들어 가는 행위가 그렇다는 말이다. 시는 창조의 산물이며 시는 아픔과 고민과 행복과 충만의 감정을 글자로 드러내는 일이다. 그 모든 것은 ‘인간’과 ‘사회’라는 시스템 속에서 만들어지고 다시 복사되고 전승되며 전이되는 문화적이며 관습적인 행위예술이 되는 것이다.
한 가지 더 부연하고 싶은 것은 패러디는 반드시 타인의 작품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한계를 갖지 말자는 것이다. 충분하게 얼마든지 자신의 작품으로 디를 만들어 보는 것도 중요한 시 쓰기 방법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광의의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흔히 하는 퇴고 역시 자신의 작품을 패러디하는 과정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퇴고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작품을 제삼자적 시각에서 보게 될 때부터 패러디는 시작한다. 자기 작품에 제삼자적 시선을 갖게 되는 것은 이미 자기 작품을 자신이 분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다른 새로운 패러디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 하고 싶다. 시 속에서 패러디의 중요성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이렇다.
―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
삶과 삶의 시스템 속에서 부속이 된 우리의 자화상 같은 느낌의 작품 네 편을 선별하였다. 다만 본 글의 소제목인 패러디의 중요성과 연관이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문제는 섣불리 거론할 수 없는 것과 패러디 작품은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시의 본질에 주목해서 일독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첫 작품은 김경린 시인의 「빈손」이라는 작품이다.
예리한 공기의 뼈들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꿈꾸기 전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심장의 여운은 어쩌나
포갠 두 손이 고양이 귀처럼 종긋해졌다
눈물 흘리다 웃는 사람들
올 때와 갈 때의 빈손을 사람들은 안녕이라고 했다
혀끝으로 만나고
잔을 돌리던 손을 거두는 일
사람들이 버리고 간 빈손이 쌓여 있다
몸이 고요해지자 너의 소리가 더 선명하게 귓속으로 들어왔다
꿈이 되는 것은 아직 익숙하지 않고
나는 어떤 꿈으로 가는 걸까
안녕을 털어낸 빈손들은 나비처럼 나풀거렸다
음표들은 왜 손바닥에서 잠을 자는 건지
밤을 구르며 노래 부르는 사람들
나뭇가지에 매달린 목소리들이
돌발적인 웃음을 떨어뜨리고
누워 있는 것이 불편하다
손바닥을 보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다
― 김경린 「빈손」 전문
본격적으로 작품을 논하기 전, 김경린의 빈손을 한마디로 촌평하자면 감각적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감각적이라는 말의 기본 의미는 감각기관을 통하여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동시에 어떤 글이나 사물이 지니는 인상이나 느낌이 강렬하고 특정한다는 것이다. 김경린의 작품 속 사유와 김경린이 그려 낸 빈손에 대한 감각이 매우 통렬하게 와닿는다는 말이다. 빈손이라는 말은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이며, 맨 처음 세상에 나올 때라는 말이며, 맨 나중 세상을 등질 때라는 말이다. 환언하면, 처음과 끝의 자세라는 말이다. 빈손에 무언가 쥐여지거나 들어 있거나 가득 찬 속이 될 때부터 사람은 다시 빈손을 만들려고 무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자의든 타의든 빈손은 빈손 이전의 것과 빈손 이후의 것에 대한 질문이며 답이 되는 동전의 양면이라는 속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김경린은 자신의 작품 속에 빈손에 대한 모든 자신의 시적 질감을 깊은 사유로 대칭하여 이입한 것 같다.
김경린의 빈손은 천양희 시인의 낯설게 하기라는 말에 철저하게 부합하며 시작한다.
예리한 공기의 뼈들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예리한 공기”에서 공기는 Air라기보다는 분위기라는 말로 이해하고 싶다. 예리한 분위기, 예리해야 했던 분위기, 예리해야만 하는 분위기, 빈손이 되기 이전의 그 어떤 무엇들, 그 어떤 분위기들에 대해 진진하게 독자의 시선을 모으는 역할을 한다.
