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페이지에서 옮겨 왔습니다.
언젠가는 사라질 이전페이지이기에......
오래오래 두고 간직하고 싶은 페이지이기에......이미지는 뜨지 않군요.
<img src=http://cfile203.uf.daum.net/image/2708044254558B40388405 width=500>
월간문학지 '문학저널' 121쪽에 실린 특별초대글을 옮기며......
<b>
'머나먼 쏭바江'에 노을이 진다
(부제 ; 주월 한국군 월남전 참전 50年 ..!.)</b>
<img src=http://cfile240.uf.daum.net/image/224EBF3D547B2D9C246C0D width=100>
金 武 一 .
(해병대 예비역 대위. 前 현대제철 부회장.)
1.
'쏭바江'은 오늘도 베트남 남부의 중요 요충지이며 '푸옌'省 省都인 '뚜이호아(Tuy hoa). '市의 외곽을 유유히 흐르고 있다. '쏭 (song)'은 월남語로 江이란 뜻이고 'ba'는 어머니란 뜻으로 궂이 풀이를 한다면 '어머니의 江'이 되겠다. 이 江은 西쪽 국경지대인 '캄보디아' 안남 산맥에서 발원하여 '뚜이호아' 평야의 곡창지대를 관통하며 동지나海로 합류하는 이 지역의 젖줄 이기도하다.
이곳은 베트남戰 참전 초기에 한군군의 선봉부대였던 청룡여단이 주둔하며 평정 하던中에, 1년뒤에 참전한 백마부대 28연대에게 인계한 지역으로, 비록 많은 세월이 흘러 갔지만 한국군과의 인연이 꽤 깊은 곳이다. 그리고 또 이곳은 십자성부대와 제1 이동 외과 병원, 미 제 5공군 전술 비행단이 주둔했던 전초기지로, 월남戰을 주제로한 소설가 박영한씨의 참전 실록소설 '머나먼 쏭바江'의 배경 무대이기도 하다.
이 문학작품은 당시 우리나라의 전쟁문학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와 출간 하던 다음해에 '오늘의 작가賞'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단 하였다. 이어서 안정효씨의 '하얀전쟁'과 황석영씨의 '武器의 그늘'等이 그 뒤를 이었고, 同名의 드라마와 영화가 속출하여 선풍을 일으켰었다. 수입 영화로는 '플래튼(Platoon.)'과 '디어 헌터(Deer hunter.)', '지옥의 묵시록' 等이 기억을 새롭게 한다.
최근에는 김창동씨의 力作, '순간에서 영원으로.'가 출간되어 우리들의 심금을 울려주며 지난날을 일깨워 준다. 그는 이 작품에서 군더더기 하나 없는 간결한 문체로 그의 청춘을 포박했던 특수상황의 월남전에 소총수로 참전하였다. 그리고 몸소 체험했던 참혹한 전쟁의 비극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여 우리들 참전 용사들을 감동케 했다.
지금부터 꼭 50년전인 1964년, 한국전쟁의 폐허와 후유증에 시달리길 겨우 10년째인 한국의 안보상태는 극도로 불안 했었고, 나라 경제 측면에서 볼때 연간 수출 총액이라고 해봐야 고작 1억달러(금년도 수출 목표액 $5955억.)를 밑돌 정도로 보잘것 없었다. 당시 국민소득(GNP)은 1인당 겨우 76달러(지난해 $26200.)로 북한의 135달러에 비해 한참을 못 미쳐 대다수의 서민들은 하루 세끼 끼니조차 찿아 먹기 힘들던 시기였었다.
그해 봄, 당시 주 미국대사는 김정렬이었다. 주 독일대사 최덕신은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을 김정렬에게 전달코져 비밀리에 워싱턴을 방문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미국 정부 요인들을 접촉, 越南(베트남) 방어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한국군을 파견할 의향이 있음을 전달 하시오..!.'. 당시 국내,외 사정으로 비춰볼때 이 제안은 상당히 위험한 선택이어서 밀봉을 개봉한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깜짝 놀랐다.
이때가 바로 韓日회담 반대 시위의 절정기로, 정부가 정치적 위기에 몰려 있던 그 시점이었다.
