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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둘레길과 굴곡진 역사의 현장,행궁 일일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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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찬란한은빛소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3건 조회 2,316회 작성일 16-01-30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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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2016.1.26.화 둘이서 남한산성 둘레길과 굴곡진 역사의 현장,행궁 일일기행 2016.1.26.화. 남한산성남문 ▶수어장대▶서문▶국청사▶ 북문▶늦은 점심 ▶침괘정▶남한산성행궁▶좌전▶다시 남문(차량주차로) 아침에 창밖을 보니 흰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올겨울 들어 아직 눈다운 눈구경을 못해 산쪽엔 눈이 좀 쌓이지 않았을까? 하고 역사공부겸 다녀 온 곳이 남한산성이다. 홈에서 승용차로 1시간이 소요여서 가볍게 다녀올 수 있었다. 집을 나설땐 눈이 내려 아이젠까지 준비했는데 도착하니 눈이 멎었다. 산성둘레길에 눈이 쌓이지 않아 아이젠 없이 다닐 수 있었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적 다녀 온 아주 오래전 남한산성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새롭게 많이 바뀌어 예전 모습들은 잘 살아나질 않았다. 산성 둘레길이 너무 잘 되어 있어 남여노소 누구나 경쾌하게 산책할 수 있는 편안한 길이었다. 특히나 경기도 도립공원인 남한산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국내11번째 경기도내 3번째 선정된 곳이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은 대한민국 경기도 광주시, 성남시, 하남시에 걸쳐 있는, 남한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성이다. 병자호란 때 조선의 왕 인조가 청나라에 대항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1950년대에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공원화된 후 현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많은 시민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남한산성의 역사는 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때 백제의 수도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기도 했던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세운 성으로 알려졌으나, 신라 시대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설도 있다. 서울을 지키는 외곽에 4대 요새가 있었다. 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였다. 적들은 호시탐탐 이들 요새를 넘봤으니, 본디 요새의 운명이 그렇거니와 영광보다는 상처가 많았다. 다만 묵묵히 겨레를 품어 안고 후손의 영광에 안위하며 내달린 것이다. 동쪽의 광주에는 남한산성이 있었다. 광주산맥 주맥에 쌓은 15만 9,859평의 남한산성은 오늘날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속한다. 잘 정돈된 산길을 따라 20여 분 올라가면 해발 490m의 산세와 아름다운 굴곡을 따라 병풍처럼 둘러쳐진 야트막한 성곽을 만난다. 성벽에서 내려다보면 멀리 서울 시내와 성남시가 훤히 눈에 들어온다. 불과 359년 전, 인조는 이곳에서 끝내 청군에게 무릎을 꿇어 수치스러운 역사의 주인으로 남았다. 천험(天險)의 요새지 남한산성은 "백제 온조왕 13년에 산성을 쌓고 남한산성이라 부른 것이 처음"이라고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신라 문무왕 때, 조선 선조 때, 광해군 때 등 여러 차례 개축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 후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치르고 난 뒤 대대적으로 개수한 것이 오늘날의 남한산성이다. 