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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참전옹진지구 전사자 위령제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함동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2,386회 작성일 16-01-03 16:07

본문

위령제의 獻詩(헌시[다시 그날에 -6.25참전 옹진지구 전사자위령제에 즈음하여]) 낭송/함동진 . 사진/이강성





<위령제의 獻詩(헌시[다시 그날에 <br/>-6.25참전 옹진지구 전사자위령제에 즈음하여]) 낭송>

나는 <6.25옹진전투전사자326위위령탑> 건립에 獻詩(헌시[다시 그날에 --6.25참전 옹진지구 전사자위령제에 즈음하여])를 봉정(奉呈)하고 13년이 흘렀습니다.
오늘에야 위령비가 세워진 현장의 제13회 위령제에서 참석하여 직접 낭송을 하게 되었습니다.
각처의 관련된 분들께서 전사자들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하여 겸손히 참석하여 헌화분향하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고, 많은 장병들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모습에 찬사를 보내드립니다.
나도 위령제 현장을 촬영하였으나 옹진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생존하시어 오늘에 이르고 오직 대한민국을 위한 애국심에 불타고 있는 이강성 영웅님의 고령과 노구는 아랑곳 않고 위령제 始末을 샅샅이 촬영하여 메일로 보내주셨기에 저의 카페에 올리며 독자 여러분께 삼가 소개드립니다.

(獻詩)
[다시 그날에 -6.25참전옹진지구전사자위령제에 즈음하여]

님들이 흘리신
붉은 피 떨궈진 방울방울마다
자유 싹트고, 민주 움트고, 그 바탕 위에
강국 대한민국 성장하였나니

다시 그날에
님들의 못다한 숨
우리 이어 쉬고 있음을 감사드리오며
천지를 향불로 채우고
국화 억만 송이 헌화하고
눈물로 임진강, 한강, 낙동강을 범람 시킨들
어찌 위로와 보은이 되오리까

국력을 위해하고 국가기강 거스르는
정체성 불명한 망녕된 자 아직 있사오니
님들의 고귀한 피 흘림 욕보이지 않도록
저희들 뭉쳐 이 나라 이 겨레 길이길이 지키오리다

꽃 피고 새 지저귀는 평화로운
까치산 국사봉에서
오늘 다시 그날에
순국의 피 흘림에 감사드리오며
삼가 분향하오니 흠향하소서

*6.25참전유공자전우회(회장 吳泰九)가 주관하는 6.25참전 옹진지구 17연대 옹진전투전사자 326명(당시 수도경비사령부, 현재의 육군제2사단17영대)에 대한 합동위령제를 위한 獻詩.
2006. 09. 27 육군 제2사단 17연대(3821부대) 경내에 [6.25참전 옹진지구전사자 위령탑]건립 獻詩로 위령비에 새겨 세워짐.
2010. 11. 00. [2010 江東藝術人展]도록 P.103. 강동예술인총연합회 발행.
2013. 09. 04 위령제에서 함동진이 직접 낭송.
2013. 10. 14 [강동문학22년사]中, <강동문인 문학비 순례>項에 수록 p.449-451.
내용은: [6.25참전 옹진지구전사자위령탑]건립 獻詩 내용임

2006년 9월 27일
함동진(시인. 아동문학가)


2013.09.04 6.25옹진전투전사자위령탑의 헌시<다시 그날에>. 195. 사진/함동진


2013.09.04 6.25옹진전투전사자위령탑의 헌시<다시 그날에>가 새겨진 곁에서 168 사진/함동진
17연대 쌍호역사관(雙虎歷史館) 현판


2013.09.04 6.25옹진전투전사자위령탑의 헌시<다시 그날에>. 194. 사진/함동진


2013.09.04 6.25옹진전투전사자위령탑의 헌시<다시 그날에>를 낭송하는 함동진 시인. 232. 사진/함동진


2013.09.04 6.25옹진전투전사자위령탑의 헌시<다시 그날에>가 새겨진 곁에서 249 사진/함동진


2013.09.04 6.25옹진전투전사자위령제 행사장의 모습 214 사진/함동진


2013.09.04 6.25옹진전투전사자위령제 행사장의 모습 212 사진/함동진


2013.09.04 6.25옹진전투전사자위령제 행사후의 기념촬영(초대된 래빈들과) 243 사진/함동진


2013.09.04 6.25옹진전투전사자위령제 행사후의 기념촬영(초대된 래빈들과 생존영웅들의 가족과 함께) 247. 사진/함동진


좌측부터, 첫째-함동진시인. 둘째-오태구 6.25참전유공자전우회 회장 20140108_102548_a2aec8cded1caa6e9198c343ac0dbea[1] 사진/이강성


