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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기행4-안성 도깨비촬영지 석남사를 마지막으로 일정 마무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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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찬란한빛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2,399회 작성일 17-08-05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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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밤의 꿈' eclin作 여름기행 4 안성 석남사의 시원한 계곡에서 2017년 7월20일 수요일 여름기행 둘쨋날에 다녀 온 국보 제7호인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와 천흥사지 5층석탑, 그리고 저수지이야기를 먼저 오픈하고 여름기행 4일차 마지막 날의 한명회사당과 안성 석남사이야기가 전개 된다. 안성 석남사 계곡에서 여름기행 둘쨋날에 다녀 온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이다. 국보제7호 천안시 성환읍 대흥리에 위치.. 도로옆에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방비원갈(方碑圓碣: 네모난 비석은 ‘비’라하고 둥근 비석은 ‘갈’이라한다)이라 하여 본래 비와 갈은 구분되었으나 이 홍경사갈은 일반적인 비와 다름없다. 국보 제7호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거북받침돌과 지대석이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머리는 물고기 지느러미 모양을 하고 있는 날개를 달고 있는 어룡(魚龍)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 1026년(현종 17년)에 세운 비, 홍경사 사찰의 이름앞에 봉선이라 붙힌 것은 현종의 어버지 安宗(추존,王郁)의 뜻을 받들어 지었기 때문이다. 봉선(奉先)은 '선조의 뜻을 받든다'라는 의미를 지녔다. 비는 높이 194cm, 폭 100cm, 글자크기 2.4cm, 해서체(楷書體) 한림학사 최충이 짓고 국자승 백현례가 썼다. 奉先弘慶寺碣記 봉선홍경사갈기 翰林學士 宣議郎 內史舍人 知制誥 兼 史館 修撰官 賜紫金魚袋 崔冲奉宣撰 한림학사 선의랑 내사사인 지제고 겸 사관 수찬관 사자금어대인 신 최충이 왕명(宣)을 받들어 지음. 奉議郎國子丞臣白玄禮奉宣書幷篆額 봉의랑 국자승인 신 백현례가 왕명(宣)을 받들어 쓰고, 전액도 아울러 씀. 臣謹按內典云招提者謂招引提擕十方英俊弘闡佛法居止之所焉 又莊子說蘧廬而視仁義晉書論逆旅以濟公私 신이 삼가 내전을 살펴보니 초제라는 것은 시방의 뛰어난 사람들을 불러 모아 불법을 크게 널리 드날리며 머무르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장자』에서는 나그네들이 쉴 숙소를 설치하여 인의를 보인다.’고 하였고, 『진서』에서는 ‘나그네를 맞이하여 공무로 다니는 사람과 사사로 다니는 사람들을 편하게 해 준다’고 하였습니다. 今之於稷山縣成歡驛北路一牛鳴地新置寺舍者卽其類也 初是地無長短之亭人煙隔絶有勸蒲之澤刧賊 지금 직산현 성환역에서 북쪽으로 소 울음소리가 들릴만한 거리에 새로 사찰을 설치하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은 일입니다. 애초에 이곳에는 크고 작은 여관 하나 없어 사람들의 자취는 보이지 않았고, 갈대가 우거진 늪이 있어 강도와 도적들만 많았습니다. 頗多雖岐路之要衝實往來之艱梗不可終否屬於盛時惟    我聖上守位以仁秉文之德干戈戚揚皆偃之矣禮樂刑政畢修之矣 (그래서) 비록 많은 길이 만나는 요충지였지만 실제로 다니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으니 태평스러운 때에 이를 그대로 막힌 상태로 둘 수는 없었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성상께서는 어지심으로 자리를 지키시며 문화의 덕을 가지고 계시니 크고 작은 창과 도끼들은 쉬게 되고 예악과 형정이 모두 갖추어지게 되었습니다. 若乃喜捨之緣遹追之業求諸往代無得而踰甞 그리고 희사하는 인연을 만드시고 선대의 업적을 계승하심에 있어서는 옛날의 일을 살펴보아도 더 뛰어난 사례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詔左右兩街都僧統通眞光敎圓濟道大師臣逈競而曰昔者 그 (성상께서) 지난번에 좌우양가도승통인 통진광교원제홍도대사인 신 형긍에게 명령하시기를 皇考安宗憲景孝懿英文大王初九潛身大千歸命 “옛날에 돌아가신 아버님이신 안종 헌경효의영문대왕(현종의 친아버지)께서 왕자로 계실 적에 불법의 가르침 귀의하시어 每覽法華之妙說深嘉中道之化城方欲効行未能 항상 『법화경』의 오묘한 가르침을 보시다가 나그네들이 가는 중간에 화성을 만들어 쉬게 한 이야기를 매우 아름답게 여기시고 이를 본받아 실천하시려 하였지만 이루지 못하시었다. 勳集朕卽善繼其志永觀厥成一則救濟征人莫憂於險地 짐은 그 뜻을 잘 이어서 그 사업을 이루고자 하니, 한편으로는 나그네들을 구하여 험한 땅에서 근심하지 않게 하고자 함이며, 一則招擕緇侶載轄於法輪 또 한편으로는 승려들을 모아들여서 법륜을 그침이 없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師宜力視賛襄躬親胥宇副我書貞之命主其慮事之權兢纔受」 대사는 마땅히 힘을 다하여 협조하며 직접 터를 살펴서 나의 부탁하는 명령에 부합되게 하고 그 일을 처리하는 권리를 맡도록 하라”고 하시었습니다. 