오늘날 남한산성은 주변 시민들에게 훌륭한 휴식처이자, 건강을 위한 등산 산책 코스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 1코스 산성을 따라가는 몽성 미학의 길 거리 거리 3.8Km /소요시간 80분 산성로타리 - 북문(0.4km) - 서문(1.1km) - 수어장대(0.6km) - 영춘정(0.3km) - 남문(0.7km) - 산성로타리(0.7km) *내비게이션 입력 주소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563 지화문(남문) 앞에서 정조3년 성곽을 개보수할때 지화문이라 칭하였고, 4대문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며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다. 또한 현재는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문앞에 식재된 (350년 수령, 성남시 보호수)느티나무와 함께 문화 역사가 살아 숨쉬는 시민의 역사터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지도상에서 남한산성 하얀성곽線이 한 눈에 들어온다. 지하문 안쪽으로 들어오니 바로 앞에 보호수가 있었다. 500년 된 느티나무도 있었다. 지하문 안쪽 풍경이다. 웅장함이다. 우린 수어장대로 가기위해 다시 남문을 나온다. 수호장대는 구불길로 바로 흰눈을 밟으며 올라야 한다. 눈길이지만 얇게 덥힌 눈길이어서 미끄럼없이 오를 수 있었다. 오히려 눈기운으로 공기도 더 싸아하니 신선함으로 발걸음에 더욱 신명이 실린다. 오르는 길에 무궁화동산도 만나면서 꽃이 필때 다시 찾아 와서 그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보고 싶단 생각을 하며 삭막한 겨울풍경을 바라본다. 무궁화는 오랜 역사속에 배달민족의 은근과 끈기,진취성을 상징하는 우리나라 국화이다. 무궁화공원은 남한산성의 성벽 이미지를 형상화하여 측백나무 생울타리로 표현하였으며, 우리민족이 하나되어 영원히 발전한다는 의미를 무궁화로 형상화하였다고 한다. 산수유 S자로 졸졸 흐르던 산도랑물이 영하의 추위에 하얗게 얼어있었다. 저어 끝으로 성벽이 보인다. 살짝 하얗게 덮힌 눈길 위로 걷는 발걸음도 맑은 공기처럼 상쾌하다. 남한산성은 역사의 현장이다. 1637년 1월 30일 조선 16대 임금 인조는 산성 右翼門(西門)을 나서 한강 동쪽 三田渡(송파구 삼전동 일대)로 갔다. 오랑캐라 여겼던 청나라 태종 앞에 무릎 꿇고 三拜九叩頭(삼배구고두 :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조아린다는 뜻)를 했다. 인조의 이마에는 피가 흥건했다. 인조가 한양을 떠나 南門(至和門)을 통해 산성으로 피신한 지 47일 만이다. 남한산성은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鎭山 역할을 했다고 한다. 삼국시대부터 천연 요새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통일신라 때는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피난을 가는 치욕을 당하면서 남한산성은 다시 축조됐다. 고려시대에는 몽골의 침입을 막아낸 현장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의 거점이었다. 성벽은 주봉인 청량산(497.9m)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연주봉(467.6m), 동쪽으로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 몇 개의 봉우리와 연결돼 있다. 성벽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는 반면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고 평균고도 350m 내외의 넓은 구릉성 분지를 이루고 있다.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천혜의 조건을 갖춰 외침에 의해 정복당한 적이 없다. 푸른솔에 하얀 눈꽃이 피었다. 층층이 마련된 의자엔 하얀눈만 외로이 앉아 쉬어가고 있다. 오후에 햇님이 데려가면 그자리에 그땐 사람들이 쉬어가리라. 버석이는 마른잎들이 떨어지지 못하고 겨우내 저리도 힘겨운 모습으로 길손들을 따뜻이 맞이하고 있었다. 또 걷다가 이번엔 한낮 햇살이 스민 아름다운 솔숲이다. 한점의 수채화를 연상시키는 자연속의 생생한 작품하나 만난다. 암문 안쪽에서 포즈 암문은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비상시 출입하기 위하여 은밀하게 설치한 출입구이다. 암문은 적이 알지 못하게 병기, 식량 등 물자를 운반하고 적의 눈을 피해 구원을 요청하거나 원병을 받아들이는 통로로 사용된다. 이 사진은 수어장대와 가까이 있는 성곽에 나 있는 암문이다. 암문 옆 성벽숲에서 쉬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평화롭다. 추운겨울임에도 잠시 쉬어가며 마음을 녹이는 장면이 따뜻하게 느껴온다. 이 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수어장대로 오르고 곧장 보이는 곳이 청량당이다. 문이 굳게 닫혀있어 관람을 못했다. 청량당은 이 성을 쌓은 팔도 도청섭인 벽암 각성대사와 함께 이회와 그의 부인의 영혼을 모신 사당이다. 