오태구吳泰九 6.25참전유공자전우회 회장 [1]13.10.22 사진/이강성


20130110_163736_79c2b063ce44f27eb7a8c25e992ea1a[1] 사진/이강성


20130110_163802_3d513db11e965ae52744241c799d5e96[1] 사진/이강성


20130110_163832_bb8bd6950c1174886afb0ae8b46a4b7[1] 사진/이강성
사진: 왼쪽 이강성 고문. 오른쪽 오태구 회장


오태구吳泰九 회장 [2]2013.10.22 사진/이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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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 도 사
1950년 6월 25일 미명에 북한공산괴뢰군 제6사단 제1연대와 제3경비여단이 합세하여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옹진반도에 전광석화와 같이 쳐들어 왔습니다.
당시 국군 제17연대가 옹진지구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북한공산괴뢰군의 불법남침의 6.25전쟁은 옹진반도인 서부전선에서부터 철원의 중부전선 그리고 주문진의 동부전선까지 한반도의 동서를 가르는 38선 전체에 대한 남침을 일시에 감해하여 왔습니다.
우리 17연대 장병은 6월 25일 새벽 3시 50분부터 6월25일 밤 12시까지 결사항전으로 싸웠습니다.
6월 26일 새벽 우리 17연대 주력부대는 인천으로 후퇴하고 본인과 50여명 장병은 끝까지 저지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아 6월 26일 새벽부터 오후3시까지 완강하게 공격과 수비를 거듭하며 결사항전 하였습니다. 그러나 북한공산괴뢰군의 중무장 탱크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고, 소총과 57미리 대전차포의 경무기로 무장한 우리국군은 더 이상 이에 맞설 수가 없는 역부족의 전력이었습니다.
적의 막강한 화력 앞에 전멸의 위기에 놓임을 파악한 상부로부터의 명령을 받은 우리는 6월 26일 밤 대원 50여명 중 20여명만이 어선을 이용하여 인천으로 후퇴하였습니다.
처절한 36시간의 이 전투에서 우리 17연대 1,100여명 중에서 326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으며, 막강한 화력으로 선제공격 우세에 있던 공산괴뢰 인민군들의 희생도 그 후 확인한 기록에 의하면 560여명이 살상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애통해하는 것은 수많은 중상 전우들의 아비규환의 울부짖음 참상을 뒤로하고 어찌하지 못한 채 후퇴한 것입니다. 경상자는 우리가 동행 후퇴하였으나 중상자에 대하여는 눈물겨운 죄를 지었습니다. 아직도 그 처절한 전투 당시를 돌이켜 생각하면 죄책에 사로잡혀 얼굴을 들기가 천근만근 무겁고 아린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동안 여러 곳의 격전지에서 희생된 전사자들에 대한 위령제가 있었으나 오직 옹진전투의 전사자들에 대하여는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거니와 국민과 관계자들의 관심 밖이어서 당시 전투에 참전하였고 현재까지 생존하여 있는 저로서는 가슴을 저미는 아픔 속에 죄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저는 2001년부터 이 한 몸 다할 때까지 전우들의 영령들을 위로코자하며, 그들이 조국을 위해 용맹스럽게 싸우다 전사한 공훈을 만세에 알리고자 노심초사 헌신코자 합니다.
옹진의 까치산, 국사봉
이날의 전투에서 희생된 영령들이시여!
누란지세의 조국 대한민국을 살려내시고 산화한 영웅들이시여!
고이 잠드소서!
그대 영령들을 영원히 기리며 추모하기 위하여 우리는 위령탑건립을 추진하여 왔음을 말씀드립니다.
2006년 9월 25일
대한참전당체전연합회
6.25참전유공자전우회 중앙회장 오 태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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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1 [옹진반도 전투('50. 6.25∼26)] | 戰爭史 2006/05/10 12:15
http://blog.naver.com/azony/50004204248