대내적으로는 63년부터 시작된 학생들과 교수를 비롯한 지식인들의 대규모 시위로 정국이 혼란에 휩 쌓였었고. 대외적으로는 전쟁 당사국인 미국 조차도 탐탁쟎은 반응을 보이고 있던 월남전 참전을 한국이 자발적으로 파병 하려 했던 것이다. 비밀은 없었다. 마침내 국내,외 여론은 마치 풀섶에 기름을 부은듯 들 끓기 시작 했다.
2.
대통령은 이럴걸 뻔히 알면서도 왜 이런 무모한 모험을 자청 했을까..?.
그 이유는 세가지 였다.
첫째는, 만일 베트남이 공산화 될 경우에 동남아와 한국의 안보도 동시에 위협을 받을것이 분명하였고, 두번째는, 이 시점에서 미국이 베트남戰을 빌미로 하여 주한미군을 철수시켜, 베트남전선으로 전환 배치 하려는 의도를 사전에 막으려는 고도의 술수 였으며, 끝으로 어찌 해서든지 '가난을 물리치겠다..!.'는 굳은 의지 였었다.
역사적인 베트남 파병은 이렇듯 미국이 아닌 우리 대통령의 비밀스럽고 전략적인 주도로 시작되었다. 이어서 베트남戰이 확전(擴戰)으로 치닫던 同年 7월15일, 국회에 파병 동의안이 제출돼 많은 논란끝에 가결되었고, 동년 9월 11일, 한국 해군의 상륙함(LST)은 부산항을 출발하여 베트남으로 向한다. 함선에는 군의관 위주의 제1 이동 외과병원 의료요원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 等. 비 전투원140명이 처음으로 파월 됐고, 이듬해인 1965년 1월 9일에는 閣議의 결정에 따라 2천여명의 야전 공병부대와 수송부대가 결성 준비를 서두른다.
이번 결정은 전번과 달리 베트남과 미국 정부의 요청에 의한 결정으로 이 군사원조단은 전쟁 복구사업을 위한 非 전투 공병부대와 자체 경비병력으로 이루워 졌다. 이 부대는 그해 1월 26일, 국회에서 파병 동의안이 가결되고 2월 5일에 결단, 2월 25일에는 제 1진 선발대가 사이공에 도착 하였다. 그리고 다음달인 3월 22일에 '한국 군사 원조단' 본대가 파병하여 '나트랑(Natrang.)'에 둥지를 튼다. 이 부대의 단대호는 '비들기 부대'로 命名 된다.
문제는 전투부대의 파병이었다. '비들기 부대'의 파병에 이어 베트남 정부는 또다시 전투부대의 파병을 요청해 왔다. 이에 우리정부는 1965년 7월 2일, '한국전쟁 당시 우방의 파병에 보답 한다.'는 명분으로 정부는 국무회의 에서 '국군 1개 전투사단과 이에 필요한 지원부대'를 베트남에 파병하기로 의결했다. 그리고 이 파병안은 동년 8월 13일, 천신만고 끝에 최대의 고비 였던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다.
드디어 파병이다. 대한민국 반만년 역사에 큰 획을 긋던 1965년 10월 9일, 해병대 청룡부대가 잠시도 포성이 그치질 않는 '퀴논(Qui-nhon.)'에 상륙했다. 건국이래 첫 전투부대의 해외 파병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어서 10월 23일, 30만명 인파의 거국적인 환송을 받으며 육군 맹호부대 본진이 본격적인 파월의 막을 올려 '퀴논'에 주둔하는 동시에 주월 한국군 사령부가 설치 되었다..
이처럼 한국군 전투부대가 대거 베트남에 파병되고 그 활약상이 국제사회에 알려져 국위를 높이 선양하게 되자 점차 한국군 증파의 필요성이 부각 되었으며, 1966년 2월 22일, 험프리 미국 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또다시 한국군 1개 보병연대와 이를 지원하는 지원부대의 증파를 요청받게 되었다.이에 국회 본 회의는 여,야간의 많은 논란끝에 동년 3월 20일 증파안을 가결했다.
이어서 같은해 4월 16일 '혜산진 부대'가 '퀴논'에 상륙하여 맹호부대와 합류함으로서, 증강 전투사단으로 재 편성 되였고, 이듬해인 1966년 9월 22일, 육군 백마부대가 추가로 베트남戰에 합세하여 주월 한국군의 수효는 4만 5천여명의 군단급 규모로 참전 7개국中에 미국 다음 가는 파병국이 되었다.