이회는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로 충직한 인물인데 그를 시기한 무리의 모함으로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후 이회의 무고함이 밝혀진 이후 수어장대 서쪽에 그와 부인의 영혼을 위안할 목적으로 청량당이 세워졌다고 한다. 청량당이란 이름은 서어장대가 서 있는 산이 곧 청량산이므로 산명을 당집이름으로 부른 것이며 청량은 맑고 서늘한 기운을 뜻한다. 청량당 청량당에는 이회와 그이 처첩에 관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회는 조선시대 남한산성을 축성 할 때, 동남쪽 부분을 맡았는데 경비를 탕진 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기일 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하였다는 억울한 모함을 받게 되어 처형당한다. 그의 처첩도 남편의 성을 쌓는 일을 돕기 위해 삼남지방에서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돌아오는 길에 남편의 소식을 듣고 강물에 투신 자살하였는데 그 후 그의 무고함이 밝혀져 서장대 옆에 사당을 지어 그와 그의 처첩의 넋을 달래게 하였다. 1960년대에 이회와 그 처첩의 넋을 달래게 하기 위해 도당굿을 하였는데 도당굿은 이회와 그처첩의 넋을 달래고자 청량당에서 거행되는 굿으로 남한산성의 축성, 역사, 무교를 바탕으로 한 신당, 민중들의 염원 등의 성격을 아우르고 있다. 청량당에서 수어장대로 오르는 돌계단, 그 위로 수어장대가 보인다. 대가가 영릉(英陵,세종의 릉)에 거둥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남한산성에 이르러 (정조)가 군대를 사열하면서 화전과 화포를 쏘았는데 삼가 구경했던 소감을 기술하다. 8월이었다. 大駕幸英陵 還至南漢城 閱武放火箭火砲 恭述所覩, 八月也 정약용 丁若鏞 성 머리에 해가 지고 하늘이 어두워지니 城頭日沒天正黑 각영의 깃발 내리고 군악 소리 멈췄는데 諸營落旗鐃吹息 *鐃(징 뇨) 지척의 거리 행궁은 바다처럼 깊숙하고 行宮咫尺深如海 어두운 연기 푸르른 산빛을 덮어쌌네 瞑煙冪력蒼山色 *벽력(冪四+歷 : 연기가 자욱한 모양) 갑자기 옹기 만한 커다란 불덩이들 驀一火顆大如甕 동대의 주변에서 어지러이 날아 솟아 표표 飛出東臺側 *표(風+包 : 회오리 바람)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가고 날아오네 橫空飛去却飛來 휘익휘익 번쩍번쩍 어안이 벙벙한데 欻忽閃鑠神不測 *欻(문득 훌), 鑠(녹일 삭) 잠깐 사이 흩어져 하늘이 온통 붉은 빛 須臾散作滿天紅 혜성처럼 빨리 날아 남북이 어지럽네 彗孛迅急迷南北 *孛(혜성 패) 나갈 적엔 붉은 용이 구슬 토해 거침없이 허공을 날아오르고 去時赤龍吐珠夭蟜蜚上天 *蟜(독충 교) 돌아올 땐 푸른 매가 날개 접고 쏜살같이 평야를 내리치누나 回時蒼鷹倒翅揮靃平蕪擊 *靃(새가 나는 소리 확) 석가여래가 순식간 찰나경에 상서로운 빛을 쏘아 내니 如來轉眄彈指出寶光 아란보살이 좌우로 돌아보며 어리둥절하는 정경이로세 阿蘭左顧石顧紛駭惑 어떤 것은 온조궁의 궁터 앞에 떨어지고 或從溫祚宮前落 어떤 것은 한의봉에 날아가서 불이 식네 或至汗猗峰頭熄 *猗(아름다울 의) 화전 화포 나온 지 그리 멀지 않은데 火箭火礮出未久 *礮(돌쇠뇌 포) 그 제도는 당초에 서양에서 얻어 왔지 其制始由蠻邦得 네델란드 호준포가 유별나게 매섭다면 紅夷虎蹲特雄悍 *蹲(웅크릴 준) 프랑스의 백자총은 더 한층 성능 좋네 佛郞百子尤慘刻 효종께서 청 나라 정벌하실 일념으로 孝宗銳志思北淸 기발한 무기 만들어 무력을 증강시키고 製造奇器競武力 월나라 왕 구천처럼 복수할 날 고대하니 日長之城如會稽 덕이 높은 후대 임금 그 사업을 이으셨네文孫述事由至德 온 성안 사람들은 장난삼아 구경할 뿐 滿城只作演戲看 *戲(희롱할 희) 성인께서 하시는 일 어리석어 알지 못해 聖人所爲愚莫識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제1권 시(詩)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지은 건물이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장대로서 남한산성에 세워졌던 5개의 장대 중 현존하는 유일한 건물이다. 수어장대앞에서 찰칵! 수어장대옆 보호각 보호각내 무망루(無忘樓)라는 편액은 병자호란의 시련을 잊지 말자는 의미를 담아 영조가 지은 글이다. 1953년 9월6일 이승만 기념식수(오른쪽 전나무) 무망루(無忘樓) 조선 영조27년(1751) 광주유수 이기진 (光州留守 李箕鎭)이 증축한 수어장대 2층의 내편(內便) 문루로서 그 편액(扁額)이 2층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건립하고 이 안에 현판(懸板)을 새로 설치 일반인이 볼 수 있게 하였다. 무망루는 병자호란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 후 북벌(北伐)을 피하다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듯에서 영조가 이름지은 것이다. 1953년 9월6일 이승만 기념식수 기념 전나무이다. 무성히 잘 자라고 있었다. 매바위 이회 장군의 억울한 죽음과 한이 깃든 '매바위' 전설 매바위로 불리어지게 된 데에는 남한산성의 축성 책임을 맡았던 이회장군의 억울한 죽음과 한이 깃들어 있다. 