한국전쟁 1
[옹진반도 전투('50. 6.25∼26)]
<육군지휘학처 한국전쟁 전쟁전투사 인용>

옹진 전투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 옹진반도에 배치되어 있던 국군 독립 제17연대가 T-34형 전차 10여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6사단 제14연대와 제3경비여단 등 2개 연대 규모의 병력에 맞선 옹진.강령 일대에서 2일 동안에 걸쳐 치른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국군 독립 제17연대는 초전에 밀려드는 북한군에 맞서 45Km에 달하는 광정면에 부대를 전개한 상태로 지연전을 전개하던중, 개성과 문산 지역의 국군부대들이 후방으로 물러남에 따라 적중에 고립된데다가 작전지역이 양단됨으로써, 조직적인 저항이 불가능하여 해상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옹진반도에 위치한 국군 독립 제17연대는 작전계획상 적의 전면공격을 받을 경우, 해상으로 철수하도록 계획되어 있었으므로 곧 해군의 LST가 지원되어, 연대주력은 이 LST를 이용하고 제2대대(+)는 기관선과 목선을 이용하여 부포항과 사관리에서 각각 해상 철수를 실시, 27일 - 28일 사이에 인천을 경유하여 수원으로 집결한 후, 군 예비가 되었다.

■ 피아상황
1. 북한군 38경비 3여단(장: 최현)과 6사단 14연대가 공격해 왔음
2. 17연대는 45km에 달하는 광정면을 담당하여 정상적인 방어편성 불가능했음으로 분, 소대단위진지를 편성하여 38선을 경계한 가운데 예하 제1대대를 좌, 제3대대를 우, 제2대대를 예비로 보유했슴. 포병은 제 7포병대대가 연대를 직접지원 했는데 2개 포대는 전방대대에 배속을 주고 대대(-2)는 연대에서 직접 운용했슴.

■ 작전경과
1. 25일 새벽 17연대는 적공격으로 인해서 3BN와는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좌일선 1BN의 피해가 증가하고
2. 06:00 경 대대장까지 전사하자 적 주공이 제 1대대 방향으로 지향된 것으로 판단, 제 3대대 정면의 상황(옹진 피탈)은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예비인 제 2대대를 조기에 제1대대로 증원 시킴
3. 뒤늣게 3대대지역 돌파 사실을 확인한 연대장은 제2대대 병력을 전환하려 했으나 실패함으로서 연대임무 수행에 결정적인 지역인 우일선 제3대대지역에 적의 압도적인 공격으로 14:00 경에는 양원이 차단되고 연대와 제3대대는 부포항으로 제1, 2대대는 사관항에서 용호도를 거쳐 민간화물선을 이용하여 군산으로 26일에 해상철수를 하게 되었음.
보충1】옹진반도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으로 38선이 가로막혀 있어 아군의입장에서는 하나의 섬과 같은 지형으로서 당시 육군본부의 계획은 적의 전면공격이 있을 경우는 부포항에서 LST 2척으로 철수하여 경인지역에 증원토록 되어있었슴. 그러나 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백인엽 대령이 지휘하던 독립 제17연대는 자대 철수 계획을 세부적으로 수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적으로 부터 기습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음

1. 전투개요
작전기간 : 1950. 6. 25 - 6. 30
작전지역 : 황해도(현.경기도) 옹진군 옹진, 양원, 강령지역 일대
참가부대 및 주요지휘관
아군 * 총병력 3,600여명
보병 독립 제17연대 (장.대령 백 인 엽)
제1대대-김복태(6.25 전사), 제 2대대-송호림, 제3대대-오익경
주요장비 : 81밀 박격포 ( 12문 ), 60M 박격포 ( 18문 ), 57M 대전차포 ( 6문 ), 기관총 ( 25정 )
제 7포병 대대 (장.소령 박 정 호) : 105밀리 곡사포 15문(3문 不가용)
대전차포 중대 (장.대위 노 경 억) : 57밀리 대전차포 6문
공병대 (장. 중위 박 준 희)
야전병원 (장. 대위 지 세 강)
병참보급소 (장. 소령 신 선 균)
헌병대 (장. 대위 함 성 열)
북한군 : 제6사단 14연대 (장. 대좌 한 일 해), 38경비 제3여단 (장. 소장 최 현)
총병력 15,000여 명, 전차 및 장갑차 각 8대, 122밀리 12문, 76밀리 36문, 기타 각종포를 합하여 총 196문
'50년 5월부터 월경하여 초소습격, 양민학살 자행

