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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농업] 한국의 벼농사는 얼마나 고된 일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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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약초 농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687회 작성일 15-09-01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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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벼농사는 얼마나 고된 일이었을까?



1990년대 초 어느 시골의 모내기 풍경. 복장만 다르지 조선시대 모내기 방식과 큰 차이가 없다. 손으로 모를 심는 이런 전통적인 모내기는 이앙기가 급격히 보급된 1980년대 부터 급격히 사라졌다. /조선DB

한국인의 끈기는 90퍼센트 벼농사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벼농사는 힘든 농사일입니다. 농경사회에서 모내기만큼 중요한 국가의 대사가 없었습니다.

고려말 이앙법(옮겨심기)이 도입된 후 급격하게 보급되었고, 조선 중·후기로 오면 남부지방의 90% 이상이 이 방법으로 벼농사를 지었습니다. 모를 옮겨 심으면 뿌리가 새로 내려 모가 튼튼해지고, 종자가 덜 들며, 김매기를 할 때 일품이 덜 드는 장점이 있습니다.

워낙 벼농사를 오래지어 온 민족이다 보니 벼에 얽힌 용어도 다양하고, 이와 관련한 농사 용어도 풍부하게 발달했습니다. 흔히 탈곡된 벼를 ‘나락’이라고 합니다. 이른 봄(4월말)이 되면 나락씨를 물에 불려 못자리 준비를 합니다. 못자리를 할 논을 정해 물을 가두고 못자리판을 장만해야 합니다. 동시에 논을 갈아엎는 작업 즉 ‘논갈이’가 시작됩니다. 경운기가 없던 시절에는 논에 물을 가두어 소로 논을 갈았습니다.

이앙법은 물이 있어야 가능한 모내기 방법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모내기가 시작되는 6월에 비를 학수고대했습니다. 6월의 비의 양에 따라 한해 농사 풍흉이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조선 후기 조사에 의하면 보나, 저수지를 통해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받는 논은 20%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는 그야말로 하늘만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예전에는 일년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 구릉지대의 논이나, ‘소(沼)’가 많아 물이 자연적으로 들어차는 논이 최고 비싼 논으로 거래되었습니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농촌에서 흔하던 못자리 풍경이 지금은 옛모습이 되었다.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

비료가 없던 시절에는 논 흙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퇴비를 넣어야 했습니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 퇴비증산에 총력을 쏟은 적이 있는데, 퇴비를 넣지 않으면 농사가 잘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을철에 웃자란 억새나, 기타 각종 풀을 베서 지게로 져온 후 논에 쏟아 넣고 그것을 일일이 발로 밟아 쑤셔 넣었던 고된 작업이었습니다. 요즘은 이 고된 작업이 비료를 통해 간단히 해결됩니다.

못자리 준비가 끝나면 씨를 모판에 뿌립니다. 1970년대 이후 모판에 비닐을 씌우는 보온법이 등장해서 냉해를 입지 않고, 좀 더 일찍 싹을 틔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5월 중순 이후 모내기를 할 시기가 되면, 먼저 모를 심을 수 있도록 갈아놓은 논에 물을 대고, 논을 평평하게 골라야 합니다. 논을 평평하게 하는 이 작업을 ‘써레질’이라고 하는데 지방에 따라 다르겠지만, 시골 농사용어로는 ‘논을 삶는다’고 표현합니다. 논을 ‘장만한다’는 말도 같은 의미입니다.

이때 논에 고인 물이 빠져나가지 않고, 장마나 홍수 때 논둑이 터지지 않도록 논둑을 젖은 논흙으로 맨질하게 바르는 등 논둑 정리를 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논의 경지정리가 되지 않아 비탈진 논이 많았는데 논둑이 터지면 아랫논에 심각한 피해를 주게 됩니다. 논둑을 만지는 일은 무척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1970년대 김포 평야의 모내기 모습. 일군들이 모를 심을 수 있도록 모침을 논바닥에 골고루 던져주고 있다. /조선DB

모를 옮겨심기 위해 모판에서 모를 떼 내는 작업은 ‘모를 찐다’라고 하는데, 이처럼 ‘찌다’라는 별도의 동사를 사용합니다. 쪄낸 어린 모는 짚을 이용해 한 다발씩 묶습니다. 이렇게 묶어낸 모를 ‘모침’이라고 합니다.

못자리를 한 곳과 모를 심어야 할 논의 거리가 멀 경우 모침 나르는 작업도 보통 고된 일이 아닙니다. 요즘에는 기계로 모를 심고 모판도 경운기나 트럭으로 나르기 때문에 이런 고된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예전에는 지게로 모침을 한가득 지고 경지정리가 되지 않은 좁고 구불구불한 논둑길을 수없이 오르내리면서 모침을 이 논 저 논 뿌려 놓아야 했습니다.

예전에 한해 논농사를 망치면 자칫 굶어 죽는 수가 있기 때문에 별도의 대비책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대표적인 게 보리농사였고, 그 다음 마른 밭에서도 자랄 수 있는 벼를 재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명절에 떡을 해 먹는 찹쌀이 바로 이 밭나락 종류입니다. 이를 ‘찰벼(차나락)’라고 합니다.