이회장군은 남한산성을 쌓을때 산성 동남쪽 지역의 공사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 하나하나 철저하게 점검을 하며 공사를 진행하다보니 그만 정해진 날짜를 넘기고 말았다.뿐만 아니라 공사비용 역시 턱없이 모자라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공사비용이 부족하게 된 이유가 이회장군이 주색잡기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이에 나라에서는 이회장군에게 그 책임을 물어 참수형에 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서어장대 앞뜰에서 이회장군운 참수를 당하기 직전 하늘을 쳐다보면서 '내가 죽은 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죄가 있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실제로 이회장군의 목을 베자, 이회장군의 목에서 매 한마리가 튀어 나와 근처 바위에서 슬피 울다가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멀리 날아가 버렸다. 사람들이 그 매가 앉았던 바위를 보니 매 발톱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장군의 말대로 이상한 일이 벌어지자, 사람들은 이회장군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것이라 믿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회장군이 책임을 맡았던 지역의 성곽을 살펴보니, 아주 견고하게 쌓아져서 빈틈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성곽공사를 함에 있어서 부정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심혈을 다했음이 밝혀진 것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이회장군의 목에서 나왔던 매가 앉았던 바위를 매바위라 부르고, 이 바위를 신성시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 매 바위에는 실제로 매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어떤 일본인 관리가 남한산성을 둘러보다가 바위 위의 매 발자국을 보고 참 신기한 일이라 여겨서 그 매 발자국이 찍힌 부분을 도려내어 떼어 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그 일본 관리가 떼어갔음을 말해주는 사각형의 자취만 남아 있다고 한다. 성곽따라 뚜벅걸음이다. 한창 공사중인 서문(우익문)에 이른다. 국청사 국청사 대웅전 주련 佛身普遍十方中(불신보편시방중)-부처님은 전 우주에 두루 계시며 月印千江一軆同(월인천강일체동)-부처님의 은혜가 모든 이에게 비춰주시며 四智圓明諸聖士(사지원명제성사)-모든 부처가 갖추는 4가지 지혜로 賁臨法會利群生(비림법회이군생)-법회에 임하여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시네 숭렬전(崇烈殿) 백제국온조왕(百濟國溫祚王), 완풍부원군이서(完豊府院君李曙)의 신위를 모신 곳 이서장군의 신위(神位) 이서(李曙, 1580~1637), 자는 寅叔, 호는 月峰, 시호는 忠正, 본관은 全州, 孝寧大君의 7대손, 부친은 제주목사 李慶祿, 모친은 덕수 이씨, 부인은 해남 윤씨이다. 선조 36년(1603)무과에 급제, 1623년 인조반정에 참가하여 호조판서, 정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완풍군에 봉해졌다.총융사로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군량을 많이 확보 하였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어영제조로 왕을 호종하고 남한산성을 지키다가 군중에서 병사했다. 인조의 꿈에 백제 온조왕이 나타나 적의 기습을 미리 알려주자 그 혼을 달래기 위해 온조사당을 지었는데 온조왕이 꿈에 다시 나타나 혼자 있어 외로우니 훌륭한 신하 한사람을 보내라는 지시가 있었는데 마침 이서장군이 병사하자 온조사당에 같이 제향하게 되었다고 한다. 성따라 또 걷다가 북문을 만난다. 북문에 식당가들이 모여있다는데 이젠 조금만 더 걸으면 될 것 같아 휴우~ 숨이 나온다. 남문에서 부터 한참을 걸었다. 아침을 부실하게 들어 허기져서 간신히 걸었다. 바로 산길을 빠져나오면서 여러곳 둘러보다가 맘에 드는곳을 찾다가 내려오던 기을 다시 올라 첫번째 식당 '송림정'에 들게 되었다. 30년전통 어머니의 손맛집이다. 야채는 직접 농사지어 사용한다며 푸근한 웃음으로 추운겨울 식객의 마음까지 녹여준다. 예약문의:031-743-6615. 송림정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로 780번길 24-15 만두전골 2인, 2만냥..맛있었다. 행궁으로 가는길에 만난 침괘정 침괘정 침괘정은 산성 내 마을 행궁 앞 언덕 위에 있는 건물이다. 이서(李曙)가 축성에 착수하였을 때 수풀 속에서 이 건물을 발견하였다고 하는데. 