綸言便圖經始縱九迴而無倦須百足以不僵所貴同心用將籲俊爰 有廣利證玄大師賜紫沙門臣得聦 靜慮修眞悟理大德賜紫沙門臣藏琳等競扶願轂枚卜要途蒸然 형긍은 명령을 받고서 곧바로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여러 차례 거듭하여 생각하면서도 피곤해 하지 않았고 많은 발을 빌려서 멈추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마음을 함께하는 것을 중히 여겨서 능력 있는 사람을 부르려 하였는데, 광리증현대사 사자사문인 신 득총과 정려수진오리대덕 사자사문인 신 장림 등이 있어 다투어 잘못된 것을 고치고 중요한 방도들을 자세히 살폈습니다. 來斯實興我役上續差推誠致理翊戴功臣金紫興祿大夫兵部尙書知中樞院事兼 太子太傅上柱國天水縣開國男食邑三百戶臣姜民瞻中樞副使中大夫祕書監兼 太子賓客柱國宜春縣開國男食邑三百戶賜紫金魚袋臣金猛等爲別監使 (이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우리의 공사에 참여하였습니다. 성상께서는 이어서 추성치리익대공신 금자흥록대부 병부상서 지중추원사 겸 태자태부 상주국 천수현개국남 식읍삼백호인 신 강민첨과 중추부사 중대부 비서감 겸 태자빈객 주국 의춘현개국남 식읍삼백호 사자금어대인 신 김맹 등을 별감사로 임명하셨습니다. 於是事諧共理謗絶宣驕尤徒勿奪於農時程物免煩於公 帑陶人施瓦木客供材雪鋸風斤蜂聚蕩心之匠雲鍬電鍤駿奔游手之群起自 丙辰秋迄于辛酉歲凡造得堂殿門廊等共二百餘間所置塑晝諸功德像 及鐘磬幡盖如見在其數寔繁乃勑賜額爲奉先弘慶寺莫不功由鳩僝 이에 함께 조화하여 일을 처리하게 되었는데 험담과 자랑, 교만함 등은 없었고, 인부들을 동원함에 농사철을 피하고 물자를 사용함에 국가의 창고를 수고롭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기와장이는 기와를 대고 나무꾼은 목재를 공급하였으며 톱질과 도끼질에는 할 일없는 목수들이 모여들었고 괭이질과 삽질은 노는 무리들이 달려와 하였습니다. 병진년(현종 7, 1016) 가을에 시작하여 신유년(현종 12, 1021)에 이르기까지 법당, 불전, 대문, 행랑 등 모두 2백여 간을 만들었고, 그곳에 안치한 조각과 그림으로 된 여러 불·보살들의 상(像), 종(鐘)과 경(磬), 번당(법당 내부에 게양하는 깃발)과 화개(불상 위에 덮는 화려한 日傘 모양의 덮개) 등은 현재 있는 것과 같으니 그 수는 실로 매우 많았습니다. 마침내 봉선홍경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는데, 공사는 모두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 이룬 것이었습니다. 勢若飛來像殿經樓麗異而宛疑兜率 鳧銅鴈塔莊嚴而遙認爛陁旣當三寶勃興實可千燈相續又於寺 西對立客館一區計八十閒号曰廣緣通化院斯亦溫廬冬密凉屋夏 寬積以糇糧貯之芻秣施賙窮急設雍伯之」 (절의) 형세는 하늘에서 날아온 듯하였고, 불상을 모신 전각과 불경을 봉안한 누각 등은 아름답고 기이하여 마치 도솔천인 듯하였고, 오리모양의 종과 기러기 모양의 탑은 웅장하고 엄숙하여서 멀리서 보면 (인도의) 나란타사 처럼 보였습니다. 이미 사찰이 크게 일어났으니 실로 천대를 이어 (이곳에서) 불법이 이어질 것입니다. 다시 절의 서쪽에 짝을 맞추어 객관 한 구역 도합 80간(八十)을 짓고 이름을 광연통화원이라고 하였으니 이곳에도 겨울에 사용할 따뜻한, 여름에 이용할 시원한 건물을 갖추고 사람들이 먹을 식량과 말을 먹일 꼴도 쌓아 놓고서 옹백과 같이 죽을 쑤어 어렵고 급한 사람들에게 베풀었고, 義漿防備盗姧列陳留之樓鼓夫 如是則不獨方袍之衆虛往實歸亦令裹足之徒宵盤晝憇終見證眞之境蔑聞焚次之 진유현 처럼 누각에 북을 매달아 도적을 방비하였습니다. 무릇 이와 같으니 법복을 입은 승려들이 빈손으로 왔다가 가르침을 받아 돌아갈 뿐 아니라 길 떠난 나그네들이 저녁에 머무르고 낮에 쉬어 갈 수 있게 되었으니 마침내 진리를 깨닫는 곳이 되었고 도적들의 근심은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向若非酌古沿今賽先皇之弘願隨機設敎崇彼佛之妙門則 兼濟之仁機乎而息於權 지난번에 만일 옛 것을 참작하여 오늘에 실현하려 한 아버님의 큰 서원을 받들지 않고, 근기에 따라 가르침을 베푸는 부처님의 오묘한 가르침을 높이지 않았다면 두루 구제할 수 있는 어짊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輿有旨 祖述無虧肯之功旣存矣 奉行之道亦廣矣 아아, 시작하신 아름다운 뜻을 영원토록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기꺼이 지으신 공로는 이미 이루었으니 이를 받들어 실행하는 길도 또한 넓을 것입니다. 盡善盡美念玆在玆今則申命儒生俾書盛   대단히 아름답고 훌륭하시니 늘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유생을 시켜 이 훌륭한 일을 기록하게 하였는데, 事臣思遲燥吻學淺嚼筋雖長卿形似之文無能爲也而小子斐然之作竊敢効焉 畧述端倪聊裨實錄 신은 생각이 부족하고 학식이 얕아서 비록 사마장경과 같이 제대로 그려내는 문장은 할 수 없지만 어린아이의 가벼운 문장은 감히 흉내 낼 수 있습니다. 간략히 일의 시작과 끝을 서술하여 실록에 보탬이 되기를 바랍니다. 時聖上御國之十八載太平紀曆之第六年夏四月 日 謹記 때는 성상께서 왕위에 오르신 지 열 여덟 번째 해로서 태평(太平 : 거란 성종(成宗)의 연호. 1021~1030년까지 사용)의 여섯 번째 해 (현종 17, 1026)의 4월 일에 삼가 씁니다. 