2. 作戰地域 分析
북쪽을 제외하고는 3면이 바다로 우측의 연백 평야와 분리되어 섬과 같은 지형
38도선 북에는 국사봉 ( 527고지 )이 있어 지대내를 감제
38도선 남쪽에는 충무고지 ( 429미터 )가 국사봉과 700미터 떨어져 유리한 조건하에서 적 감제, 기타 천장산, 녹달산 등이 있어 비교적 유리한 조건에서 적 지역 감제
반도의 남동단의 부포항은 병력과 보급품을 지원할 수 있는 유일한 관문(인천까지 연락선으로 9시단 소요)
해주 - 옹진 ( 해옹선 )
도로망
수동 - 옹진 - 사관에 이르는 50번 도로
해주 - 양원 - 옹진
해주 - 양원 - 사관에 이르는 도로
사관에서 인천까지 정기 연락선으로 9시간 소요 거리
기상은 09:00부터 안개로 인해 방자에 불리한 조건, 야간에 월광은 방지에 유리한 조건 제공
LST와 같은 대형 선박은 1일 2회만 입항 가능(조수의 영향)

3. 전투전의 상황 요약
가. 부대 창설 과정 (17연대) : '48. 11. 20 경기도 시흥에서 창설 '49. 6. 20 수도 경비사로 개편
'49.11.15 옹진지구 전투 사령부에 편성, 은파산 전투 참전 ( 좌-18연대, 우-17연대 )
'49.12월초 은파산 일대 전투 종결, 백인엽 대령 사령관 임명
'50. 3. 1 동사령부 해체, 제18연대 - 수경사로 예속변경, 제17연대 - 옹진지구 방어 임무전담
나. 옹진지구 전투사 전투준비
사 령 부 : 강령 → 옹진 광산으로 이전
중대급 이하 : 방카 구축
군기엄정
징발 사용해온 시설 지방관서에 환원 - 민폐 사례 근절
노무자 및 극빈자에 대한 대민진료, 대민지원 사업전개 - 대군 신뢰감 증진
옹진 철수설로 불안해 한 주민들에게 안도감 부여
진지공사 완료 : 전 병력, 농한기 이용 주민 동원(인인원 6만명)
지방사설 단체 ( 딱별단, 백골단, 서북 청년단, 대한 청년단 ) 통합 향토 방위대 창설
매 2개월마다 부대교대, 교육훈련과 전후방 근무, 6월 23일 경계 태세 해제시 외출 / 외박 통제
다. 적의 동향
6월 20일 전후하여 차량 왕래 빈번
여러진지, 고지상에서 간부급 자주 출현
6월 22일밤 부터 익일 여명까지 해주 - 추야리로 이동하는 차량대열 빈번 중간 지점부터 방광방음하 이동
주민의 그림자 전혀 관측불가
6월 23일 24:00부로 특별 경계령 해제지시, 연대장 계속 경계 태세 유지 명령
유엔 한국 위원단 5명이 연대방문, 38선상 평온한데 긴장감 조성은 역효과 초래라고 지적, 전방부대 제외하고 비상조치 해제
라. 제 17 연대장 판단
제3대대 지역에 중점배치
추야리 → 강령, 양원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적 1접근로로 판단. 현재까지의 적정 고려시 이 지역에 새로운 부대 투입으로 판단
만약 적이 주력으로 조기에 강령, 양원을 탈취하면 연대의 전투력이 동서로 양분되고, 철수로 차단으로 난관 봉착 고려
유사시 예비대까지도 제3대대 지역에 배치 하려는 복안