축조의 시기는 확실치 않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영조 27년(1751) 광주유수 이기진(李箕鎭)이 중수(重修)하고 '침과정(枕戈亭)'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침과정'을 '침괘정'이라 부르는 까닭은 명확하지 않다. 나무가지에서 까치부부가 우릴 반겨주었다. 아래쪽 빈 밭은 까치와 참새들의 겨울 놀이터였다. 나무가지에서 새까만 까마귀 한마리도 보았다. 새들이 좋아 한참을 살피며 보았다. 새들도 저들의 놀이를 즐겨보는 줄 알아 많이도 까불거렸다. 오른쪽 새까만 덩치 큰 놈은 까마귀이다. 행궁은 침괘정 언덕아래에 위치했다. 행궁으로 드는 한남루이다. 한남루는 유수 홍억에 의해 정조 22년(1798)에 세워졌으며 왕이 머무는 행궁의 하궐 앞에 자리한 외삼문의 주 출입구이다. 유료관람, 스틱사용은 금지다. *한남루 주련이야기 주련(柱聯)이란 기둥마다 시구를 연결하여 걸었다는 뜻이다. 좋은 글귀나 남에게 자랑할 네용을 서서 붙이거나 얇은 편지에 새겨 걸어두는 것으로 주련의 시구를 읽어보면 당시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한성을 지킴에 용과 호랑이의 비법으로 백리 지역을 지키며 맹수와 같은 용사를 보도다 -훌륭한 관리는 임금님의 은덕을 널리 퍼트리고 대장군은 아랫사람을 위엄과 인의로 다스리네 -이 땅에서 잠업(蠶業)과 보장(保障)을 겸하지만 한가한 날에는 노래하며 토호놀이도 한다네 -비록 원수를 갚아 부끄러움을 씻지 못할지라도 항상 그 아픔을 참고 원통한 생각을 잊지 말지어다. 한남루 대문을 들어서면 길 우측에 조그마한 연못이 하나 있다. 그간 혹한으로 연못이 꽁꽁 얼어 있었다. 연못을 지나 돌계단을 올라 외삼문을 지나면 외행전이 있는 하궐로 들게 된다. 한남루로 들어와 외행전으로 들기 위해 돌계단을 오른다. 직원이 돌계단에 살짝 쌓인 눈을 빗자루로 쓸며 치우고 있었다. 비질흔적이 고운 흙마당에 무늬로 남아 있었다. 남한산성 외행전(外行殿) 외행전은 왕이 정무를 보던 곳이다. 외행전은 하궐의 중심건물로 인조 3년(1625)에 준공되었다.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상궐 내행전과 동일한 전체 28칸 건물이지만 바닥면적이 내행전보다 작고, 내행전에 비해 6m 정도 낮은 곳에 지었다. 병자호란 당시 왕이 병사들에게 음식을 베푸는 호궤(犒饋)를 이곳에서 행하였으며, 한봉(漢峯)에서 청나라 군이 홍이포를 쏘아 포환이 외행전 기둥을 맞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좌승당이 지어지기 전에는 광주부 유수의 집무실로 사용되었다. 현재 외행전은 2010년에 중건된 것으로, 발굴과정에서 통일신라 관련 유구들이 확인되어 건물지와 기와를 쌓은 곳 일부를 보존하고 있다. 외행전 앞마당의 우측, 통일신라시대의 건물이 발굴된 현장을 보존해 놓은 시설이다. 남한산성 하궐(외행전) 중건 공사를 위한 발굴조사 중 확인된 통일신라 건물지이다. 통일신라가 주장성을 쌓은 시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당나라와 투쟁에 들어간 시기이며 특히 문무왕 12년은 당나라 병력 5만명이 평양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신라를 침입하려는 의도를 보인 시기였다. 주장성은 당나라와의 전투에 대비하여 축조된 성으로 한강 유역을 지키는 통일신라의 가장 중요한 요새였다. 나는 죽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키고자 한다. -문무왕 내행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 앞 돌계단 아래에는 사진들이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 3점만 게시해 둔다. 일제강점기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원판사진이다. 남한산성 전경 남한산성 동문 전경 남한산성 북문 원경 남한산성행궁의 건립 남한산성행궁은 전쟁이나 내란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때까지 한양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해 조선 인조 4년(1626) 남한산성과 함께 건립되었다. 실제로 인조14년(1636)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항전하게 된다. 이후에도 숙종,영조,정조,철종,고종이 능행길(여주 효종릉,광주 순조릉 등)에 머물러 이용하였다. 남한산성행궁운 좌전(종묘)와 우실(사직)을 갖추고 있는 유일한 행궁으로, 유사시 임시수도의 역할을 했던 매우 중요한 곳이다. 내행전으로 든다. 상궐 내행전은 왕이 잠을 자고 생활하던 공간이다. 현재 내행전은 2002년에 중건 된 건물이다. 내행전의 중앙에는 대청마루가 위치하고 있다. 마루 중앙에는 국왕의 뒷배경에 빠질 수 없는 일월오봉도 병풍이 펼쳐져 있었고 그 앞에는 왕이 앉는 접이식 의자 교의가 놓여져 있었다. 마루의 왼편에는 왕의 침전이 있고,오른편에는 세자의 침전이 있다. 내행전 뒷편 우측문으로 든다. 일장각(日長閣) 외행전 우측에 위치한 일장각이다. 광주 유수가 거처로 사용한 곳이다. 일장각은 청량산의 또 다른 이름인 일장산을 전각의 이름으로 딴 것이다. 일장각 마루 맨 꼭데기에 위치한 재덕당으로 오른다. 