“혀끝으로 만나고/ 잔을 돌리던 손을 거두는 일” “눈물 흘리다 웃는 사람들”
혀끝으로 만나고 잔을 돌리고 손을 거두고 내밀고 그러다 울다 웃는 사람들의 군상은 바로 어제, 그리고 내일 우리의 모습이다. 빈손의 빈손 이전의 모습들을 말하는 김경린만의 언어 표출 방법이다. 또한 빈손 이후의 모습을 이렇게 말한다.
“올 때와 갈 때의 빈손을 사람들은 안녕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버리고 간 빈손이 쌓여 있다” “안녕을 털어낸 빈손들은 나비처럼 나풀거렸다”
혹은 전위적이랄 수도 있을 것이며, 혹은 감각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부분이다. 좀 더 깊이 있게 본다면 심미적인 표현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처음과 끝의 빈손을 안녕이라고, “안녕을 털어낸 빈손들”의 안녕을 서로 다른 질감과 어감을 갖고 있다. 자동사와 타동사 둘의 야누스적인 이미지와 갈 사람, 남은 사람의 묘한 대비도 갖고 있다. 하지만 결국 그 빈손의 종착점은 빈손들이 쌓여 있는 허무, 적막, 어쩌면 그 적막의 중심엔 일종의 카타르시스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외곽부터 허물어진 ‘개념’만 남아 있을 것 같은 심증이 든다.
“손바닥을 보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다”
김경린 작품의 결론이다. 빈 손바닥, 빈 손바닥과 빈 손바닥이 마주치면 합장이 된다. 합장을 하면 고개가 숙여진다. 머리가 바닥을 보게 된다. 손바닥과 손바닥 사이 그 어떤 모의를 하던 시간이 깨어진 분위기가 질식해 있다. 안녕이라고 하기 전의 모든 것들이 정지된 손바닥 위, 아이러니하게도 그 손바닥 위엔 못 믿을 손금의 운명선이 사선으로 길게, 굵게 갈팡질팡하고 있다면 필자의 그런 상상이 패러디의 시작이라면…….
두 번째 소개할 작품은 김송포 시인의 「삼 초의 망설임」이라는 작품이다. 살다 보면 3초가 매우 중요한 시간일 때가 있다. 그 짧은 3초라는 시간 동안 많은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 세계 3차 대전이 발발할 수 있고, 누군가가 세상과 등질 수도 있고, 같은 시간대에 세상에 태어날 수도 있고, 생과 사의 갈림길이 엇갈릴 수도 있고, 아주 갑자기 지구가 은하계 속에서 폭발할 수도 있을 것이며, 사랑하는 사람이 적이 될 수도 있다. 김송포의 작품 「삼 초의 망설임」은 아주 작은 일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3초를 소재로 시의 지평을 넓혔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언뜻 살과의 전쟁, 다이어트, 빵의 유혹 등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사실은 모든 삶의 부분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것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너는 나의 사랑,
너는 나의 적
글루텐에 대한 유혹은 어릴 적부터 시작되었어
비주얼과 부드러운 크림에 끌려가면서 매일 마주치는
너
삼 초 동안 생각하게 만들더라
피자 한쪽에 웃음을 지으며 유혹하더라 빵 속의 통팥은 흘리기에 바쁘더라
생크림과 치즈가 있는 너를 세 조각 먹고 말았지 알레르기를 일으키더라
붉게 타오르기 시작하더라
유혹을 뿌리치지 않은 삼 초는 짧기만 하더라
혀의 달콤함을 어찌 잊을 수 있겠니
해마는 좋은 때를 기억한다지
너와의 약속이 하룻밤 종이에 불과하다지
이제는 달콤한 언어로 시를 부리지 말란 말이다
삼 초의 느낌을 어떻게 지울 수 있으려나
― 김송포 「삼 초의 망설임」 전문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아무것도 아닌 시간에 역사는 만들어지고 달라지고 변화하고 진화하는 것 같다. 이런 상상을 해 본다. 3초 동안만 참거나 심호흡을 크게 하거나 잠시 감정의 편린을 멈출 줄 안다면 정말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몸이 달라지고, 관계가 달라지고, 세상이 달라지고, 가치관이나 생명에 대한 존엄성까지(생명에 대한 존엄성은 요즘 세태, 마치 생명을 경시하는 듯 흉악범죄의 기승을 이야기한다)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3초가 정작 큰 결정을 내리기 위한 매우 중요한 시간이라는 것에 착안한 작가의 시적 발견이 훌륭하다. 또한 김송포는 작품 중간에 매우 희언적 방법을 심각하게 고민한 흔적도 심어 두었다.