이로써 첫 파병인 1964년 9월 11일 부터 1973년 3월 23일 까지 9년 6개월 12일동안 연인원 32만5217명의 국군장병이 베트남 전선에 투입됐다. 이들은 이 기간 동안에 1만여회의 대규모 작전과 55만여회의 중,소규모 작전을 펼쳐, 4만2천여명의 공산 베트콩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65년 5월, 당시 미국 존슨 대통령과 만난 박정희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 했다고 미국 'CIA 리포트'는 적고 있다. "한국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한국에서 한국정부 몰래 유엔군을 철수 시키려는 의도가 없길 바란다. 만일 이를 어긴다면 베트남에 대한 우리의 모든 협조는 그 순간에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이 얼마나 당당하고 결연한 소신이었던가..?.
3.
박 대통령은 1967년, 大田 유세에서 전투부대의 파병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역설 하였다. '굳이 안 보내려면 안 보낼수도 있었다. 만일 그리 됐다면 아마도 美국방성은 능히 주한 미군을 철수시켜 베트남 전선으로 전환 이동 시켰을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우리의 155마일 휴전선은 과연 우리의 독자적인 힘으로 지켜낼 수 있었다고 보는가..?.' 라며 야당의 정치적 공세에 맞서곤 하였다.
이 싯점에서 주월 한국군의 파병은 대한민국에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이는 박 대통령의 '국방과 경제'라는 두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는 포석 이었다. 실제로 1964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군의 베트남戰 참전기간동안에 해외 전투수당은 총 2억3556만 달러나 됐다. 이중 82.8%에 달하는 1억9511만 달러가 국내로 송금됐다.
더욱이 경제적 효과로서는 무역수지 2억1060만 달러, 무역외 수지 8억2000만 달러와 미국의 국군 현대화 지원(M16 자동소총과 팬텀 전투기等 첨단무기 제공.) 15억 달러, 기타 유,무상 차관 도입 43억 달러 等 68억7천만 달러가 우리땅에 들어 왔다. 이 금액은 그 前 해에 일본과 합의본 바 있는 대일 청구권 자금이 총액 8억불(무상원조 3억, 재정차관 2억, 상업차관 3억달러.)에 불과 하다는 것을 볼때 당시로선 엄청난 금액으로, 정부는 이 돈으로 박 대통령의 숙원 사업이었던 경부 고속도로 428Km를 개통하였고, 이때부터 정부는 제반 경제개발 사업에 자신감을 갖고 박차를 加하게 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현대건설, 한진상사, 대우실업, 금성전자를 비롯한 80여개의 한국 기업들은 군수물자 납품과 용역사업을 통해 베트남戰 특수(特需)를 톡톡히 누렸다. 예컨데 주월 한국군에게 필요한 물자와 용역을 국내에서 조달 했기 때문에 베트남으로의 수출이 급증했다. 아울러 미국의 군사 원조와 이들의 송금에 힘 입어 당시의 내수 산업과 수출은 호황기에 접어 든다. 한국군과 베트남 파견 근로자가 받는 봉급과 현지 한국기업의 사업 수익, 그리고 군사원조 等 직,간접 효과까지 합친다면 거의 100억 달라 (당시 년간 수출 총액의 100배.) 이상의 외화를 벌어 들인 셈이다.
이 금액은 국가 발전의 커다란 원동력이 되어 한강의 기적을 이루게 하였고, 당시 우리의 반만년 역사에 고질이었던 가난을 탈피하는 종자돈인 동시에, 제 2,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핵심 재원이 된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군 파월 직전인 1964년도 우리의 1인당 국민소득(GMP)은 위에 기술한 바와 같이 불과 76 달러에 불과 했었지만, 10년후 파월군의 철수가 완료된 1974년 3월엔 무려 일곱배가 넘는 545달러 였었다. (당시 동남아 선진국인 필립핀 $750.)
4.
50년 前의 '월남'이란 이 단어는 당시, 그 시대를 대변하는 일종의 '코드(Code).'였었다. 이역만리 월남땅에서 피와 땀을 흘리고 살아서 돌아오는 이들을 환영하는 분위기는 온 누리에 가득했다. 아울러 원조를 받던 보잘것 없던 나라가 연합군과 어께를 나란히 하여 자유우방의 반열에서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던 국군의 늠늠한 모습은 대견 하기까지 했었다.
