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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진관사 탐방과 성령대군(세종동생), 최영장군 묘소를 둘러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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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찬란한빛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1,391회 작성일 19-05-22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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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위치한 고려말기의 명장 
최영 장군 묘소로 오르는 대자산(大慈山) 숲길..2019.5.20.월 

진관사 탐방에 이어 성령대군과 최영장군 묘소를 둘러보다
2019.5.20.월..부부 행복나들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건강걷기겸 역사탐방할 곳을 물색하다가
홈에서 자동차로 그리 멀지 않은 서울 은평구에 있는 진관사와 
서오릉을 탐방하고
점심먹고 오기로 하고  8시30분 홈에서 출발이다.

서오릉(西五陵)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있는 조선 왕실의 왕릉군이다. 
경릉(敬陵)·창릉(昌陵)·익릉(翼陵)·명릉(明陵)·홍릉(弘陵)의 
다섯 능을 말하며, 그밖에 다른 원과 묘도 함께 있다. 
1970년 5월 2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바람은 좀 불었지만 날씨가 쾌청하니 나들이 하기에 좋은 날이었다.
50분 소요로 진관사 부터 탐방이다.
전날밤 적게 내린 비였지만, 그러나 사찰은 더욱 푸르게 향기로웠다.

진관사는 10대 학창시절에 소풍으로 와 보곤 처음으로 감회가 새로웠다.
깊은 산에 들어 온 듯, 사찰로 오르는 길에 계곡도 넓었지만
오랜 가뭄으로 계곡물이 적어 크고 작은 허연 바위들이 바싹 말라 있었다.

한글을 비밀리에 연구했던 진관사 탐방을 끝내고, 
바로 그곳에서 6.8km 떨어진 서오릉에 닿으니 아뿔사!
월요일 휴관으로 주차장이 막혀 있었다.

스마트폰으로 인근 관광지를 찾으니 여러곳이 있었지만,
성령대군묘와 어린시절 고무줄 놀이하면서 많이 불렀던 
고려말기의 명장 최영장군의 묘를 둘러보고 싶었다.
두 묘가 바로 인근에 있어 별 무리없이 둘러 볼 수가 있었다.

서오릉 휴관덕에 성령대군과 최영장군의 묘를 참배할 수 있어
오히려 잘 되었다 싶어 여간 기쁘지 않았다.

그럼 진관사를 시작으로 하루 나들이를 함께 둘러 볼 까요?


삼각산 진관사 일주문

삼각산진관사(三角山津寬寺) 일주문 편액(一柱門 扁額)

소재지 : 서울시 은평구 진관길 73

대한불교조계종 진관사는 예부터 "서쪽은 진관사(西津寬)"라 하여 
서울 근교 4대 명찰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사찰이다. 
[고려사]와 [여암전서(旅菴全書)]등에 따르면 진관사는 신혈사(神穴寺)의 
후신으로, 1010년 고려 현종이 대량원군 시절에 왕위계승과정에서 
자신을 구해준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서 창건했다고 한다.

1090년 고려 선종(宣宗)이 행차하여 오백나한재(五百羅漢齋)를 베푼 후부터 
여러 왕들이 참배하고 각종 물품을 보시하는 국가적 사찰이 되었다. 
1397년 조선 태조는 진관사에 행차해 수륙사(水陸社)를 짓고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실행하게 하였고, 1442년 세종은 
사가독서당(賜暇讀書堂)을 진관사에 두고 집현전 학자들을 보내어 
한글을 비밀리에 연구토록 하였다. 이후 진관사는 6.25전쟁으로 인해 
나한전.칠성각.독성전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1963년 주지로 부임한 비구니 최진관(崔眞觀)스님의 노력으로 
옛 사격(寺格)을 복원하였다. 2009년 칠성각 해체복원 불사 중 독립운동가 
백초월(白初月)스님이 숨겨둔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와 <독립신문>등이 
발견되어 독립운동의 거점사찰임이 확인되었고, 
2013년에는 '진관사 국행수륙재'가 중요무형문화재 126호로 지정되었다.

2006년 주지로 부임한 계호스님은 템플스테이체험관, 사찰음식체험관, 
전통문화체험관을 건립하고 역사와 문화, 포교의 중심도량으로서 면모를 
갖추고, 종교와 인정을 넘어 모든 이들에게 행복을 전하는 
'마음의 정원'을 지향하고 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이나 가마에서 내리셔야 한다는 하마석(下馬石)이 있다.