“생크림과 치즈가 있는 너를 세 조각 먹고 말았지”
세 조각이라는 말과 3초라는 말의 어감적 의미를 넘어 셋이라는 것 속에 담긴 인간의 속성도 은근히 내밀고 있다. 물론 작가의 의도야 충분히 다를 수 있고, 3이라는 숫자의 우연한 일치라고 볼 수도 있다. 의도야 어떻든 독자에게 다가오는 3이라는 숫자가 상징하는 것은 본 작품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고 있다. 3이라는 숫자는 매우 짧을 수도 있고, 매우 길 수도 있고, 매우 작을 수도 있고 매우 클 수도 있는 다중성을 지닌 숫자라는 점에서 주목하고 싶은 3이 된 것이다.
글루텐에 대한 유혹은 어릴 적부터 시작되었어
비주얼과 부드러운 크림에 끌려가면서 매일 마주치는
너
삼 초 동안 생각하게 만들더라
“삼 초 동안 생각하게” 세상의 모든 결정이 3초 안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시인의 매듭이 연과 연의 공백 사이 독자의 몫을 충분하게 제공하고 있는 것 같다.
“유혹을 뿌리치지 않은 삼 초는 짧기만 하더라” 의뭉스럽게도 시인은 유혹이라는 단어와 3초 사이에 간격을 넣어 두었다. 유혹을 뿌리친 3초는 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자연스럽게 들면서 동시에 유혹은 단 3초에 불과하다는 시간적 의미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시인의 해학적 사유의 단면도 볼 수 있는 단독 연으로 처리한 이 지점에서 필자는 김송포의 시적 질감이 무척 다채롭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시는 끝까지 글루텐과의 싸움으로 일관될 것 같은 장면을 과감하게 전환했다.
“이제는 달콤한 언어로 시를 부리지 말란 말이다/ 삼 초의 느낌을 어떻게 지울 수 있으려나”
결국, 시와의 싸움이다. 글과의 싸움이다. 내가 쓰는 시와 작품에 대한 달콤한 유혹과의 싸움이다. 글루텐을 선택하기까지의 과정을, 비주얼과 달콤한 크림에 이끌리며 글을 선택하고 쓰고 하는 모든 행위의 일탈 과정에 대한 선선한 비유와 비유가 갖고 있는 예리한 칼날을 독자에게 내민 것이다. 많은 시행착오와 실험이 진행되거나 구겨지거나 하룻밤 종이에 불과한 약속이 되거나, 3초를 잘 견디거나 이겨 내거나 3초를 내 것으로 만들거나에 대한 문제를 때론 재밌게 때론 선뜻한 비유를 섞어 잘 포장했다는 생각이 든다. 시를 쓴다면, 적어도 시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다면 김송포 작품의 마지막 구절을 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할 것 같다.