부수적으로 이들이 死線을 넘어 무사히 귀국하면서 함께 반입한 여러가지 가전제품과 문화용품들은 가난에 찌들었던 살림살이에 커다란 활력소가 되어, 도심은 물론이거니와 멀리 산간벽지에 까지 보급된 T.V.와 냉장고, 선풍기等은 당시 문화생활에 커다란 변화의 분수령이 되었다.
겉멋에 겨운 고등룸펜들은 양담배를 폼 나게 꼬나물고 다방엘 드나들었고, 다방 마다 신중현씨가 작곡하고 김추자씨가 노래한 '월남에서 돌아온 멋쟁이 김상사'가 끊이질 않았다. 그런가 하면
가수 오기택씨의 '월남에 달밤'이 극장 입구 확성기 마다 울려 관객들을 호객했고, 학교 운동장에선 '청룡은 간다,', '맹호부대 용사들아,', '백마의 노래,'等 행진곡 風의 군가가 학생들의 애창곡 이었다. 도심의 번화가에선 한동안 '월남치마'가 유행하며 땅바닥을 휩쓸고 다니더니, 초상집 밤샘에서 으례히 등장한 '월남 뽕'이란 화투가 생겨난 때도 바로 이때 였었다.
이후 정부주도의 성공적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중화학 공업 육성, 더 나아가 88년도 올림픽 유치로 이어진 국위선양과 눈부신 경제발전으로 오늘날 한국은 대망의 세계 10대 선진국의 대열에 진입 하였다. 같은 잣대로 경제 발전의 속도를 비교해 보면 유럽이 산업혁명후 2백여년 동안 걸려 달성한것을 우리는 단 40여년만에 이룬 성과였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이렇듯 굳건한 경제 토대를 구축 했을까..?. 이는 아마도 60년대 초반, 독일광부와 간호부의 파견과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고 이국전선에 뛰어든 파월 장병들의 용기, 그리고 월남特需가 끝날 무렵 박대통령의 또 하나에 용단인 중동진출에서 그 答을 찾을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베트남戰 파병은 이 나라 '번영과 터전'을 만들기 위해 너무나도 많은 피와 희생이 뒤 따랐던 것이다. 무려 5,099명의 젊은 장병들이 이역만리에서 피를 흘리며 목숨을 잃었고, 17,232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5만여명의 老兵들이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에 시달리고 있고, 이중에 중증 참전용사들이 아직도 국군 통합병원 병상에서 고통의 나날을 지새우는 현실을 우리는 잊어선 안될것이다.
그러면 이렇듯 굳건한 국가 경제의 초석에 몸바친 이들의 현실은 어떠한가..?. 역사에 무지한 오늘의 위정자들은 0세부터 네살배기 유아들의 양육비쪼로 월22만원부터 34만원의 양육비를 선심 쓰듯 지원한다. 반면에 한 평생을 병고와 참전 후유증에 시달리는 참전 유공자들에겐 지난해 까지 고작 월 15만원을 마치 동냥이나 하듯 던져주면서 생계비에 보태 쓰란다.
더 기가 막힌것은 지난날 각종 불법 시위를 주도하며 사회를 혼란케한 사이비 민주투사들에게 이미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을 아낌없이 보상했고, 뚱딴지 같은 세월호 정치 코메디에 놀아나 또다시 수억원을 보상하려 하면서도 나라를 세우며 피,땀을 흘려 지켜낸 한국전쟁 참전 건국세대나, 경제발전의 주역이었던 월남전 참전세대 에겐 1년에 고작 1만원 인상을 그렇게도 아까워하는 이따위 나라가 이 지구상에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호주 한국전 참전 예비역. 月 평균 수령액. $2500.)
5.
'역사는 과거의 것으로 현재를 만들고, 우리는 과거를 통해서 오늘을 살며 미래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조지 W 부시' 前 미국 대통령의 자서전 '결정적 순간들.(Decision Points.)'의 첫장에 등장하는 문구다. 그의 국가 운영 정책과 외교정책을 지지했던 아니던 한 국가의 首長이 중요한 외교정책을 어떻게 결정하고 추진 하는지를 他山之石으로 되새겨 봄직하여 꼼꼼히 읽어 보았다.