* 고려초기 왕실의 근친결혼으로 인한 비극
모자간의 권력투쟁, 즉 천추태후와 목종,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불륜으로 
낳은 아들로 왕위를 노린 비극, 康兆의 정변과 삼각산 神穴寺(후에 진관사)에 
중으로 있던 대량원군 현의 목숨을 건진 사항과 목종과 강조에 의한 등극, 
결과적으로 목종도 시해당하고 김치양부자도 살해당했으며 
천추태후는 죽을 때까지 유배당했다.

8대 현종은 992년 아버지 욱(郁,태조의 아들, 추존 安宗)과 
어머니 황보씨(천추태후의 동생) 사이에서 태어났다. 
5대 경종의 왕비인 황보씨 자매는 경종이 26세로 죽자 과부가 되어
친정에 있다가 이웃에 있는 욱을 만나 사통하여 낳은 아들이 순(詢) 현종이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욱은 사천에 유배되고 홀로 남은 부인 황보씨가 아들 순을 
낳다가 바로 죽었다. 이를 불쌍히 여긴 6대 성종이 거두어 키웠다. 성종이 
후사 없이 죽자 7대 목종이 즉위하면서 어머니 천추태후가 권력을 장악하자 
김치양을 불러들여 국정을 농락하며 서로 간통하여 아들을 낳자 목종 이후 왕위를 
노려, 우선 목에 가시같은 大良院君 詢을 죽이기위해 독을 탄 떡과 술을 신혈사에 
내려보냈으나 승려 진관대사津寬大師가 기지를 발휘하여 그 음식을 받아두었다가 
마당에 떡을 던졌더니 까마귀와 참새들이 먹고 즉사하였다.

그후 천추궁에 대 화재가 나고 목종이 병이 들어 눕자 김치양이 반란을 획책하는 
음모를 꾸미자 사전 알게 된 목종이 서북면 都巡檢使 강조에게 자기를 호위하고 
대량군을 지켜달라고 요청하였지만 이미 목종이 시해 당했다는 소문으로 
머뭇거리다가 그 죄책감으로 정변을 일으켜 우선 김치양부자를 죽이고 
목종도 폐위시키고 귀양중에 살해하고 대량원군인 詢을 불러들리어 즉위하니 
이가 8대 현종이다.(安宗 郁의 복매伏埋, 고려사 열전 참조)


일주문을 들어서서 진관사(津寬寺) 들어가는 터널형 길목에는,
"종교를 넘어 마음의 정원 진관사"의 게송(偈頌)을 읊으면서 
마음의 정원으로 들어간다.


향로봉으로 오르는 등산로, 향로봉은 여기서부터 2.0km 이다.


계곡을 끼고 오르는 향로봉 나무데크 등산로이다.
여긴 그래도 계곡물이 보여서 시원하다.
우린 향로봉이 아닌 좌측 진관사사찰로 오른다.


극락교를 지나서


계곡을 끼고 오른다. 
오랜동안의 가뭄으로 계곡엔 흐르는 물이 감질나다.


마음의 정원으로 들어가는 진관사 해탈문(解脫門)


삼각산 진관사 공적비와 사적비






석가모니부처님이 태어나신 룸비니동산을 상징

룸비니(산스크리트어: लुम्बिनी)는 
뒤에 석가모니가 된 샤카 왕자인 싯다르타 고타마가 태어난 신성한 곳이다.

이 탄생지는 1896년에 2,200년 전 인도 아소카 황제의 기념 기둥이 발견됨으로써 
가장 중요한 불교유적지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현재 국제적인 후원아래 
룸비니 개발 계획으로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룸비니의 주요 매력은 8㎦에 펼쳐져 있으면서 역사지의 보물을 모두 
소유하고 있는 신성한 정원이다. 현재 개축중에 있는 마야데비 사원은 
성지순례자와 고고학자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주요 방문지이다. 

붓다의 어머니인 마야데비의 얕은 양각을 발견할 수 있는 이곳은 브라마와 
인드라의 힌두신으로써 그를 낳고, 연꽃잎과 성수로 목욕시켰던 곳이다. 
마야데비사원 서쪽으로 네팔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기념물인 아소카 
석주가 서 있다. 이 기둥은 기원전 249년 아소카 황제가 이 성지를 순례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던 것이다. 