재덕당(在德堂) 상궐인 내행전 뒤편 언덕에 있는 건물로 숙종 14년(1688) 유수 이세백이 건립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5칸의 규모이다. 행궁 건립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내력이 알져지진 않았다. 다만 한양이 적의 침입을 받더라도 남한산성이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근거지이자 초석이라는 의미로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행궁 내행전 뒤, 재덕당 옆에 있는 반석(磐石)이다. 큰 돌에 새겨진 금석문으로 이는 ‘튼튼한 반석 위에 종묘사직을 세우겠다’는 인조임금의 염원이 그대로 담긴 것이다. 좌승당(坐勝堂) 상궐 내행전의 북쪽, 담장의 밖에 있었던 좌승당은 광주부 유수의 집무용 건물이다. 순조 17년(1817) 광주부 심상규가 건립하였다. 좌승이란 '앉아서 이긴다'는 의미로 반드시 이길만한 계책을 써서 적을 물리친다는 군사적 의지가 담겨있다. 좌승당은 발굴조사를 거쳐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된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로 2002년에 중건되었다. 이위정으로 드는 명위문(明威門)이다. 이위정(以威亭) 이위정은 현재 좌승당 뒤편 후원에 2010년 중건되었다. 순조 17년(1817) 광주부 유수 심상규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다. 건축 당시에 지은 '이위정기(以威亭記)'가 탁본과 함께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는데, 기문(記文)은 심상규가 짓고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썼다. '이위(以威)'란 '활로써 천하를 위압할 만하지만, 활과 화살이 아닌 인의(仁義)와 충용(忠勇)으로써도 능히 천하를 위압할 수 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위정(以威亭)은 순조 17년(1817) 광주부 유수 심상규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다. 이위정을 중심으로 좌측은 활쏘는 곳이고, 우측 담 넘어로 좌전이 자리했다. 행궁관람을 마치고 울타리 밖에 자리한 좌전으로 오른다. 행궁터(行宮址) 이곳은 유사시 이어(移御)할 수 있는 행궁이 있던 곳으로 상궐(上闕)이 七三칸, 하궐(下闕)이 一五四칸이었다. 인조(仁祖) 二年 총융사 이서(李曙)가 시공하고 목사(牧使) 유림이 감독하여 인조 三年에 준공하였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인조가 四七일간 이어 하였고 영조(英祖) 정조(正祖) 때도 영능(寧陵)에 전배(展拜)하고 돌아가는 길에 머물렀다 갔다 한다. 라고 새겨져 있다. 좌전이 하얀 눈길 위 우측으로 보인다. 영녕전과 정전이 있는 좌전(左殿) 종묘의 신주를 옮겨 봉안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서울 종묘와 같이 정전과 영녕전 2개 영역으로 건립하였다. 행궁의 좌측에 위치하여 좌전으로 하였다. 좌전에서 바라 본 행궁후원 전경 관람을 모두 마치고 다시 발길 돌려 행궁 담따라 내려온다. 우측으로 한남루가 담 위로 보인다. 우린 겨울 숲길로 들지 않고 행궁정문 한남루 쪽으로 내려 온다. 아아~지붕위 까치. 매표소 초가지붕에 튼실한 까치 한마리가 우릴 기다리며 배웅해 주지 않는가! 까치야 안녕! 까치와 인사를 나눈 후 우리는 애마를 둔 남문쪽으로 걸어간다. 초행길에 길을 몰라 물어물어 갔다. 남문까지는 그리 멀지 않아 둘이서 나란히 걷는 재미도 있었다. 좌전쪽으로 오르는 아무도 딛지 않았던 하얀 눈길 위에 남겨 둔 나의 예명이다. 찬란한 빛을 오래도록 발할 수 있도록 눈덮힌 길 위를 걸으며 이름자를 써 보며 건강을 기원하기도 했다. 하늘에선 구름이 우릴 배웅해 주고, 이처럼 자연과 함께 보냄은 삶의 축복이다. 남한산성 성곽걷기에서 굴곡의 슬픈 지난역사까지 만나며 보낸 기인 하루여정이 기쁨충만이다. 특히나 게시물 작성하면서 더 자세한 이야기들을 인터넷검색으로도 공부하며 많이 배웠다. 많이 걸어 건강까지 챙겨온 뿌듯했던 하루를 다시 회상하며.. 꽃피는 봄, 녹음이 우거지는 여름, 화려하게 새옷을 갈아입은 가을날엔 또 다른 비경을 보며 워킹을 즐겨야겠단 생각을 하며 내려왔다. 몇날몇일 공들여 만든 여행기록물을 함께 나누게 되어 여간 기쁘지 않습니다. 모쪼록 유익하면서 편안히 쉬어가는 場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남한산성가는길 지하철노선안내* 산성역에서 하차 후 2번출구 9번승차, 토,일에는 9-1번 버스 빠르다고 함 *출처:남한산성도립공원 홈페이지 http://www.gg.go.kr/namhansansung-2/namhansan-intro-comeway 사진및편집찬란한 빛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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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찬란한은빛소녀님의 댓글