전통 사회에서 모내기는 주로 품앗이로 이루어집니다. 품앗이는 하루해를 기준으로 하며, 노동력을 돌아가면서 제공하는 것입니다. 좀 더 속성으로 일을 끝내기 위해서 ‘돈내기’로 작업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요즘 시골에서도 이런 모내기 풍경과 일군들이 둘러앉아 새참을 먹는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통명리에서 전해지고 있는 농요. 농민들이 모심기와 김매기 등 힘든 농사일을 하는 도중에 부르는 소리였다. 전국적으로 다양한 농요가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

모내기가 끝나고 나면 곧바로 김매기가 시작됩니다. 벼를 최종 수확하기 전까지 김내기는 세 번 정도 이루어졌습니다. 이 김매기는 7~8월 불볕더위 속에서 해야 했기 때문에 여간 고통스러운 작업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두면 논은 풀밭으로 변합니다. 요즘은 제초제가 워낙 좋아 제때에 제초제만 뿌리면 김매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통 농사법에서 김매기는 손으로 논바닥을 한 골씩 긁어내며 피와 잡초를 제거하는 작업입니다. 옛날 시골 사람들은 농사철에 손톱을 깎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논일과 밭일을 밤낮으로 하다 보면 손톱이 다 닳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워낙 힘든 노동이라 모내기와 김매기 소리는 지방마다 많이 발달했었습니다. 저의 고향인 예천 통명농요가 바로 모내기와 김매기 작업 시 하는 소리인데, 1985년 중요무형 문화재로 등록되어 전수되고 있습니다.

모가 한참 자란 8월 중순의 김매기 때는 날카로운 나락 이삭에 눈을 많이 찔리기 때문에 옛날 노인 중에는 눈동자가 헤진 사람이 많습니다.


가을이 되면 나락을 벱니다. 벤 나락은 한 묶음씩 묶어내어야 이후의 운반과 각종 작업에 편리합니다.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 전쟁이 한창일 때는 일제의 쇠붙이 공출이 심해, 놋그릇은 물론 나락을 벨 낫, 솥 등 쇠붙이란 쇠붙이는 죄다 공출을 해 갔다고 합니다. 예전 어른들 말을 들어보면 집집마다 벼 베기에 필요한 낫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뒤뜰에 묻어 놓는 등 별짓을 다 했다고 합니다.


1970년 대 초 어느 농촌 마을 가을 들녘에서 벼타작을 하고 있다. 재봉틀 처럼 발로 밟아 탈곡기 동태를 굴리는 재래식 탈곡기를 사용하고 있다./조선DB

묶어낸 볏단은 일렬로 논에 세워 말려야 합니다. 말리는 작업이 끝나면 한 곳에 쌓아서 탈곡할 수 있게 준비합니다. 이렇게 쌓아 놓은 벼 무더기를 ‘낟가리(노적)’라고 합니다. 탈곡 작업은 심지어 눈이 오는 겨울까지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볏단을 쌓아 놓아야 들쥐나 새들로부터 곡식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경운기와 탈곡 기계가 보급된 후에는 탈곡 작업이 주로 벼를 베낸 들판에서 이루어졌지만, 더 옛날에는 볏단을 전부 집까지 지고 와 집 마당에 낟가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소가 없으면 지게로 지고 집의 마당까지 날랐다고 합니다.

탈곡 후에는 수매를 위해 나락을 햇볕에 말려야 합니다. 수매를 위해서 말리고, 다시 담고, 쭉정이를 걷어내고 이를 다시 수매장까지 옮기고 하는 작업이 반복됩니다. 불과 수년 전만 해도 시골 길을 다니다 보면 도로가에 볍씨를 말리는 작업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그냥 논에서 벼를 베면서 탈곡을 하고, 그대로 정미소나 수매소로 가져갑니다.

옛날에는 이런 고된 노동을 한 농민들 자신들은 실상 일 년에 쌀밥 몇 번 먹어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우리가 쌀밥을 마음껏 먹은 것은 1970년 초 통일벼가 보급된 이후입니다. 독재자가 3대째 지배하는 북한은 아직까지 ‘이밥에 고깃국을 먹여주겠다’는 김일성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쌀에 대한 우리 민족의 집착은 결국 벼농사의 범위를 두만강 이북까지 끌어올려 놓았습니다. 쌀은 다른 일반 작물보다 상대적으로 소출이 많고, 재해에 강하며, 영양소가 풍부하며, 경제적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 등으로 우리 민족은 가뭄 같은 자연재해와 긴 겨울 동안 살아남기 위해 벼농사에 집착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수만년의 농경사회가 기계화된 공업사회로 진입하는 과도기를 지나는 중이며, 마지막 남은 전통 농경사회의 흔적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벼농사가 없어지면 농경사회와 벼농사로부터 형성된 한국인의 많은 전통과 민족적 자질, 특성이 점차 바뀔 것입니다.



경북 도청 이전으로 지금은 사라진 필자의 고향마을(경북 예천군 소재) 들녘의 모습. 봄부터 온갖 손길로 길러낸 벼가 가을을 맞아 여물고 있다.





출처 : 조선 일보 2015-07-24
글 | 이상흔 조선pub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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