奉 宣權知寺主圓慧智廣普觀善辯通濟得理三重大師 賜紫沙門臣彥崇都監解行無垢大師賜 紫沙門臣朗崇副都監副寺主沙門臣成普 沙門臣慧延僧殷妙暹遠義玄奉謙等奉 왕명[宣]을 받들어 임시로 사주를 맡고 있는 원혜지광보관선변통제득리삼중대사 사자사문인 신 언숭이 도감을 맡고, 해행무구대사 사자사문인 신 낭숭이 부도감을 맡으며, 부사주인 사문 신 성보, 사문 신 혜연, 승 은묘, 섬원, 의현 봉겸 등이 … 받들어 … (이하 3자 결구) 〔출전:『韓國金石全文』中世上(1984)〕 방비원갈(方碑圓碣: 네모난 비석은 ‘비’라하고 둥근 비석은 ‘갈’이라한다)이라 하여 본래 비와 갈은 구분되었으나 이 홍경사갈은 일반적인 비와 다름없다. 현존하는 사적비를 대표하는 우수한 작품으로 용두화(龍頭化)된 귀두(龜頭)는 오른쪽으로 돌려 생동감을 더하고 있으며 물고기의 지느러미 같은 날개를 머리 양쪽에 장식하였다. 귀갑(龜甲) 중앙에는 앙련과 복련을 새긴 비좌(碑座)를 마련하여 비신을 세웠다. 비신 상단에는 전액이 있으며, 비면 가장자리에는 당초문대(唐草文帶)를 두르고 비신 옆면에는 보상화문(寶相華文)을 조각하였다. 이수에는 도식화된 운룡문을 조각하였다. 천안 봉선 홍경사 갈기비는 홍경사의 전반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비문의 내용에 의하면 “왕명을 받들어 최충이 비문의 내용을 짓고 당시[1026]의 명필이었던 백현례가 글씨를 썼다. 고려의 제8대 임금 현종이 부왕 안종의 평소 소원이었던 불법을 널리 전파하고자 했던 뜻을 이어받아 당시에 수초가 우거지고 도적이 자못 많이 출몰하여 행인을 괴롭히던 이곳[옛 직산현 성환역 주변]에다 병부 상서 강민첨 장군과 김맹을 별감사로 삼아 현종 8년(1016년)부터 현종 13년(1021년)의 만 5년에 걸쳐 법당, 행랑 등의 200여 칸의 건물과 서쪽에 80칸의 광연통화원 건물을 지어 길가는 나그네와 공무 수행의 사람들에게는 잠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하고 말과 소 등에게는 마초를 제공하여 편의를 도모하였다.”라고 건립 배경이 나타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봉선홍경사갈> 이곳은 직산현 성환역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이다. 처음 이 부근에는 마을도 주막도 없었으며 갈대가 우거지고 강도들이 출몰하여 교통상 중요한 지점이면서도 사람의 통행이 매우 어려웠다. 고려 현종이 좌우양가도승통 형긍을 불러서 “나의 아버지인 안종께서 왕자의 신분으로 불법을 독실히 받들었으며 대중을 위한 사업을 성취하려 하시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는 그 뜻을 받들어 이곳에 사찰을 지어서 한편으로 여행자의 고통을 제거하고 또 한편으로 불법을 선양하고자 하는 바이니 대사는 내 뜻을 이루어 달라.” 라고 하였다. 형긍은 명을 받고 곧 대사 득총, 대덕 장림과 함께 금품을 모집하여 공사를 시작하였고, 임금은 다시 병부상서지중추원사 강민첨과 중추부사 김맹 등을 별감사에 임명하여 함께 일을 보게 하였다. 관가의 물자를 소비하지도 않았고 농민들의 바쁜 일손을 빼앗은 일도 없이 모든 역군들이 힘과 정성을 다하여 현종 7년(1016) 가을에 시작하여 현종 12년(1021)에 준공을 보게 되었다. 법당의 본 건물과 행랑, 대문 등 200여 간에 달하며 불상과 여러 보살의 탱화, 종과 경을 비롯한 모든 기구가 완비되었다. 나라에서는 절 이름을 봉선홍경사라고 내려주셨다. 또 절 서쪽에 여관 한 채를 세웠는데 크기가 80간이다. 이것은 명칭을 광연통화원이라 하였다. 겨울에 사용할 온돌방과 여름에 거처할 마루방을 갖추었고 여기에 식량, 마초 등이 충분히 비축되어 일반 여행자들의 편의를 제공할 뿐 아니라 의지할 곳이 없는 무리들에게 도중의 휴식처가 되게 하였다. 이는 안종대왕께서 생존 시의 염원을 실현시킨 것이며 금상폐하의 자비로우신 뜻을 이루게 된 것이다. 문신인 나에게 이 사실을 기록하라 하시므로 이상과 같이 그 시말을 기록하여 역사의 자료에 이바지하려 한다. 원비 고려 현종 18년 글 한림학사 내사사인 최충 글씨 국자승 백현례 1981년 10월 임창순 역술, 남계 조종국 쓰다. 외로이 국보 제7호 봉선 홍경사 갈비를 지키는 미완성의 삼층탑, 아마도 몸돌은 완전하지 않지만 고려 8대왕 현종의 염원인 이 지방이 도적도 없고 지나는 나그네를 쉬게 하는 원(院)과 사찰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보였다. 천흥사지 5층석탑 천흥사지 5층석탑(天安 天興寺址 五層石塔) 보물 제354호(1963.1.21지정),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100-2, 고려시대 천흥사터에 서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2단의 기단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거대한 모습으로, 고려왕조 시작 직후 석탑의 규모가 다시 커지던 당시의 흐름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탑신을 바치고 있는 기단은 아래층이 너무 얕아 마치 1층으로 된 듯 하다. 아래층 기단의 4면에는 각 면마다 7개씩의 안상(眼象)이 촘촘히 조각되어 있다. 위층 기단의 4면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두었다. 탑신은 가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새겼다. 몸돌은 4면의 모서리에만 기둥 모양을 뚜렷하게 새겨놓았고,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줄어드는 비율이 비교적 완만하다. 지붕돌은 얇고 너비가 좁으며, 밑받침이 3단으로 매우 얕게 조각되었다. 경사면은 가파르다가 이내 수평을 이루고 있어 그 반전감이 크고, 네 귀퉁이에서의 들림은 날아갈 듯 가뿐하다. 