4. 피아 작전계획
가. 제 17연대 계획(육본에서 하달된 작전 계획)
1호 작전 : 국부전 時 - 적에게 최대 손실 가하면서 현전선고수
2호 작전 : 국부적인 공격 時 - 적에게 최대한 타격, 증원부대 도착시 까지 지연전
3호 작전 : 전면적 공격 時 - 최대한 타격 가하면서 옹진에서 철수, 타방면 전용
※ 연 대 장 : 1, 2호 작전에 대비한 軍民 합동훈련 실시, 3호 작전에 관해서는 부포항을 통해 철수할 복안만 수립
정면 : 45Km
제1대대 좌, 제3대대 우, 제2대대 예비. 제7포병대대 배속
전방 대대는 분.소초 단위로 경계 임무 수행
전면 전쟁시 LST 2척으로 철수하여 타지역 전용토록 계획
'50년 3월 세부철수 계획 작성지시, 연대는 철수 계획 구상만 하였음 ( 부포항 )
나. 북한군 작전계획(적 공격 부대 : 3경비 여단, 제6사단 14연대)
아군 1대대 지역 (좌) : 3여단 ( 최 현 <소장>) 38경지대 5, 1여단 증편
아군 3대대 지역 (우) : 제14연대, 105전차여단 일부

5. 戰鬪經過
24일 연대장은 전방의 적정이 예사롭지 않아 일선 부대의 전 병력을 진지에 투입하고 경계 태세에 임하고 있었음
우측 3대대 : 제6사단의 14연대와 105전차사단의 전차 일부 ( 전차 및 장갑차 각 8대 )
좌측 1대대 : 적 38경비 3여단은 기마대를 앞세워 공격
연대 : 1대대장으로 부터 2대대 증원 요청 , 제3대대와는 통신두절 상태
06:00 제1대대장 전사보고, 적의 주공으로 판단하여 예비대 투입
연대장 : 제2대대를 1대대 지역에 투입할 것 결심, 적은 제3대대 정면에 새로운 부대를 투입하여 양동작전을 실시하면서, 주목표는 옹진 탈취에 있다고 판단
제2대대 ( 송호림 소령 ) : 1개 중대는 사령부 예비, 07:00시에 대대(-1) 를 1대대지역 투입
제2대대를 제1대대 지역으로 투입 직후 제3대대지역 전면 공격 실시
09:00 : 제3대대 지역 - 주진지에서 2-3Km 철수, 수십대의 전차 선두로 한 1개 연대의 적을 저지
허를 찔리게 된 연대장 - 제2대대를 전환 투입조치
11:00 : 제3대대 지역 : 치마산 - 석계리선까지 돌파, 연대본부도 강령으로 이동, 제1,2대대와 연락 두절
당시 포병 포탄 사용은 연대에 파견된 美 고문관의 승인이 있어야 사격 가능
한국군의 선제공격을 억제하여 美.蘇간에 야기될수 있는 문제 사전 견제
15:00시 강령 입구에서 4문의 대전차포를 전차의 가장 취약한 측방을 강타하여, 전차 3대와 장갑차 2대를 파괴
26일 11:00시 연대장은 제3대대 병력과 연대본부 병력을 LST에 승선 시켜 철수시키고 난 다음, 포병 대대장 박소령과 함께 최후의 엄호사격을 한 후 남은 포 1문을 바다에 넣고 죄책감에 자결을 기도, 박소령의 극구만류, 박소령이 수영으로 조각배 1척을 끌고와서 26일 14:00시 옹진반도에서 철수, 표류 중, 19:00시에 어선의 구조로 연평도에 도착
신성모 국방부장관 - 해군에 백대령 구출토록 지시, 해군함정에 의해 인천행
본대는 부 연대장 김희준 중령이 해양대학 실습선을 타고오다 부포항 앞에서 만나, 부연대장 지휘하에 사관항에서 제1, 2대대의 거취를 확인 못한 채 인천으로 항진, 27일 14:00시에 인천에 상륙
백인엽 대령은 6월 27일 08:00시에 인천에 상륙하고 총참모장과 국방장관(신성모)에게 보고 하였는데, 이때 국방장관은 17연대에게 대전으로 피난중인 정부 경호임무 수행을 명령, 16:00시에 새로운 임무를 띄고 대전 선화국교로 이동 집결
제2대대장(송호림 소령 )은 25일 14:30분에 철수명령을 하달하여 내정리에 집결토록 하고, 강령으로 철수를 강행 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적 전차 4대가 양원 3거리를 봉쇄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관으로 철수 하기로 결심
사관 (6. 25 21:00) → 용호도 도착 (6. 26 07:00) → 연평도 (27 07:00) → 인천상륙 (28 06:00) → 군산상륙 (29 07:00) → 대전 이동 본대 합류
6. 28 대전 선화 국민학교에 집결 29일-30일 사이 신병 5,000명 모집, 흩어진 병력 집결,
6. 30 연대병력 : 2,180명 ( 81%선 ), 전사자 장비 수집하였던 관계로 전장병이 완전무장, 건제유지
1개 대대 ( 송호림 소령 지휘 ) : 정부 계속 경호
연대 (-1) : 적 저지 임무띠고 7월 4일 서정리로 전진, 오산에 배치
용호도 : 동남면 소속, 어업조합, 해사국, 관세, 해산물 검사소, 우체국, 수산학교, 국민학교, 면출장소, 지서위치, 군부대 : 헌병대, 정보부대 파견대 위치