profile_image 찬란한은빛소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남한산성 탐방코스
*제1코스(3.8km, 80분)
산성로타리-북문(0.4km)-서문(1.1km)-수어장대(0.6km)-영춘정(0.3km)-남문(0.7km)-산성로타리(0.7km)
*제2코스(2.9km, 60분)
산성로타리-영월정(0.4km)-숭렬전(0.2km)-수어장대(0.6km)-서문(0.7km)-국청사(0.1km)-산성로타리(0.9km)
*제3코스(5.7km, 120분)
도립공원관리사무소-현절사(0.1km)-벌봉(1.8km)-장경사(1.5km)-망월사(1.1km)-지수당(1.0km)-관리소(0.2km)
*제4코스(3.8km, 80분)
산성로타리-남문(0.7km)-남장대터(0.6km)-동문(1.1km)-지수당(0.5km)-개원사(0.3km)-산성로타리(0.6km)
*제5코스(7.7km, 200분)
관리소-동문(0.6km)-동장대터(1.1km)-북문(1.6km)-서문(1.1km)-수어장대(0.6km)-영춘정(0.3km)-남문(0.7km)

함동진님의 댓글

profile_image 함동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남한산성에서
-외침(外侵)을 당한 한이 가슴을 찌른다 ]  /  함동진

화신(花信) 속에 평화로이 잠들어가는 2010년 3.26 고요한 밤
 천안함 폭침으로 솟구친 처절의 통곡은 강산을 덮고
5천만 민족의 가슴을 깨뜰며 찢어 뭉개버린 봄
 용감한 아들들을 잃어 아직도 가슴 쓰라린 유족들 국민들

 치가 떨리는 1950년 6.25 저 북괴의 남침전쟁
 강토는 피로 물들며 검댕잿더미 되었을 때
 죽은 자 수백만 아비규환의 지옥이 어디 따로 있었나
 그때 로스께와 돼놈들 남의 땅 짓밟으며 솰라솰라 야수됐었네

 나라가 물컹해지면 견고한 남한산성인들 지탱할소냐
1636년 12월 6일 인조14년 청태종의 용골대, 마부대 기습침공
12만군이 조선을 짓이긴 돼놈들에게 삼배구고두례로 항복한 조선
 삼전도의 굴욕적 항복 수모로 우린 기죽고 흥이난 돼놈들 으쓱했었지

 대감들 수염이나 다듬고 기고만장 당쟁이나 일삼던 때
1592년 4.13 선조25년 쪽발이들 21만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
 고요한 아침나라는 아수라장 약탈당하고 불길에 타들어 가고
7년전쟁 임진왜란. 또 정유재란 왜놈들 제 세상이라 우쭐했었지