이제는 달콤한 언어로 시를 부리지 말란 말이다
삼 초의 느낌을 어떻게 지울 수 있으려나
세 번째 소개할 작품은 성금숙 시인의 「토마토의 시간」이다. 작품은 내면의 세계와 외면의 세계를 무척 조밀하고 촘촘히 엮었다. 토마토는 토마토이면서 토마토가 아닌, 토마토의 세계와 현실의 나를 덧댄 시적 은유가 돋보이며 문장 전체적으로 환유의 질감이 강하게 든다. 성금숙 시인의 작품은 「꿈틀거리는 돌」과 「토마토의 시간」 두 편을 감상하였는데 「꿈틀거리는 돌」을 소개할까 하다 「토마토의 시간」으로 변경했다.
방금 전 돌이던, 돌은 없고
돌 속에는 당신이나 당신의 이상이, 혹은
당신이 빌고 싶은 문구들이 첩첩이 들어 있어서
탑이라도 쌓아야 하는 것이다.
― 성금숙 「꿈틀거리는 돌」의 일부
위 작품은 시제에서 많이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돌이 꿈틀거릴 수는 없는 일, 하지만 꿈틀거리는 것은 꿈틀거리게 만들 여하의 동기 부여가 있을 것이며 돌과 나를 일치시켜 생각해 보면, 결국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이 속성이 보이는 것이다. 마치 탑이라도 쌓아야 뭔가가 풀려 나갈 듯한 일상의 어느 부분이 꿈틀거리는 지금.
다시 「토마토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첫 행을 매우 신선하게 가져왔다는 점이 좋다.
좁은 나는 얼마나 광활한지
나의 하루는
둥근 나를 천천히 돌아서
저물녘 나에게 돌아오는 것
비가 내리는 날에도 웅덩이에 빠지며
드넓은 나를 도네
사람들이 부르는 내 이름처럼
세상은 모두 둥글어 보여
당신이 돌린 등도 둥그네
나의 하루는 나를 돌며
인사하고 인사하고 그리고
공손하게 인사하는 것
쌓이는 인사만큼 나는 더욱 둥글어지네
나의 하루는 끝내 나의 둘레를 도는 것
그리하여 시간의 곁가지를 키우는 것
풍선 불던 시간과 껌 씹던 시간과 층계 밑으로 너의 뒤통수가 사라지던 시간과 한밤중 발소리에
밖을 내다보던 시간과 손뼉을 치며 함께 웃던 시간들을 그곳에
실컷 매달아 놓는 것
좁은 나는 얼마나 광활한지
나를 돌면 돌수록 신앙심이 깊어져서
나는 점점 위험한 색깔을 띠네
눈을 또렷이 뜬 채, 내가 기다리는 것은 축제의 시간
나를 던지고 쥐어짜면 나는 큰 소리로 인사할 거야
눈을 또렷이 뜬 채 여름을 주르륵 쏟으며
― 성금숙, 「토마토의 시간」 전문
‘좁다’와 ‘광활하다’는 개념이 전혀 다른 단어다. 하지만 시적 비틀기 개념으로 이해하면 서로의 상관관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나이면서 내가 아닌, 광활을 이야기하면서 좁은 것이라는 결론을 유도하는 듯, 좁다를 이야기하면서 광활의 빈 공간을 강조하는 기법은 마치 환절기와 환절이라는 단어의 차이가 감각적인 부분을 더 채워 주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토마토의 입장에서는 좁은 세계일 수도 있지만 좀 더 다른 관점에서 보면 토마토 눈 밖의 세계 역시 그 ‘좁은’이라는 묵시적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토마토의 안, 토마토의 밖, 모두 좁은 세계 속에 살면서 광활을 이야기하는 아이러니를 갖고 살 수밖에 없는 어떤 의미의 근시안을 갖고 사는지도 모른다.