브라미어로 새겨진 기둥조각이 기원전 623년에 태어난 붓다의 출생지가 
바로 이 룸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삼각산 마루에
새벽빗 비쵤제
네 보앗냐 보아
그리던 太極旗를
네가 보앗나냐

독립신문 제30호에 실린
<太極旗> 詩 일부






보현원, 문수원, 선유원, 연지원, 향적당, 보문원, 동정각
대웅전, 명부전, 독성전, 칠성각, 나한전, 나가원, 동별당(적묵당), 홍제루

함월당, 길상원, 공덕원, 효림원


홍제루(弘濟樓) 밑에서 바라 본 대웅전


홍제루 주련(弘濟樓 柱聯)
慈光照處蓮花出(자광조처연화출)- 자비광명이 비추는 곳에 연꽃이 피고
慧眼觀時地獄空(혜안관시지옥공)- 지혜의 눈이 열릴 때 지옥도 비네.
又況大悲神呪力(우황대비신주력)- 또한 부처님은 대자대비하신 신통한 주력으로
衆生成佛刹那中(중생성불찰나중)- 중생은 찰나 중에 성불시켜 주신다.


대웅전




붉은 작약꽃이 밤새 내리 비로 빗물을 머금고 산뜻하게 피어났다.






초월선사 진영
초월스님은 칠성각에서 발견된 태극기와 신문을 일경에 체포되기 전
급하게 숨겨놓은 것으로 밝혀졌으며, 독립자금과 인재들을 상해임시정부에 
보내면서 불교계 항일운동의 주축으로 활동했던 분입니다.
수차례 체포되고 고문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가운데
1944년 청주교도소에서 순국하셨습니다.
1986년 건국포장과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고
2014년 6월.'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지정되었습니다.








경내 느티나무 쉼터, 잠시 앉아도 본다.


여긴 계곡물이 말라 허옇게 마른 돌들이 저마다 목마르다 아우성이다.


고인 맑은 물을 보니 들숨날숨 호흡이 시원, 마음까지 촉촉해 온다.


그래도 숲은 우거져 5월의 푸른 봄향기는 코발트빛 하늘을 향해 퍼져 나간다.




어디 그 5월의 푸르름을 담아나 볼까?


함월당(含月堂)
템플스테이(Temlpestay)하는 집


짚으로 만든 운치있는 김칫광


그 안엔 김칫독들이 땅속에 묻어놓았다. 
얼마나 맛 있을까? 생각하니 입안에 침부터 고인다.


그대와 내가 가던 길 잠시 멈춰서서 숲속 한 곳에서 푸르름을 한껏 안으며
같이 건강해서 같이 나누는 이 행복을 오래도록 건강해 누리자고, 
그리고 많은 분들께 이 풍경 저풍경을 담아 간접적인 행복이나마 드리자며 
손가락을 걸었다. 



철철 요란스레 흐르는 계곡물소리는 여름장마때나 기대해야 되겠군!
그러나 지금은 물에 잠겨 쉬어가는 푸른 나무만 물끄러미 바라보며 마음을 쉬인다. 




진관사 관람을 마치고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 위치한 성령대군 사적지에 닿으니
새 빨간 양귀비 꽃이 우릴 반긴다.








작약꽃이 피려고 몽우리를 바알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꽃모양이 모란과 비슷한데 잎모양이 다르고 피는시기가 다르다.
대체로 모란꽃은 4~5월에 피고, 작약꽃은 5~6월에 핀다. 
작약꽃은 함박꽃이라고도 불리며, 꽃말은 '수줍음'이다.

쉽게 얘기하자면 둘의 큰 차이는 
작약은 풀이고 모란은 나무이다. 

 
잎모양을 자세히 보세요. 모양이 다르지요?
한동안 구분이 잘 안됐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알지요.

모란꽃과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옮깁니다.
잠시 쉬어 가세요.

설총의 <화왕계>
신라 신문왕이 설총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부탁하자 <화왕계>를 
이야기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좋은 봄날에 현란하게 핀 백화의 왕 모란이 수많은 꽃 위에 군림하자 
천자만홍의 꽃들이 다투어 화왕의 궁궐에 입조할 때 요염한 절세미인 
장미가 아양을 떨며 화왕에게 말하기를
"첩이 일찍 왕의 염덕을 듣고 흠모하는 마음으로 찾아 왔으니
행여 버리지 않으시면 하룻밤 잠자리를 같이 하겠나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또
포의한사로서 길가에 있던 할미꽃이 구부리고 와서 화왕에게 
그 곁에 있으면서 일하기를 원하며 요염한 여자에게 현혹되지 말기를 간하였다.