전체적으로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돌의 구성에도 규율성이 있다. 특히 탑신에서 보이는 완만한 체감율은 온화하고 장중한 느낌을 더해준다. 절터에는 탑 외에도 천안 천흥사지 당간지주(보물 제99호)가 남아 있으며, 동종(銅鍾)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동종은 남겨진 기록에 의해 고려 현종 원년(1010)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 탑 역시 이와 시대를 같이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천흥사 종 天興寺 銘 靑銅 鍾 고려 1010년, 1910년 구입, 국보 280호, 높이 170㎝, 입지름 10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몸체에 새겨진 명문 '聖居山天興寺鐘銘統和二十八年庚戌二月日'에 따르면 1010년(현종 1)에 주조된 것으로 원래는 921년(태조 4)에 태조가 창건한 충청남도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천흥사에 있었다고 한다. 종의 정상에는 여의주를 입에 물고 있는 용뉴(龍鈕)와 음통(音筒)이 있는데, 음통 표면은 5단으로 나누어져 각각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그 아래로 어깨부분에는 연판대가 돌아가면서 조각되어 있다. 상대(上帶)와 하대(下帶)에는 연주무늬의 테두리 안에 보상당초무늬를 장식하고 그 사이에 9개의 유두(乳頭)가 표현된 유곽(乳廓)을 4곳에 배치했는데, 유곽 역시 단순한 보상화문대(寶相花紋帶)로 둘러싸여 있다. 한쪽 유곽 아래에는 위패형(位牌形)이 있고 그 안에 2행의 명문을 조각했는데, 이러한 위패형 명문은 고려시대 동종에 새로이 나타나는 양식이다. 몸체의 넓은 공간에는 원형의 당좌(撞座)와 비천상(飛天像)을 교대로 배치했다. 당좌는 8엽의 연판 주위에 인동당초무늬를 장식하고 가장자리에는 굵은 연주문대(連珠紋帶)를 돌려 신라종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비천상이 1구씩 표현된 점은 신라종과는 다르다. 이 비천상은 구름 위에 꿇어앉아 합장하고 있으며 머리 위로 천의(天衣)자락이 날리고 있는 모습이다. 이 동종은 신라범종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제작기법이나 양식에서 고려시대의 새로운 요소가 반영된 것으로 고려시대 동종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형태가 아름다운 대표적인 것이다. 몸체에 새겨진 명문 '聖居山天興寺 鐘銘 統和二十八年庚戌二月日' 천안 성거산 천흥사 종명 통화 28년, 요나라 성종 28년, 고려 현종1년,1010년, 경술년 2월 일 천안 천흥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99호, 충남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234 고려 태조 4년(921)에 창건되었던 천흥사(天興寺)의 당간지주(幢竿支柱)로 현재 천안시 천흥리 마을의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절에서는 의식이 있을 때 절의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이 당간(幢竿)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幢竿支柱)라고 한다. 동·서로 서있는 두 지주는 60㎝의 간격을 두고 있으며,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세워졌다. 기단은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하였는데 기단 주위에 안상(眼象)을 새겨넣어 당간지주의 장식화된 측면을 보이고 있다. 동·서 지주 사이로 깃대를 직접 받치던 받침은 남아있지 않다. 안쪽면에 조각이 없으며 상단 꼭대기끝 한 곳에만 깃대를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난 구멍이 있다. 지주의 바깥 면은 위에서 아래까지 중앙에 1줄의 선을 새겼다. 특히 이곳 천흥사지(天興寺址)에서 출토된 성거산(聖居山) 천흥사(天興寺) 동종(銅鐘)의 명문(銘文)에 의하면 고려(高麗) 현종(顯宗) 원년(1010)에 주조(鑄造)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당간(幢竿)지주도 같은 시대에 사찰(寺刹)을 창건하면서 같이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로 볼 때 건립연대는 현종(顯宗) 연간인 서기 1010년 전후일 것으로 본다. 폭우가 내려서 찾아가 보지 못하여 다음카페 '우리 옛도자 풍경'에서 인용함 천흥사지 5층석탑에서 성거산(聖居山)쪽으로 새로 지은 절 돌아보고 내려오고 있다. 저수지로 오르는 나무계단, 성거산 등산로 입구이다. 하늘이 갑자기 시커매지고 천둥치더니 폭우가 사정없이 내리친다. 저수지물이 갑자기 흙물로 변하면서 물이 불어났다. 붉은 우산위에 떨어진 빗물이 우산 살을 타고 한줄로 땅으로 내려온다. 숙소로 이동하기 위해 무섭기도 했고 해서 저수지에서 서둘러 내려오니 폭우로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우리완 달리 길섶 폭우세례를 받은 초록풀들은 더욱 푸르러 마치 살맛이라도 난듯 했다. 그 풀들에게 싱그런 푸르름을 전해 받아선지 눈이 시원해왔다. 하단은 여행마지막날 이야기이다. 