나의 하루 일과는
둥근 나를 천천히 돌아서
저물녘 나에게 돌아오는 것
둥근 나, 둥근 내가, 둥근 나의, 둥글다 속에는 둥글 수밖에 없는 운명, 어떤 이에게는 천형이 될 수도 있는 둥긂이 있다. 둥글다는 것은 반드시 긍정의 의미가 아닐 수 있다. 우리의 고정관념 속에서 만들어진 둥긂보다는 둥긂이 갖고 있는 반대의 이미지를 주목해서 읽으면 성금숙에게 있어 둥긂이 가지는 의미의 깊은 속내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이 부르는 내 이름처럼
세상은 모두 둥글어 보여
당신이 돌린 등도 둥그네
“내 이름”, “둥근 세상”, “돌린 등”의 관계가 묘하게 일치한다. 세 개의 둥근 현상에서 시인이 주목하고자 했던 둥긂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도 독자에게는 신선한 패러디의 시작이 될 것 같다.
나의 하루 일과는 끝내, 나의 둘레를 도는 것
그리하여, 시간의 곁가지를 키우는 것
오늘도 나의 둘레를 도는 원인행위의 결과물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되는지? 과연 곁가지에 불과한 시간의 쏘시개를 하나 더 삶이라는 장작불에 넣는 그런 행위일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 행위로 한정되는지? 성금숙이 던지는 메시지는 자못 진중하다 못해 동질이라는 감각을 더 수반하게 만든다. 어쩌면 이러한 시적 진술이 독자와 시인의 교감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구까지 끌고 오면서 한 번 더 말하는 시인의 외침 “좁은 나는 얼마나 광활한지”.
도입부의 좁은 나와 광활의 관계를 한 번 더 이야기하면서 서로 정반대의 알맹이 도치로 문장을 끌고 가는 힘이 대단하다. 그 이유에 귀를 솔깃하게 키워 본다.
나를 돌면 돌수록 신앙심이 깊어져서
나는 점점 위험한 색깔을 띠네
눈을 또렷이 뜬 채, 내기 기다리는 것은 축제의 시간
누군가 나를 던지고 쥐어짠다면
여름을 주르륵 쏟으며 큰 소리로 인사할 것이네
― 성금숙 「토마토의 시간」 일부
결구를 전부 다 인용했다. 그만큼 좁은 것과 광활의 의미를 좀 더 새겨보자는 필자의 생각이다. 과연 ‘나’ 내가 기다리던 것은 축제의 시간이었을까? 던지고 쥐어짜면 큰 소리로 인사할까? 필자의 생각은 시인의 결구로 비틀어 놓은 사유와 다를 것 같다. 어쩌면 이 작품의 핵심은 점점 더 위험한 색깔을 띠는 토마토에 있지 않을까? 토마토와 나와의 치환 관계가 일정한 거리를 둔 지근의 거리에 존재하는 나의 그림자라면? 성금숙의 시에서 물씬 묻어 나오는 향기는 처음 맡아 본 미지의 향이 아닌, 제법 코끝에 익숙한 향기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달라 보이는 미묘한 틈과 간격을 갖고 있다. 그 간격에 주목해서 시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결국, 필자 역시 필자의 둘레를 빙빙 돌고 있는 보편타당한 순환 속의 사람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작품은 박세희 시인의 「이른 봄날」이다. 봄과 꽃, 그리고 화자와의 상관관계를 매개체로 하여 대상물에 대한 생명력을 부여하는 작품으로 읽힌다. 시는 연속적인 행간을 물고 끊임없는 질문을 화자에게 던지며 봄에 대한 속성과 귀환에 대한 자기 생각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이 혼란했던 정국에 던지는 일종의 메시지화된 화두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묻는다 너는 다시 피어날 것이냐고
언제까지나 곁에 있을 것 같던 사람들이 안 보이고
거리에는 싸락눈이 내린다 이 눈 또한 그칠 것이다
눈부신 햇살이 분주하게 잠을 깨우러 나설 것이다
아직은, 하고 늦잠 부리다가 서둘러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귀를 모으고 아아 오오 우우 소리에 참여할
것이다 노랑, 빨강, 보라, 연두 자기의 모습을 드러
낼 것이다 오래전부터 익숙하게 보던 꽃들이지만
사람들은 박수와 감탄을 보낼 것이다 봄은 곧 온다