그러나 화왕은 벌써 요염한 장미에게 빠져서 할미꽃의 충언을  알면서도 그것을
듣지 않았다. 그것을 본 할미꽃은 분명히 왕에게 아뢰기를 
"신이 처음에는 왕이 총명함이 의리를 깨달으리라 믿었으나 가까이서 보니 
그렇지 못하외다. 예로부터 임금이 요염한 여인을 가까이하게 되면 충직을 
소원하게 하여 마침내 패망을 부르지 않은 적이 드뭅니다. 서시 같은 요회가 
나라를 뒤집고 맹가 같은 현인이 뜻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인즉 
신인들 어찌 하리까"하고 왕에게서 떠나려 하자 왕도 그제서야 깨닫고 
할미꽃에게 사과하였다.

이야기가 끝나자 신문왕은 낯빛이 변하여 가로되 
"뜻이 깊은 이야기로서 왕자의 계가 될 만하니 곧 글을 만들어 오라"고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오늘날까지도 인구에 회자하는 <화왕계>라는 것이다.

모란꽃잎에 이름이 새겨진 꿈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모란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후근이란 자가 "꿈에 모란꽃이 많이 피고 꽃잎이 몹시 큰데, 꽃 위에는 모두
허실이라는 두 글자가 씌어 있었는데 이것은 무슨 징조일까?"하고 물었다. 
내가 이 꿈을 풀기를 
"이는 허실이라는 자가 과거에 급제할 조짐이오. 옛 시에 말하기를
'저 모란꽃 저렇게 튼 것 우습기도 하더니, 씨 하나도 맺지 못하고 부질없이 
빈 가지일세'라고 했으니 다만 아들을 얻지 못할 것이 두려울 뿐이오"라고 하였다.

그런 지 얼마 후에 허실은 과거에 급제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일찍 죽고 없었다.
즉 모란은 부귀공명을 상징하여 과거에는 급제했으나, 씨를 맺지 못하였으니
후손이 없음을 뜻한다.

미륵과 석가의 모란꽃 피우기 시합

창세신화의 창세가에 실려 있는 이야기이다.
미륵은 인간을 비롯하여 해.달.별 등의 만물을 창조한다. 그러나 뒤늦게 나타난
석가가 이 모든 것을 빼앗으려고 하여, 이 세상을 두고 몇가지 내기를 벌인다.

석가가 계속 시합에 진 가운데 마지막으로 모란꽃 피우기 시합을 한다. 
즉 모란꽃씨를 심어 놓고 그 앞에 미륵과 석가가 누워 있다가 모란꽃이 
먼저 피는 쪽이 이기는 것으로 하였는데 모란꽃은 미륵의 것이 잘 피었으나 
미륵이 잠든 사이에 석가가 이를 훔쳐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석가가 이 세상의 주인이 되었다.

여기서 모란꽃은 통치권을 상징한다. 
이 신화에서는 모란꽃이 잘 핀 미륵에게 신격을 제시했으나 미륵은 그 모란꽃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통치권은 석가에게 돌아가게 되고 만다.
 

무우 파 할때 파꽃




성령대군 묘역 및 신도비(誠寧大君 墓域 神道碑)
향토문화유적 제2호,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산69-1

성령대군의 이름은 종(衤+重)이니 조선국 제3대 태종왕의 네째 아드님으로 
양령(讓寧).효령(孝寧).충령(忠寧)대군(세종대왕)의 친동생이시며 
어머니는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이시다.

대군께서는 태종5년(1405)에 탄신하시고 일찍이 성령군에 봉해졌다가 
태종14년(1414)에 대군에 進封 되셨고 태종17년(1417)에 창녕성씨 좌찬성 억(抑)의 
따님과 혼인하셨으며 부인은 삼한국 대부인(三韓國大夫人)의 품계를 받으셨다.

대군께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효제(孝悌)하고 호학(好學)하시어 
태도가 단정하여 부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의 위계에 올랐으나 
태종18년(1418) 2월에 홍역으로 향수 14세에 서거하셨고 
시호는 변한국 소경공(卞韓國昭頃公)이시다.

태종대왕께서는 이를 몹시 비통해 하시어 친히 제문을 지으시고 분묘옆에 
암자를 지어 대자암자(大慈庵子)라 하고 대군의 명복을 빌게 하였으며, 
산리동(酸梨洞)이란 지명을 대자동(大慈洞)이라 명명(命名)하시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대자암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성령대군의 묘는 3단의 장대석(長臺石)을 쌓았으며 
묘의 주위에 호석(護石)을 둘렸다.
묘소의 좌우에는 석사자(石獅子), 석양(石羊)이 배치되어 있으며 
묘앞에는 상석.장명등 좌우에는 문인석이 있다.