그러나 그 보다도 더 인상적 이었던것은 '부시'가 임기중에 만났던 군인들과 그들의 '애국심'이었다. 그는 2007년 벽두에 '피트 페이스'대장을 합참의장으로 발탁했다. '페이스'대장은 초급장교시절 베트남戰에 소총소대장으로 참전했었다. 그의 소대원들은 베트남戰에서 격렬한 전투끝에 여럿이 목숨을 잃었다. 그는 대통령으로 부터 합참의장에 임명받고 백악관에서 신고식을 하면서, 베트남에서 전사한 부하들의 이름을 일일히 거명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임기를 끝낸 그는 전역하던날, 40여년前에 베트남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옛 부하들이 잠들고 있는 '베트남戰 기념관'을 찿았다. 그리고 별 4개가 달린 자신의 계급장을 비석위에 조용히 내려놓고 떠났다. 후에 그곳에서 발견된 그의 방명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언제나 씩씩했던 'Gido Parnago.' 에게..!. 이 별은 결코 나의것이 아니고 당신의 것이다.
사랑과 존경하는 마음을 이곳에 남긴다. 당신의 옛 소대장. 피트 페이스. USMC.".
또 '부시'는 2008년 봄, '이라크'주둔 다국적군 사령관으로 'Leo Odierno.'장군을 임명한다. 대통령과 의견을 달리해 화제를 모았던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장군 후임으로 선임된 그는 백악관 '오벌 오피스(대통령 접견실)'에서 대통령을 만났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아들 '앤서니 오디에르노'가 동행했다. '앤서니'는 한쪽팔이 없었다. 美 육군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뒤 '이라크'戰에 참전해 오른팔을 잃은 그는, 남아있는 왼쪽 손으로 대통령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부시는 '오디에르노' 장군은 '팔 없는 아들'의 모습을 무척 자랑스러워 했다.'고 자서전에 적었다.
6.
미국은 9.11 테러이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2개의 전쟁을 힘겹게 치루고 있었다. 예상외로 전쟁이 길어지고 희생자가 늘어가자 국내에선 반전 여론이 들 끓었고, 의회에선 비판의 목소리가 날로 높아졌다. 국제적으로도 러시아, 중국은 물론 이거니와, 프랑스, 이태리 같은 서구 국가들 까지도 미국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한마디로 미국은 사면초가나 다름 없었다.
이렇듯 어려운 국가적 난국에서 미국이 끝까지 버틸수 있었던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군인들의 애국심 이었다. 미국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장군들과 우수한 장교들, 그리고 경험많고 노련한 부사관들과 생기 발랄한 청년들이 모인 軍이 있었다. 그들은 단순한 직업군인이 아니라 살아있는 정신을 가진 애국자 들이었다. 그리고 이나라 국민들은 군인들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
지난 10월 10일(현지시각.) 美 'us air way 항공사'에 탑승한 '앨버트 마를' 美 육군 상사는 여러개의 훈장이 부착되어 있는 자신의 군복상의가 구겨질것을 우려해 옷장에 보관해 줄것을 女승무원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그 승무원은 '옷장은 일등석 用.'이라고 한마디로 거절한다. '마를'상사는 '이코너미'席이었다. 이를 본 주변의 승객들이 흥분해 들고 일어나 그 승무원을 나무랐고, 이 소동이 커튼 넘어 일등석으로 전해졌다.
여러명의 일등석 승객들이 앞을 다퉈 자리를 양보 했으나 '마를'상사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한 승객이 '국가를 위한 봉사에 감사 한다.'며 그의 군복을 자신의 옷장에 자기옷 대신 보관 했다. 그 이틑날 항공사 대표는 즉각 A4용지 15장 분량의 사과문을 전국의 일간지에 게재하고 잘못을 빌었다.'前날 야기된 승무원의 철없는 소치는 우리 항공사의 경영이념과 배치된 행동 이었음을 깊히 사과 한다.'고...
그리고 지난 여름, '이라크' 전선에서 무사히 임기를 마치고, 완전무장 차림으로 '샌디아고'기지로 원대복귀하던 13명의 美 해병대원들은 뜻밖에도 일등석으로 '업그레이드'돼 어리둥절 했다. 알고보니 美 'A A 항공사' 창구의 말단 여직원이 자기의 재량으로 잔여 일등석 일곱자리을 이들 해병대원들에게 제공하자, 이를 목격한 기존에 매표를 끝낸 일등석 승객 여섯명이 일제히 자신들의 좌석을 이들에게 양보했다는 보도를 읽었다. 우리는 이렇듯 아름다운 광경들을 언제쯤에나 볼수 있을까..?. 부러울 뿐이다.