태안, 아산, 천안 등 여름기행 4일째되는 여행 마지막날 서울홈으로 가면서 어딜 둘러보고 갈까 살피다가 천안 상록리조트 바로 옆으로 조선 전기 세조때 역사의 중심에 서 있던 칠삭동이 압구정 한명회선생의 묘소와 신도비를 찾아서 그 자취를 탐방하고 이어서 서울홈으로 오는 길목인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瑞雲山 北麓에 있는 석남사를 찾아서 3박4일의 路毒을 석남사계곡에서 풀기로 했다. 한명회사당(韓明澮祠堂), 충모사(忠慕祠) 三門, 상당문(上黨門) 上黨府院君忠成韓公諱明澮神道碑 譯文(상당부원군충성한공한명회신도비 역문) 輸忠衛社恊策靖難 同德佐翼 定難翊戴 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事 春秋館 弘文館 藝文館 觀象監事 世子師 江原黃海平安咸吉道 都體察使 判兵曹事 上黨府院君 贈諡忠成 예로부터 聖君明王의 運을 어루만져 開國함에 반드시 영웅호걸의 마음을 한가지로 하고 德을 한가지로한 선비가 있어서 곁에서 힘을 드러내고 좋은 꾀로 찬동협조 함으로 능히 不世의 功을 이루는 것이다. 이런 때문에 周나라 宣王이 중흥할 때 方台(方叔과 召虎)가 도왔고 漢光(한 광무제)이 여려움을 이겨낼제 賈鄧(賈復,鄧禹)이 보필하였던 것처럼 우리 世祖가 비로서 일어날 때 말고삐를 맞어 잡고 호걸이 모두 따러 기특한 획책을 들여서 大業을 협찬하여 이룬 것은 上黨韓忠成公이 여기에 一等功臣이 되시다. 공의 휘는 명회요 자는 子濬이요 한씨는 本淸州의 大姓이요 遠祖의 휘는 蘭이니 高麗太祖를 도와서 삼한공신에 봉하고 대대로 그 미덕을 간직하다 諱康이란 분은 高宗朝에 벼슬하여 太常禮議院事가 되고 諱射奇란 분은 僉議右諫議大夫요 諱渥이란 분은 三韓三重 上黨府院君이요 諱公義는 政堂文學이요 諱脩라는 분은 判厚德府事贈左議政이니 公에게 曾祖가 되시며 諱尙質을 生하니 都評議司事贈左贊成이요 이가 監察諱起를 生하니 이가 公의 아버님이요 공의 공훈으로 贈純忠積德秉彛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上黨府院君이요 어머님은 貞敬夫人李氏이시니 驪興의 우러러 보는 氏族이요 藝文提學인 적逖의 따님으로 永樂乙未十月己丑(서기1415년)에 公을 生하시다. 大夫人께서 공을 임신한지 七月만에 生하시니 四體가 처음에 完具하지 못하여 온 집안이 怪異여겨 걷우려 하지 않았다. 老婢가 떨어진 솜털속에 두고 보살피기를 매우 誠勤히 하여 수개월을 지내니 점점 자라나 의젓해지니 腹部와 등에 검정 사마귀가 呈文(별)처럼 나타나 있음으로 사람들이 다 기이하게 여겼다 일찌기 부모兩位를 여의시고 고독한 몸으로 從祖父이신 參判常敬에게 의지하시며 자랐다. 참판이 말씀하시기를 이 兒의 器局度量이 평범하지 않으니 반드시 우리 가문을 일으킬 자라고 하였다. 공이 어려서 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과거에 응시할 준비도 하셨으나 年齒가 벌써 長成하여 여러번 落榜되어도 태연스럽게 자처하여 대단하게 여기지 아니하시니 사람들이 물어보면 점잖은 선비가 출세하고 못하는 것은 운명에 달렸지 하필코 腐儒俗士들 같이 정신을 잃고 슬퍼 할 것인가하셨다. 吉昌權公擥으로 더불어 死生同苦한 벗을 맺어 서로 다정하기가 아무리 管鮑라도 따르지 못했다. 권람과 더불어 뜻이 같고 기개가 합하여 생산사업에 注力하지 않고 山水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스스로 쾌적한 곳이 있으면 한 해가 넘도록 돌아올 줄을 잊어 버리고 聲色과 財利에는 담담하셨다. 공이 일찌기 길창을 농담하여 말하기를 문장도덕은 내가 진정으로 그대에게 양보하겠으나 정치경제사업은 내가 어찌 너무나 양보하겠는가 하셨다. 무릇 議論을 발표하는 것이 다 뛰어나고 기묘하고 훌륭함으로 사람들이 다 큰 그릇으로 지목하였다. 文宗二年(서기1452) 壬申에 공이 연세가 三十八에 敬德宮直에 보직되시던 때 顯陵이 승하하고 어린 왕이 位에 있으니 권신과 간신이 用事하니 나라의 형편이 위태롭고 疑懼하였다 공이 항상 세상에 의분한 마음을 품고 어느날에 吉昌에게 말하기를 시국의 事勢가 이처럼 되어가니 安平大君이 神器를 넘보고 암암리 대신들과 결탁하여 성원하도록 하고 뭇 不順輩들로 뛰따라 뭉치도록 하니 禍亂이 일어남이 아침 아니면 저녁이니 그대는 홀로 생각해 본적이 없었는가 吉昌이 말하기를 그대의 계책이 잘됐도다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공이 말하기를 화란을 평정할려면 濟世拔難할 임금이 아니면 불가하다. 首陽大君의 활달함은 漢高祖와 같고 英武함은 唐太宗과 같으니 天命의 所在를 昭然히 알만하다. 지금 그대가 筆硯으로 모시니 조용히 말씀을 올려서 사전에 일찍 막아내는 것이 옳다 하시매 吉昌이 공의 획책으로 세조에게 告하고 또 말하기를 韓生이 일을 맡아 볼만한 局量이 國士中에 둘도 없으니 오늘의 管樂이라 공이 廷陵의 절개를 지키려거든 그만두고 만일 이 세상을 平治하고저 할려면 韓生이 아니면 불가하다 하였다 세조가 즉시 명하여 공을 초대함에 공이 幅巾으로 入謁하시니 세조가 첫 대면에 옛 친구같이 하고 앞으로 다가와 악수하며 말하기를 어찌 서로 만나기가 늦었는가 지금 主上이 비록 어리시라도 만일 잘 떠 받들고 보필한다면 가히 그대로 守成할 것이어늘 大臣이 사특을 품고 安平大君 瑢에게 貳心을 갖고 先王의 孤孫을 부탁한 뜻을 저버리게 되면 祖宗의 선령을 장차 어느땅에 둘것인가 말을 마치자 눈물을 흘리니 공도 또한 감동하셨다. 극히 返正할 計策을 陳述함이 手掌을 가르친것 같으시니 世祖가 말하기를 形勢가 외롭고 弱한데 엇지할고 公이 말하기를 明公은 宗室의 전통으로써 社稷을 위하여 亂賊을 토벌하는 것은 名分이 올바르고 말이 順調하여 만에 하나라도 성공치 못할리 없는 것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당연히 끊을 것을 끊지 아니하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다 하였으니 원컨데 公은 세번 생각하라 世祖가 말하기를 경은 나에게 여러말 하지말라 계략이 결정 하였노라 이로부터 모든 秘密計謀를 다 公의 가르치는 계획에 맡기겠다. 