신도비는 1418년(태종18) 4월에 세운것으로 도총제 조용(趙庸)이 묘지를 짓고 
대제학 변계량(大提學 卞季良)이 신도비명을 짓고 
직 예문관(直 藝文館) 성개(成槪)가 글을 썼다.

팔작지붕의 옥개석에 낮으막한 귀부를 갖추고 검은 수석(水石)의 비신(碑身)을 
양옆에 세운 우주석(隅柱石)에 끼워 넣은 것이 특징이다. 비의 규모는 
폭 130cm, 두께 25cm, 비신의 높이는 163cm 이며 전체높이는 300cm 이다.

특히 성령대군의 묘역은 석조물이 많고 그 조성양식 또한 특이하여 
조선시대 묘제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 준다.


성녕대군 이종(誠寧大君 李 衤+重)의 사당(祠堂) 대자사(大慈祠) 三門, 영추문(永追門)




부처님 머리를 상징하는 불두화(佛頭花)






대자사(大慈祠)








성령대군 묘로 오르는 돌계단










제일 꼭대기에 성령대군의 묘가 있는데 보이지가 않군!




토끼풀 무리들이 햇빛을 따사롭게 받으며 정겹게 피어 있다.


잘 다듬어진 잔디언덕을 올라 성령대군 묘에 이른다.




성령대군 묘(충령대군이신 세종대왕의 친동생 묘)
성령대군의 이름은 종(衤+重)이니 조선국 제3대 태종왕의 네째 아드님으로 
양령(讓寧).효령(孝寧).충령(忠寧)대군의 친동생이시며 
어머니는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이시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병(홍역)으로 죽었다.






세찬 바람이 키큰 나무의 잎들을 괴롭혀 이리저리 바람에 끌려 다녔다.










有明朝鮮國大匡輔國誠寧大君卞韓昭頃公神道碑銘 幷序

永樂十六年歲在戊戌春二月初五日. 大匡輔國誠寧大君年十四以病卒. 近臣傳旨若曰.
誠寧大君衤+重亡矣. 年旣不永. 而又無子. 悲之庸有旣乎. 其令史臣碑于墓道. 
垂諸不朽. 庶有以慰其精魂於九泉之下. 且以塞予無窮之悲也. 臣季良俯伏承命. 謹按大君.
諱衤+重. 世子之母弟. 於次爲第四. 以乙酉秋七月壬寅生. 姿容端美. 聰慧異常. 
於童稚雜戲. 泊然無所好. 兩宮絶愛之. 年八歲始就學. 學日進. 不小懈. 且善習射.
已至百五十步. 壯而能者咸見推焉. 至於孝親敬兄. 皆得其道, 一如成人. 殿下益重之. 
凡起居飮食. 率不離於左右. 歲甲午正月. 封誠寧大君. 丁酉九月. 授階大匡輔國. 
娶嘉善大夫左軍同知 揚制成公諱抑之女. 封三韓國大夫人. 今年正月十九日感疾. 
兩宮憂甚. 祈禱救藥等事. 靡不盡心. 及卒震悼. 輟膳二日. 宗親百僚下至僕御之道. 
莫不悲哀. 議政府率百官陳慰.且請進膳. 翼日只令進粥. 輟視朝三日. 時殿下過於哀慟. 
體氣稍違豫. 耆老大臣請進肉膳不許. 請至再三益勤. 竟不允. 以素膳終三十日. 
追封大君卞韓國公. 贈諡昭頃. 有司具葬事. 以是年四月乙酉. 葬于高陽縣北酸梨洞之震麓. 
命立祠堂於其第. 又命立後. 以主其祀. 葬祭之禮. 盖無憾矣. 恭惟我殿下. 爲子則盡其孝於親. 
爲父則盡其慈於子. 今大君之喪事. 誠心懇至. 而哀慟無已. 思慮深長. 而本末悉備. 
此雖出於所性之德. 而極乎人倫之道. 抑亦大君之資禀卓異. 而行實相孚. 
故有以獲殿下之鍾愛若是其至. 大君其賢矣哉. 而不幸短命.嗚呼可勝哀也哉. 臣嘗讀論語. 
固有憾於以孔子之聖. 而不免於哭鯉. 今於昭頃之卒. 又有以信夫天之或有未定也無疑矣. 
謹拜手稽首而爲銘. 銘曰

昭頃之質. 玉潔陽和. 昭頃之行. 孝悌柔嘉. 敏而好學. 眷愛有加. 天胡賦德. 而奪之年.
嗚呼聖父. 痛彌天淵. 信乎靡定. 孰使其然. 崇秩其封. 立後以祀. 日月旣良. 山川其美.
其藏其密. 其永寧哉. 刻銘墓道. 用昭厥哀.