 어제나 오늘이나 긴장을 늦추지 않고 유비무환하는 나라야 하리
 막강한 나라면 누가 감히 넘보아 굴욕 치욕 수모를 씌우랴
 꽃동산 같은 남한산성 웅장한 성벽조차 침공당한 역사 역력한데
 아직도 푼수 없이 대한민국 헐뜯는 무리 있어 애간장 타고 있네
                                                    -以上  詩

*우리나라는 위의 글에서 열거한 것 외에 주권을 빼앗겼던 일제36년의 압정 등
 외에 역사적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작은 수많은 외침(外侵)을 받아왔다.
언제나 남한산성에 오르면 병자호란의 비운과 그 수모의 역사가 떠올라 심기가 불편하다.
 남한산성에 오르는 이들은 병자호란 때의 상황을 상기하며 잘 살펴보고, 우국충정의
 충심으로 자세를 가다듬는 계기가 되기를 당부하고 싶다.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치욕적인 역사를 간략이 기술하면 이렇다. 인조15년, 1637년
 1월 30일 병자호란 발발 45일만에 조선의 인조 임금은 항복을 결정하고 그동안 항전을
 해 왔던 남한산성으로부터 내려와 삼전도(현재의 서울 송파구 석촌동, 원래의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인 석촌호수 서호 언덕에 있음)에서 굴욕적인 항복식을 행하였다.

조선의 왕인 인조왕은 곤룡포 대신에 평민이 입는 남색옷을 입었고 왕세자를
비롯한 대신들과 함께 청태종의 수항단(受降壇)이 마련되어 있는 잠실나루 부근
삼전도에 도착, 어가에서 내려 2만명의 적병이 도열하고 있는 사이를 걸어 청 황제를
 향하여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
라는 치욕적인 항복례식을 행하였다.

청은 1636년 12월6일 청태종의 지휘 아래 용골대와 마부대를 선봉장으로 해서
12만군으로 압록강을 건너 침공해왔었다. 그들은 진격로 주변의 성들을 공격하지
 않고 곧바로 한성으로 직행했다.

조정은 종묘의 신위와 빈궁, 왕자들만 먼저 강화도록 떠나게 하고 14일에는 국왕도
 몽진을 결정했으나 이미 홍제원(弘濟院)<원명은 홍제원(洪濟院)이었으며, 지금의
 서대문구 홍제동에 있었다. 이 여관은 중국의 사신들이 서울 성안에 들어오기 전에
 임시로 묵던 공관(公館)으로 1895년(고종 32)까지 건물이 남아 있었다>이 점령당해
 강화로 가는 길이 차단당했음으로 남한산성에 몽진, 장기항전에 돌입하였다.

당시 남한산성의 방어 능력은 병사 1만 2천에 식량은 약 두 달 치에 불과한 1만 4천 3백여
 섬으로 적의 12만 대군과 싸우기는 역부족이었다.

적군은 남한산성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보급로를 차단하는 고사작전을 택했다.
남한산성에 혹한으로 동사자가 늘어가자 국왕은 옷가지와 양피이불을 하사했고 뒤이어
 백관들도 이불과 심지어 말안장 등속까지 거둬 성채와 군병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나
동사하는 병사들과 백성의 수는 늘어갔다. 설상가상으로 음식조차 모자라 굶주림으로
하루를 버티기 어려운 상황으로 진행되어 갔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김상헌 중심의 척화파(斥和派)와 최명길 중심의 주화파(主和派)
사이에 논쟁이 끊어지지 않았으나 강화가 함락됐고 세자가 인질로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오자 대세는 주화(主和)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결국은 1637년에 3배 9고두례를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한 항복례로 한 번 절 할 때마다 세 번 머리를 땅바닥에 부딪치는 것을
세 번 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단 이 때 반드시 머리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나야 했다.

청태종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다시 할 것을 요구해 인조는 사실상 수십 번 머리를
부딪쳤고 이에 인조의 이마는 피투성이가 되었다고 한다.

(*삼전도비의 명칭: 삼전도비의 정식명칭은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로
1639년 병자호란에 패한 조선이 청 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어 세운 비석이다.)

                *위의 글들은 함동진이 강동문인협회의 남한산성 등정 시낭송회에서 낭송한 것입니다.

-

찬란한은빛소녀님의 댓글의 댓글

profile_image 찬란한은빛소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남한산성의 역사적인 상황들이 상세히 보충되었네요.
저의 게시물을 보신 님들께도 도움이 되겠습니다.
수고와 감사드립니다. 함동진시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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