공이 말하기를 漢高祖가 비록 良平을 任用하였으나 制勝하는 것은 韓彭을 쓰고 唐태종이 비록 房杜를 임용하였으나 戰伐에는 褒鄂을 썼다 하시고 드디어 武臣으로 勇略이 있는 자 數十名을 추천하시다 癸酉(서기 1453년)十月에 장차 義兵을 擧사할제 몇몇이 의심을 갖고 군중을 저지 하는자 있거늘 공이 칼을 높이 뽑아들고 큰말로 生이 있으면 반드시 死함은 사람의 免하기 어려운 바이나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은 오히려 평범하게 죽는 것보다 닛지 않은가 敢히 이의가 있는자는 斬殺하리라 하고 이에 義士를 招集하여 드디어 원흉 악당을 제거하되 머리카락에 빗질하듯 곡식싹에 김을 매듯하여 大難을 平치고 安靖함은 이것이 비록 세조의 英特한 꾀와 슬기로운 판단에서 模出되었으나 숫대를 움직이고 策略을 決定하신 功은 공이 실로 많은 공을 세우셨다 드디어 軍器判官에 발탁되었다가 곧 바로 司僕少尹에 옮기고 策勳으로 輸忠衛社 協策靖難功臣의 號를 내리셨다 甲辰(서기 1454년)에 承政院同副承旨에 拜命되고 乙亥(서기 1455년)六月에 세조가 왕위에 앉아 同德佐翼功臣으로 호를 내리고 우부승지에 오르셨다 丙子(서기 1456년)五月에 중국에서 황제가 太監尹鳳을 파견하여 冠服을 하사 받으시다 세조가 六月初一日로써 廣延樓에서 잔치를 베풀때 李塏 成三問 등이 이날에 大事를 거행하자고 약속람으로 公이 廣延에 狹窄이 있음을 狀啓하고 世子는 절대 잔치에 참석하지 말라 하고 雲劍諸將도 또한 入侍하지 못하게 하니 上王이 가하게 여겼다 三問의 부친인 勝이 雲劍을 앞에 차고 直入하거늘 公이 꾸짖어 制止하셨다 逆黨들이 일이 성공하지 못 할 것을 알고 먼저 공을 害하고저 하는자 있거늘 三問이 말하기를 大事를 이루지 못하니 비록 韓某를 죽인들 무슨 有益하리요 하였다 다음날 사건이 탄로되어 다 伏誅하였다. 광연의 연회좌석에 세자를 앉치지 않고 무신들이 入參하지 못하게 함은 그 깊은 智謀와 遠大한 생각이 보통 사람의 뜻밖에 뛰어 나심으로 元兇惡黨들이 결과적으로 그 奸計를 이루지 못한 것은 이것이 비록 조종께서 암암리 도와주신 힘이라 하지만 또한 공의 충성이 묵묵히 하늘을 감동시킴으로 하늘이 또한 도움이로다 겨울에 도승지에 오르사 왕의 곁에 계시면서 은밀히 기지와 정사를 도우시니 왕이 말하기를 韓某는 나의 子房이라 하였다. 丁丑(서기 1457년)에 崇政大夫 吏曹判書上黨君에 뛰어 拜授하고 겨울에 世子를 封하는 請으로 燕京에 가셨고 戊寅(서기 1458년)에 判兵曹로 옮기셨다 이 때 충청 전라 경상 三道가 凶年들어서 왕명으로 순찰사가 되어 마음껏 구호하니 백성들이 덕분으로 살아났다 이때를 앞서 陵城君具致寬이 建議하기를 충청 전라 경상 삼도가 州縣이 犬牙처럼 서로 錯雜하여 疆界가 不正하니 마땅히 大를 분할하여 小에 幷合해서 그 中을 취하고 경상도의 知世 助羅등의 浦口며 蓮花 浴池등의 島嶼를 다 포기하자는 것이다. 공이 奏請하기를 州縣의 交錯하게 된 것은 大小間의 서로 서로 유지하는 제도에 맞게 한것이어늘 하물며 劃界가 벌써 오래된 것을 一朝에 변경시키면 백성이 반드시 소요할 것이요 또 二浦兩島를 倭人의 고기잡이 補給路로 허락하고 因하여 세금을 거두고 機密히 來往을 살피면 法이 이보다 善함이 없거능 이제야 포기한다면 이는 울타리를 걷고 虎豹를 들여놓은 것이니 邊患이 있을가 두렵다하니 건의한 것이 드디어 잠자다 陵城이 建議하기를 우리 나라가 三國이 鼎峙할 무렵 나라마다 各各 十萬兵式 두었는데 本朝에서 그 땅을 다 가지고 있어도 軍事머리가 미치지 못하니 請컨데 빠진 戶와 숨은 壯丁을 一大刷新해서 行伍에 編入하자 하니 왕이 따랐다 有司가 增額할것만 힘쓰고 一家十丁에 九를 뽑아 兵丁을 삼으니 백성이 능히 감당하지 못하거늘 公이 狀啓하되 兵은 精을 힘쓰고저 할것이요 반드시 많음을 힘쓰지 않해야 하니 停止함을 청하시니 왕이 善하다 稱했다 物議도 다 快하고 軍籍이 이미 닦어서 쉽살이 猝變하지 못하나 그 폐습이 지금도 아직 없어지지 않았다. 기묘(서기 1459년)에 강원 황해 평안 함길도 도체찰사가 되어 按撫하고 방어하고 조치한 것과 動中의 기회를 왕의 玉璽(옥새)로 褒揚하고 계급을 崇祿으로 加하고 庚辰(서기 1460년)에 왕이 서쪽으로 行幸할제 公이 길곁에서 맞이하여 뵈니 왕이 慰勞를 간절히 하고 행차가 順安에 도착하자 장차 돌아올제 공이 扈從할 것을 요청하거늘 왕이 말하기를 卿은 나라의 長城이니 가히 동요하지 말고 任地로 가서 진압하라 하였다. 辛巳(1461년)에 輔國崇祿上黨府院君 兼 判兵曹에 陞하시다 국가에서 庚辰北征한 이후부터 여러 종류의 野人이 벌떼처럼 주둔하고 개미떼처럼 집결하여 기회를 틈타 절도행각을 하니 변경의 근심이 많거늘 왕이 크게 노하여 친히 직접원정 하고져 함에 공이 장계하시되 小小한 醜輩를 반드시 성상께서 번거할 것 없다 武臣이 아무리 駑屯하고 비겁하나 충분히 제지시킨다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나의 경을 의지함은 우러러 長城같이하니 경은 그대로 행하되 다시는 북쪽을 돌아보는 근심이 없도록 하라하니 階下에 다가 서서 사례하고 공이 말하기를 臣이 슬기로운 산정(筭定,계책을 세워)을 받들어 從事하거니 무슨 난처함이 있으리요 단 원컨데 항복만을 헤아리고 한갓 首級을 일삼지 않는다 하시니 왕이 말하기를 문턱 밖에 일은 경이 스스로 하도록 맡긴다 함에 공이 六鎭에 도착하여 攻伐할 준비를 단단히 갖추고 먼저 威武를 보이고 諜者로 하여금 적에게 말하여 왈 처자를 보호하고 廬舍를 사랑함은 人情이 同一한 바니 너희는 어찌 이런 마음이 없는가 네가 만일 속히 항복하면 말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깊이 쳐 들어가 집을 부시고 모조리 殲滅키로 한다하니 적 추장이 와서 배알하며 왈 아들이 죄가 있으면 아버지가 笞罰하나니 만일 능히 