유명조선국 대광보국 성령대군 변한소경공 신도비명 병서

영락 16년 무술년 봄 2월 5일에, 대광보국 성령대군이 14세의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측근 신하가 왕지를 전하여 말하기를, "성령대군 종이 죽었다. 나이도 
어릴 뿐 아니라 또 아들도 없으니, 그를 슬퍼하는 마음 어찌 다함이 있겠느냐. 
사신으로 하여금 그의 무덤 길에 비석을 세워 영구히 전하여서 조금이나마 
그의 구천 아래에 있는 정혼을 위로함이 있게 하고, 또 나의 무궁한 슬픔을 
막게 하라." 하였다. 신 계량은 엎드려 명령을 받들었다.

삼가 상고하건대, 대군의 휘는 종(衤重)이니, 세자의 동모 아우이며, 
형제의 차례로는 넷째이다. 을유년 가을 7월 임인일에 낳다. 자태와 얼굴이 
단정하고 아름다우며, 총명하고 슬기로움이 범상치 않았다. 
어린아이들의 잡스러운 장난에는 담담히 좋아하는 바 없으니, 
왕과 왕후 양궁께서 몹시 사랑하였다. 나이 8세 때에 처음으로 취학하였는데,
학업이 날로 진보하며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또 활쏘기 연습을 
잘하여 이미 화살이 150보에 도달할 만큼 되니, 장년이며 능한 자도 다 그를 
추중하였다.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을 공경하는 일에까지도 다 도리를 얻어 
모든 것이 장성한 사람과 같았다.

전하가 더욱 소중하게 여겨, 기거하고 음식 먹을 데까지도 거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갑오년 정월에는 성령대군으로 봉하고, 정유년 9월에는 
대광보국의 위계를 주었다. 가선대부 좌군 동지 총제 성공 휘 억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삼한국대부인으로 봉했다.

금년 정월 19일에 병이 드니, 양궁께서 근심이 극심하여 기도하고 구료하고 
약쓰는 등의 일을 성심껏 다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졸하자 매우 슬퍼하여 
이틀동안이나 수라를 들지 않았다. 종친과 모든 신료들과 아래로 노비의
무리에 이르기까지 슬퍼하지 아니하는 자 없었다. 의정부에서 백관을 거느리고 
조위의 말씀을 올리고, 또 수라 들기를 청하니, 이튿날 다만 죽을 올리라고만 
명령하였으며, 정사 보는 것을 3일 동안 중지하였다.

그때 전하가 애통해함이 지나쳐서 몸과 기운이 조금 평안치 못하게 되니, 
기로들과 대신들이 고기 반찬을 드시라고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두 번 세 번 더욱 부지런히 주청하였으나 마침내 윤허하지 아니하고, 소찬으로 
30일을 마쳤다. 대군 변한국공으로 추봉하고 소경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주무관이 장사의 절차를 갖추어서 이해 4월 을유일에 고양현의 북쪽 산리동 
진방의 산기슭에 장사 했다. 그의 재택에 사당을 세우고 또 후사를 세워
그의 제사를 맡게 하라고 명하였다. 
장사하고 제사하는 예는 대체로 유감됨이 없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는 아들이 되어서는 어버이에게 그의 효도를
다하고, 어버지가 되어서는 아들에게 그의 자애를 다하였다. 지금 대군의 
상사에 성심은 간절하고 지극하며, 애통해함은 다함이 없고 생각하는 것은 
깊고 멀어서 근본과 결말이 모두 갖추어졌다.

이것은 비록 타고난 천성의 덕에서 나왔지만 인륜의 도를 지극히 한 것이다.
아니면 또한 대군의 자질과 품성이 우뚝하여 행동과 실지가 서로 맞기 때문에, 
전하의 사랑함이 이와 같이 지극함을 얻은 것일 것이니, 대군은 어지시었도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수명이 짧았으니 아, 슬픔을 이길 수 있겠는가.
신이 일찍이 <논어>를 읽다가 공자 같은 성인도 먼저 죽은 아들 이(鯉)때문에 
우는 일을 면치 못한 것을 진실로 유감으로 여겼더니, 이제 소경(昭頃)이 졸하니, 
하늘의 혼은 또 바르지 못한 것도 있음을 의심하게 되었다.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명(銘)을 쓰노라.