그리고 피어난다 이름을 불러 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혹시 다시는 보이지 않는 그 꽃에 대해 이야기
해 본 적 있는가 들어 본 적 있는가 내가 알고 있는 꽃에게
나는 묻는다 너는 다시 피어날 것이냐고
― 박세희 「이른 봄날」 전문
김춘수 시인의 「꽃」에서와 같은 느낌을 주는 행간이 있다. ‘이름을 불러 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행간이다. 존재의 의미는 존재를 존재 자체로 인식하는 사람에게 의미가 있다. 봄을 기다리는 것과 꽃을 기다리는 것, 꽃이 피어 있는 것과 꽃의 이름을 불러 주는, 혹은 기다리는 사람들의 시선, 이 모든 것들이 인식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의 바탕엔 봄과 꽃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이야기하지만 글의 내면엔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한 자각과 그 현실에 대한 희망적인 기대가 화두로 깔려 있다. 그런 부분들을 어쩌면 의식의 패러디라고 명명하면 어떨지 생각해 본다. 시인은 다면적인 눈을 갖고 있다. 그 겹겹의 눈과 시선 속에 가치관을 투여하면 보이는 것은 모두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자연의 섭리 속에서 경외라는 가치를 부여할 것들이지만, 다시 한번 비틀어 생각해 보면 그 섭리를 위반한 모든 사회 공동체의 부조리한 것에 대한 고발적인 목적도 혼재할 것이다. 시는 그런 다면성을 갖고 있기에 위대한 봄날을 기대하며 겨울을 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래전부터 익숙하게 보던 꽃들이지만
사람들은 박수와 감탄을 보낼 것이다 봄은 곧 온다
그리고 피어난다 이름을 불러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종국은 다시 보이지 않는 꽃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핵심은 그것이다. 이미 생명을 잃은 것들을 불러내는 주술적인 것의 이유에 대하여. 그렇기에 다시 시인은 다시 묻는 것이다.
“나는 묻는다 너는 다시 피어날 것이냐고” 나의 이유는 명확하지만, 너의 이유는 아직 모르는 척하고 있다. 그것이 박세희 시인의 글색이며 시적 질감의 그라데이션 효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봄이 깊어 간다. 책을 받을 때쯤이면 으레 봄바람 휘날리는~, 이라는 노래가 끝나 가는 시간이다. 가끔 나를 복사해 보고 싶다. 패러디해 보고 싶다. 하지만 아직 어느 지점의 나, 어느 지점의 사유를 패러디할지는 모르겠다. 좀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올해 봄을 전부 패러디하는 내년 봄이 되길 바라며 맺는다.
문학리더스 2025 여름 호 기고
김부회
2011 창조문학신문 신춘문예, 중봉문학상, 문학세계 문학상 평론 부문 대상 외 다수 수상, 시집(시, 답지 않은 소리)(러시안 룰렛) 평론집 (시는 물이다) 디카시집(아름다운 출근길)외 공저 20여권, 김포신문 시 전문 해설위원, 문예바다 편집주간, 사색의 정원 편집주간

댓글목록
장승규님의 댓글
김부회님!
참 어렵네요.
다 읽고 나서도
패러디의 중요성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네요.
시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金富會님의 댓글의 댓글
회장님. 긴 글 송구합니다. ^^
읽어주시니 감사하기만 합니다.
건강하셔요.
(참, 시는 점점 더 어려워지더라구요)
임기정님의 댓글
김부회 시인님
패러디에 관한 생각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참 건강은 어떠신지요
무더위 건강 잘 붙들어 매고 계세요.
金富會님의 댓글의 댓글
임 시인님..잘 지내시죠^^
저는 그냥저냥 입니다.
건강한 날들 되세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