잘못을 고친다면 어루만져 용서 하는 것이 가할지니 공께서는 우리를 살펴달라 하거늘 공이 대우를 처음같이 하시니 모든 종류의 野人이 서로 이끌고 기꺼이 따르거늘 왕이 말하기를 전쟁하지 않고 사람을 굴복시키는 것은 兵을 善用한 자라 했다 임오(1462년) 여름에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우의정에 拜命받고 인하여 四道體察使를 겸하시고 癸未(1463년)에 좌의정에 오르시고 장차 四道를 순찰하실제 東宮을 命하여 普濟院에 餞送하도록 했다 甲申(1464년)에 공이 장계하되 義州下流에 鎭이 있으니 만일 적의 變이 있으면 孤城이 되어 지원할 수 없고 熙川永興은 거리가 상당히 멀어 뜻밖에 근심이 있다면 형편이 멀리 구원하기 어려우니 麟山鎭을 의주하류에 설치하고 寧遠郡을 熙川 永興의 사이에 두면 便益이 될듯하다 하시니 왕이 따르다 丙戌(1466년)에 영의정겸 예문관 홍문관 춘추관 관상감 領經筵事 世子師에 보존하리 德을 힘쓰고 功을 힘쓰시니 忠이요 勤이라 누가 그 美德을 宣揚하리오 靑史에 빛나리라 저 西原을 바라보니 여기에 공이 고이 잠드셨네 하느님 祥瑞를 내리시사 子孫이 그 昌盛할지니 그 或 미덥지 못하거든 나의 銘章을 볼지어다. 서기1488년 戊申春夏五月 達城 四佳 徐巨正 撰 十八代孫 羅州鄕校 典校 震鎬 謹譯 충모사건립기(忠慕祠建立記) 충성공 한명회는 태위공 휘 란의 14세손이며 문렬공 휘 상질의 손자로 태종 15년 을미에 탄생하시니 총명과 경륜이 비범하시고 도량과 사려가 심대하시며 뛰어난 용모와 큰 체구는 감히 대하기 어려운 위엄을 갖춘 분이셨다. 세조이후 30여년간 우국충성으로 일관하여 3대 왕조를 섬기시면서 수충위사협책정난동덕좌익정난익대 순성명랑경제홍화좌리공신으로 인각(인각)에 오르시고 5차의 영상 및 좌우상과 춘추홍문예문관영사세자사국구등 위민경세와 성덕훈당(聖德勳棠)으로 조선조 500년 사직을 반석위에 올려 놓으신 원훈공신이시다. 1487년 성종 18년 정미 11월14일 향년 73세에 서거하시니 애도망극하여 성종께서 하사하신 국지원훈어찰(國之元勳御札)은 삼한갑족 오한을 더욱 빛나게 하시었다. 오호라 큰별이 떨어지고 대영웅이 가시니 수인산애(水咽山哀-물이 슬프게 울며가고 산이 애도하니)하고 우동마졸(牛童馬卒)까지도 애통석민하였다 이제 만시지탄도 되지만 누아후손들이 어른의 유덕을 추모현양코져 사적보존과 사당건립을 숙의 하던 중 1003년 11월에 충성공파 전국종친회에서 숙원이었던 대역사(대역사)를 결의하고 신임회장단 희현 영호 재석을 중심으로 성력을 다하여 헌성모금에 착수하였다. 때 마침 보상금 3000여 만원을 기금삼아 묘역 산록 290여평을 형질변경하여 사당 24평 삼문(삼문) 5평 신도비각 2평 기타 부대건물 7평 등 총공사비 2억3천여 만원에 보신고건축산업사 한진현과 시공계약을 체결하고 1994년 6월8일 경향각지의 내빈과 종현 300여명이 모여 성대히 기공식을 거행한 후 동년 9월에 역사적인 상량식이 거행되었다. 2억원의 거금을 모재(募財)함에 있어서 전국 방방곡고 삼천리를 순방하는 동안 피눈물보다 진하다는 옛말대로 종현(宗賢)들의 정성어린 숭조애족정신에 감읍을 금할바 없었다. 아울러 어른의 유적을 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하여 2년여 문헌고증과 제반자료를 정비하여 당국에 제출한 결과 신도비를 중심한 사적이 1994년 11월4일 충청남도지방지방문화재 제332호로 지장 고시되었다. 이제 중시조 부원군의 홍덕유업(弘德遺業)은 길이 청사에 빛나고 자손만대의 영광으로 연면히 기록될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으로 어른의 계시와 영험으로 만사대통하리니 종차 신도비중건조경사당진입로포장과 구재실보수 등이 계속이루어질 곳이다. 3년여의 각고면려끝에 1995년 11월29일 드디어 준공하게 되니 감개무량하다. 원컨대 창업은 이(易)라나 수성은 난(難)하다는 명언을 되새기며 년년참배하는 자손이 운집하고 영원무궁 수호발전되기를 기대하며 3년여에 긍(亘- 걸쳐서)하여 온갖 심혈을 기우린 희현회장을 비롯한 집행부임원진 다 별도 헌성종현일가 모두에게 공수심사(拱手深謝-두 손을 잡고 깊히 감사)하고 자손만대의 귀감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서기 1995년 11월29일 청주한씨충성공파전국회장 희현(喜炫) 청주한씨충성공파명예회장 영호(榮浩) 전충주시장 방십팔대손 상욱(相旭) 謹撰 청주한씨추모봉삼재 회장 희천(喜天) 謹書 長明燈 압구정 한명회 묘지명(鴨鷗亭 韓明澮 墓誌銘) 輸忠衛社恊策靖難同德佐翼保社炳幾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春秋館弘文館藝文館觀象監事 世子師江原黃海平安咸吉道都體察使判兵曺事上黨府院君 贈諡忠成韓公之墓 수충위사협책정난동덕좌익보사병기정난익대순성명랑경제홍화좌리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령 경연춘추관홍문관예문관관상감사 세자사강원황해평안함길도도체찰사판병조사상당부원군 증시충성한공지묘 한명회부인의 묘소 한명회묘소 바로 뒷편에 있다 黃驪府夫人閔氏之墓(황려부부인민씨지묘) 충모사(忠慕祠) 충모사 담장과 신도비각사이에 있는 배롱나무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서운산 북쪽기슭에 자리잡은 서운산 석남사(瑞雲山石南寺) 석남사사적명(石南寺事蹟銘) 석남사는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상중리508번지에 위치해 있고 대한불교조계종제2교구 본사용주사의 말사이다. 최초 창건일자는 신라 문무왕20년 서기680년에 曇華和尙이라 한다. 문성왕때는 達磨禪師가 중창하였으며 고려 광종때 970년에는 惠居國師가 크게 중흥했으며 원종때 1265년에는 奉圓禪師가 중창 조선태종7년 1407년에 靑福寺院이 되어 이 지역 首寺刹이되고 세조3년 1457년에 교지가 내리어 석남사스님들은 부역을 면하고 修道만 전념캐 했다. 