명에 이르기를,
소경의 자질은(昭頃之質)/ 옥같이 깨끗하고 별처럼 온화하다(玉潔陽和)
소경의 행실은(昭頃之行)/ 효도하고 우애 있고 부드럽고 아름답다(孝悌柔嘉)
명민하고 학문을 좋아하여(敏而好學)
/ 양궁의 권애함이 더함이 있었다(眷愛有加)
하늘은 어찌하여 덕을 부여하고(天胡賦德)/ 수명은 빼앗는가(而奪之年)
아, 성스러운 아버지여(嗚呼聖父)/ 슬픔이 천지에 가득하네(痛彌天淵)
진실로 바르지 못함이여(信乎靡定)/ 누가 그렇게 만드는가(孰便其然)
품질을 높여서 그를 봉군하고(崇秩其封)
/ 후사를 세워서 제사를 받들게 하였네(立後以祀)
해와 달은 이미 밝고(日月旣良)/ 산과 시내는 아름답도다(山川其美)
그의 몸 그윽하게 감첬으니(其藏其密)/ 길이길이 평안하리라(其永寧哉)
묘도에 비 세우고 명을 새겨(刻銘墓道)/ 슬픔을 밝히노라(用昭厥哀) 하였다.

성령대군의 사적지를 뒤로 하고 다음 일정인
성령대군묘의 인근에 있는 고려의 명장 최영장군의 묘에 이른다.






최영장군의 묘로 오르는 숲속 길
































최영 묘(崔瑩墓)
1316년(충숫왕 3)~ 1388년(우왕 14)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70-2, 경기도기념물 제23호

고려말의 명장이며 충신인 최영장군의 묘
봉분은 단분으로 부인 문화유씨와의 합장묘이며, 화강암 장대석으로 2단의 
호석을 두른 전형적인 고려 양식의 방형묘(方形墓)이다. 

곡장(曲墻)이 둘러쳐진 봉분의 바로 앞에는 혼유석.상석.향로석이 밀착된 채 
차례로 놓여 있으며, 그 좌우에는 2기의 묘비가, 봉분의 좌측 뒷편에 1기의 묘비가 
각각 세워져 있다. 봉분 좌우의 묘비 앞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 1쌍이 배열되어 
있으며, 이 묘의 뒷편 한 계단 위에 장군의 부친 최원직(崔元直)의 묘가 있다.

최영장군이 무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1358년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한 
왜구의 배 400여 척을 격파한 것을 비롯한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우면서 부터였다. 
1361년에는 개경까지 침입한 홍건적을 물리치고 수도를 수복하였다.

1381년 문하시중을 거쳐 판문하부사가 되었으며, 명이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고 
그 이북, 이서, 이동의 땅을 요동에 예속시키려 하자,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388년에 개성에서 처형되어 이곳에 안장되었다.

본관은 동주(東州, 지금의 철원), 수사공 유청(守司空 惟淸)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사헌규정(司憲糾正) 원직(元直)이다.

1374년 명나라가 고려에게 제주도의 말 2,000필을 요구하자, 제주도에 있던 
원의 목장 호목(胡牧)들은 300필만 보내왔다. 결국 고려는 탐라를 정벌할 것을 
결정했다. 당시 양광도.전라도.경상도 도통사였던 최영은 염흥방(廉興邦).
변안렬(邊安烈),임견미(林堅味).나세(羅世) 등과 함께 전함 314척, 
군사 25,100명을 거느리고 제주도에 가서 평정했다. 1375년(우왕 1)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고, 이후 제주도는 고려에 귀속되었다.

"금(金)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崔元直)의 유훈을 종신토록 명심하여 
명리(名利)를 돌보지 않고 청렴하게 살았다.


전면이 최영장군의 묘, 후면에 최영장군의 아버지인 최원직의 묘가 있다.


최영장군 묘


武愍公忠魂碑(무민공충혼비 - 최영장군충혼비)

公 高麗朝 盡忠奮義 宣威佐命 定亂安社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門下侍中領三司事
判密直司事 上將軍兼 判重房事 八道都統使 鐵原府院君 諡 武愍 姓 崔 諱 瑩 
號 奇峰 東州人也 <...생략...>

공은 고려조 진충분의 선위좌명 정난안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문하시중 
영삼사사 판밀직사사 상장군 겸 판중방사 팔도도통사 철원부원군 
시 무민 성 최 휘 영 호 기봉 동주인야 <...생략...>






崔元直, 최영의 부친-묘




贈推忠雅亮廉儉輔世翊替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判門下府事
上護軍兼判藝文春秋館事 東原府院君崔公墓

증추충아량염검보세익체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판문하부사
상호군겸판에문춘추관사 동원부원군최공-崔元直, 최영의 부친-묘


최영장군 부친 최원직 묘이다. 그 아래로 최영장군 묘가 자리한다.