7.
필자가 얼마전 해외출장중에 '아프가니스탄', '타슈켄트'공항에 환승차 잠시 대합실에 머무른적이 있었다. 복잡하고 비좁은 대합실에 미국인들로 짐작되는 몇몇가족들과 아이들이 뒤섞여 장난치고 있을때. 갑자기 한 어린아이가 출입구를 향해 부동자세를 취하며 경례를 하자 나머지 아이들도 하던 장난을 멈추고 일제히 그쪽을 향해 거수경례를 한다. 이어서 주변의 젊은 부부들도 합세하여 힘찬 박수를 보낸다. 그 출입구 쪽엔 방금 착륙한 일단의 미군 교대병력이 중무장 차림으로 우리쪽으로 힘차게 뚜벅뚜벅 걸어 오고 있었다.
요즈음 한국군을 바라보는 우리 국민들의 시선은 어떠한가..?. 군인들의 사소한 병영문제가 온통 뉴스를 뒤 덮는다. 참모총장이 손바닥 만한 부동산 문제로 파직을 당하는가 하면, 국회의원 같지도 않은 새파란 비례대표출신 초선의원 따위가 일부러 병장 계급장이 달린 군복 쪼가리(이들 정신 박약아 들에 한한 군복.)을 걸치고 나와, 백발이 성성한 국방장관에게 탁자를 두드리면서 삿대질을 하며 꼴깞을 떤다. 이를 본받아 일부 몰 지각한 무리들과 젊은이들은 軍을 개떡처럼 여긴다.
어떤 정신빠진 인간은 군생활을 빗대어 3년을 썪다 나왔다고 빈정댔다. 그것도 모자라 북한이
바라는 대로 병력감축, 복무기간 단축, 전작권 이전, 한미연합사 해체, 안이한 교육훈련 및 병영생활 等, 온갖 군 전투력을 의도적으로 약화 시켰다. 이 결과 해이해 질대로 해이해진 군기는 오늘날 바닥을 헤매, 대대장이 집무실에서 몹쓸짓을 하는가 하면, 전방을 책임지던 4성의 야전군 사령관이 만취해 하루아침에 술 주정뱅이로 전락하는 모습들을 보고 참으로 우울한 기분을 떨칠수가 없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에서, 그것도 상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악랄한 집단인 이 나라에서, 희생된 옛 부하들을 40여년동안 기리며 제 모든 명예를 그들에게 바치는 지휘관 한명을 보는것은 영원히 불가능한 일일까..?. 그리고 팔이 없는 아들을 데리고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에게 자랑스럽게 신고하는 장군 한명을 보는게 한낱 꿈 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믿고 의지 해야 할런가..?.
문득 '쏭바江'에 드리우는 저녁 노을을 눈앞에 그려본다. 그리고 江물처럼 덧없이 흘러간 젊음을 돌이켜 본다. 50년 세월이 흘렀다. 江山이 바뀌길 어언 다섯차례... '츄라이'와 '호이안'전선에서 마주쳤던 피난민 군상들...청룡부대 이웃 학교에서 함께 뛰어놀던 천진난만한 아이들... 그리고 '따이한'을 연호하며 우리말을 가르쳐 달라고 졸라대던 여학생들... 모두들 그리운 얼굴 들이다. 지금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저 만치 가을이 온다.
동작동 현충원에 단풍이 물들때 마다 매년 그랬듯이 스무개의 꽃송이를 준비하여 그곳에 잠든 소대원들을 찿아 봐야겠다. 김국조하사, 김한성하사, 김정남병장, 황종만 상병等, 유명을 달리한 주월 청룡부대 수색중대 제 1소대의 용감했던 옛 소대원들... 그리고 함께 생사를 함께했던 신종칠 중대장, 지순하중대장, 은명수 중대장, 그리고 동기생 박승진중위, 이수장중위, 한장석중위...
" 야자수 그늘 꿈꾸며 편히 쉬게나, 천국에서 다시 만날 그날 까지..!."
- 끝 - <font color=darkred>
2014年 晩秋.
동호대교 노을진 夕陽을 바라 보며,
木林森房에서... 金 武 一.
프로필.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현대모비스 부사장 역임.
현대제철 부회장 역임.
(현) 월간 문학저널 문인회 부회장.
서양화 화가 화단, 문단 등단..
국립중앙박물관, 예술의 전당 후원회원.</font col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