6. 옹진 半島 戰鬪 分析
철수 계획 미수립
'50년 3월 육본지시 “옹진반도에 배치된 부대는 적이 전면 공격시 해군 LST 2척으로 철수한다”라고 하였으나, 제17연대는 이에 대한 세부 계획을 미수립하고 다만 “부포”항으로 철수 한다는 구상만 했음
당시 분위기는 철수는 패전의 상징으로 크게 고려치 않고 사수의지만 강조, 효과적인 철수 미실시로 병력 및 장비 손실 증가, 5일간이나 유휴병력 발생
철수시 제1, 2대대 철수로 차단으로 우왕좌왕 혼란 초래, 철수선박 보냈으나 적 선박으로 오인하고, 민간선박 이용하여 철수
포병부대 배치 부적절
한국군 포병부대 보유수 : 총 6개 대대
의정부나 개성지역에 추가 배치 했으면 더 효과적인 운용이 가능했음
서측지역 예비대의 조기 투입 : 적 3여단이 아 1대대 돌파시 예비인 2대대로 역습
동측(3대대)지역 적 집중 공격시 투입할 예비 부족으로 조기 돌파 당하여 부대가 양분되는 위기 초래
전투시는 우발상황에 대비하여 항상 예비대를 확보하고, 예비대를 투입한 후에는 반드시 신예비대를 구성 및 지정해야 함
지휘관의 위험을 무릅쓴 진두지휘
제17연대장 철수 작전 지휘 : 제일 마지막 철수
제2대대장 송호림 소령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철수 작전 진두지휘
작전결과 전선이 조기 붕괴된 상황하에서 약90%의 병력/장비 철수 성공, 그후 제17연대가 한국전쟁 전 기간을 통하여 활약할 수 있었던 계기

7. 其 他
해주 돌입 오보
태양 신문사 기자 (최기덕) : 백대령이 해주 향해 진격한다.
백대령 "전쟁이 시작되었으니 빨리 서울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음
추정 : 海州진격설(誤報)은 당시 연합사 최기덕 기자가 국방부 보도과장 김현수 대령에게 전한 것이 와전 보도 되었던 것(육본 보도과장 김현수 대령 - 국민 사기 위해 고려)
백인엽 자결 기도- 부하를 LST승선, 잔류( 제7포병 박정근 소령, 헌병대장 : 한승령 소령 )
권총 자결 시도 [“명령이다 손을 놓아라”] - [“임무입니다”] - [신의 계시다]
박소령 2Km 헤엄쳐 섬에서 작은배 습득 (연평도에서 야음 이용)
화포의 패쇄기 분해하여 바다에 버리고, 차량은 소각


6.25_[11]50.8.2 전사자


(2) 2013 09 04 김관진 국방부장과 조사 대독하는 한동주 제3군단장.육군 중장 사진/이강성



(13) 2013.09.04 함동진 시인 헌시(獻詩) 낭송 사진/이강성


(17) 2013.09.04 사진/이강성


(27) 2013.09.04 사진/이강성


(28) 2013.09.04 사진/이강성


(41) 2013.09.04 사진/이강성 사진/이강성 함동진의 헌시(獻詩 <다시그날에>)비


(45) 2013.09.04 사진/이강성 사진/이강성 일행의 버스를 캄보이하러 나온 안내헌병들


(47) 2013.09.04 사진/이강성 사진/이강성 군악대의 연주


(51) 2013.09.04 사진/이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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