바로 보이는 전면이 최영장군의 묘이고 후면이 최영장군의 부친의 묘이다.


마지막으로 고려말기의 명장 최영장군묘 답사를 마치고 하루 나들이를 마무리 한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르신 어버이 뜻을 받들고
한평생 나라 위해 바치셨으니
겨레의 스승이여 최영 장군

 이 나라 이 겨레 바로잡고자
남으로 왜적을 물리치시고
북으로 오랑캐를 무찌르셨으니
장하다 그 이름 최영 장군

초등시절 고무줄 뒤기 놀이 하며 많이 불렀던 「최영 장군의 노래」이다.
옛날을 회상하며 다시 불러보니 
옛시절의 그리움과 함께 기분이 좋고 가슴이 뭉클하다.

1절 첫 소절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말은
나라 안팎으로 혼란스러웠던 고려 말기에 대들보 같은 존재였던 
최영{崔瑩, 1316(충숙왕 3년)-1388(우왕 14년)} 장군이 
16세 때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유언(遺言)이었다.

여기 ‘황금’은 곧 ‘돈’이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말은 돈에 의해 마음이 흔들리지 말고, 
뇌물로 인해 부패 타락한 인간이 되지 말라는 뜻이다. 
최영은 부친의 유언을 글귀로 써서 항상 옆에 두고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아 
평생 지킨 강직용맹(剛直勇猛)한 장군이자, 청렴결백(淸廉潔白)한 재상이었다. 
대한민국 청백리(淸白吏)의 표본인 최영 장군은 
동주(東州) 최씨들의 긍지요, 대한민국의 자랑거리이다.

지위의 고하에 관계없이 한결같은 의인으로 산 최영 장군은 
평생 온 백성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정치권력은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이성계는 최영 장군이 키워준 후배였다.
최영 장군이 살아 있는 한 이성계는 새 나라를 세울 수 없었다. 

이성계는 최영 장군에게 “무리하게 요동을 정벌하려고 한 것은 
왕명을 어기고 권세를 탐한 죄”라고 하면서 참형(斬刑)에 처했다. 
그러자 73세의 노익장(老益壯) 최영 장군은 
“평생에 내가 탐욕을 부렸다면 내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최후를 맞이했다. 

최영 장군의 무덤(경기도 기념물 제23호)은 
그 후 600년 동안 최영 장군의 무덤에는 풀 한 포기가 나지 않았다. 
자연과 역사가 600년 동안 최영 장군의 결백을 증명해주었다. 
그런데 1976년부터 최영 장군의 무덤에 풀이 나기 시작했다. 
600년 동안이나 결백을 증명해주었으니 
이제는 그만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뜻일 게다. *인터넷 옮김

서오릉이 휴관되는 바람에 생각지도 못했던 
최영장군묘까지 참배하고 나니 더욱 의미있는 후련한 시간이 되었다.
하룻동안 많은 공부를 겸해 다녀온 해피했던 일일 건강걷기 나들이였다.
긴 이야기들, 사전 처럼 두고두고 보시면서 편안히 즐기세요.
감사합니다.


찬란한 빛/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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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찬란한빛e님의 댓글

profile_image 찬란한빛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안녕하세요?
오늘의 이야기는 깁니다.
두고두고 보시면서 쉬어 가세요.
아직 미진한 부분이 있어 시간나는대로 더 보완할 예정입니다.
정성들인 게시물을 잘 보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찾아 주시는 분께 깊은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세요.

찬란한빛e님의 댓글

profile_image 찬란한빛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이 게시물에 나오는 성령대군은 세종대왕의 동생입니다.

태조 이성계의 아들: 태종 이방언
태종 이방언의 네 아들: 1.양령대군 2.효령대군 3.충령대군(세종대왕) 4.성령대군

여기 찾아간 곳은
쉽게 말해서 성령대군의 묘는 14살에 홍역으로 졸한 세종대왕 동생의 묘입니다.

소슬바위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소슬바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역사를 배우게 됩니다
가까운 곳에 자리해 있는데 가보지못해
아쉽습니다
꼭 탐방해야 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김영희 선생님
아프시지 말고
건강하세요

찬란한빛e님의 댓글의 댓글

profile_image 찬란한빛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정감이 느껴지시는 소슬바위시인님,
오늘도 고운자리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산책차 가보심 참 잘 오셨다 할 꼽니다.ㅎ
건강을 염려해 주셔서 더욱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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