선조13년 1580년에 금동범종이 하사되었으나 선조25년 1592년 임란으로 소실되었다. 인조27년 1649년부터 10여년간 海源禪師가 靈山殿과 寮舍를 중건했고 영조11년 1735년에는 華德和尙이 중창하고 철종8년 1857년에는 圓明禪師가 중창하였다. 寺有財産은 安城市 金光面 상중리508번지 종교용지 2,900평과 上中理 임야 26,370평과 상중리 畓 1,809평과 상중리 田 1,889평과 천안시 북면 대평리 전 335평이 있다. 寺宇로는 대웅전 25평이 동남향하고 그 밑에 영산전 6평이 동남향하고 그 좌측에 父母恩重經塔이 있고 또 그 좌측에 道中堂 14평이 있으며 殿의 우측하에 中心堂 50평이 있고 그 앞에 金光樓 15평이 있고 그 북측에 東寮舍 35평이 있으며 그 좌측에 解憂所 15평이 있다. 삼보문화재로는 영산전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825호, 대웅전이 도지정유형문화재 108호, 마애불이 도지정유형문화재 109호, 석탑 2기가 시지정향토유적 19호, 부도 2기가 시지정향토 유적 28호로 되어 있다. 역대 주관인은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점할 때 吳楚成스님이 住持, 1918년 洪月雲스님, 1924년 金景眞스님, 1925년 全振旭스님, 1938년 오명섭스님이 주지를 하였고 1945년광복후에는 金奭鎬스님 다음 金德松스님이 주지를 했다. 1948년 안성읍 노인계원 崔相鏞 廉龍奎 尹春三 崔景浩 등 83인은 同參施主로 무너져가는 대웅전을 보수단청하여 万人의 福田이 되게하였다. 1955년 姜普曄스님 金甲乭스님이 住錫했고 1963년 朴裕羲스님, 1964년 金東洙스님 다음 李鳳城스님이 주석, 1967년 閔東春스님 주지 디음으로 1968년 尹性鏡주지는 靈山殿앞에 있던 대웅전을 전의 뒤에 올려 移建하였다. 1985년 全西明스님, 1986년 金甫聲스님, 1987년 金宗悟스님, 1990년 吳材烈스님이 주지하였으며 1998년 朴正照住持는 中心堂 신축하고 포교에 전력하다가 입적하여 사리를 부도전에 봉안했다. 1999년 鄭弘法주지 다음 2003년 李正無주지는 道中堂과 金光樓를 신축하여 道場을 정화하는 한편 법회를 통해 佛子一路 向上에 매진하고 있다. 또한 1980년 2교구 본사 용주사 주지때 부모은중경탑을 세운 바 그대로 이 도량에 부모은중경탑을 세우니 이는 三寶와 多生父母 一切衆生의 恩功에 감사함이요 恭敬 供養 禮拜 讚嘆하기 위함이요 땅에 떨어진 효심을 높이 선양하기 위함이라. 2003년 3월 1일 수원문화사연구회장 李悌宰 謹撰 동참인 안길승 최응식 안병호 이점분 안해환 장영분 재훈수 연지연 효심이 중심 본심 천심 불심이 됨이여 이 경탑에 공경 공양 예배 찬탄하는 이 바로 그가 공경 공양 예배 찬탄받는 이 아름다운 사람들 거룩한 사람들이여 무궁토록 건강하시고 행복할지로다 이 정 무 합장 모란은 지고 없고 잎만 남아 푸른 저들끼리 잘 자라고 있었다. 부모은중경 첫째, 아기를 배고 지켜주신 은혜이니, 오랜 겁 동안의 막중한 인연으로 오늘날 어머니의 태를 빌어 달이 차서 오장이 생겨나고 일곱 달에 육정이 열리니 어머니 몸은 태산처럼 무거워 바람만 불어도 조심되고 비단옷은 두고도 안 걸치시고 경대에는 먼지만 쌓이네. 둘째, 해산할 때 고통 받으시며 낳아주신 은혜이니, 아기를 배고 열 달이 지나서 어려운 해산 달이 하루 하루 다가오니 아침마다 중병 걸린 사람 같고 나날이 정신마저 흐려지듯 그 어려움은 글로 적기 어려워라. 근심과 슬픔이 가슴에 가득하여 친족에게 슬픔을 호소하고 죽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시네. 셋째, 자식을 낳고 모든 근심을 잊으신 은혜이니, 인자하신 어머니가 그대 낳던 날 오장육부를 쪼개고 헤치는 듯 몸과 마음이 모두 끊기는 듯하고 마치 양을 잡은 자리처럼 피 흘렸어도 아기가 건실하단 말 들으면 그 기쁨이 더하고 또 더하네. 그러나 기쁨 뒤엔 다시 슬픔이 일어나니 그 고통이 몸과 마음에 사무치네. 넷째,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은 먹여 주신 은혜이니, 부모의 은혜가 깊고 무거워 사랑과 보살핌 잠시도 잊지 않고 단 것은 먹이시느라 잡숫지 못하고 쓴 것은 잡수시되 찡그리지 않으시네. 지중하신 애정 누를 길 없어 그 은혜 깊은 만큼 슬픔도 더하시네. 언제나 자식들만 배부르면 인자하신 어머니는 굶주림도 사양 않네. 다섯째, 마른 자리 골라 아기 눕히고 젖은 자리에 누우신 은혜이니, 어머니가 온통 몸이 젖어도 아기만은 한사코 마른 자리에 눕히시고 두 젖으로 아기의 주린 배를 채워 주시고 옷 소매로 추위를 막아 주시고 아기 걱정에 단잠을 설치시고 아기의 재롱으로 기쁨을 삼으시니 오직 아기의 편안만을 생각하시고 인자하신 어머니는 편안함을 바라지 않으시네. 여섯째, 젖을 먹여 길러주신 은혜이니, 인자하신 어머니의 은혜가 땅이라면 엄하신 아버지는 하늘이시네. 덮어주고 안아주신 어머니 은혜, 아버지의 은혜도 그와 같아서 눈이 비록 없어도 미워하지 않으시고 수족이 불구라도 싫어하지 않으시네. 내 속으로 친히 낳은 자식이기에 종일토록 아끼시고 가엾이 여기시네. 일곱째, 더러운 것을 깨끗이 빨아 주신 은혜이니, 아, 예전에 그리도 고우시던 그 얼굴 풍만하고 아릿답던 그 자태 푸르른 버들잎 같던 두 눈썹 양 볼은 붉은 연꽃잎 같으시더니 은혜가 깊을수록 그 모습 쓰러지고 부정한 것 빠시느라 상하시어도 오로지 자식 걱정하시느라 인자하신 어머니의 얼굴이 바뀌셨네. 여덟째, 멀리 떠난 자식을 걱정해 주시 은혜이니, 죽어서 헤어짐도 잊기 어렵거늘 생이별은 더욱 더 마음 아픈 것. 자식이 집 떠나 타향에 가면 어머니의 마음도 타향에 있네. 낮이나 밤이나 마음은 자식 쫓아 흐르는 눈물 몇 천 줄긴가? 새끼를 사랑하는 원숭이처럼 자식 생각에 애간장이 끊어지시네. 아홉째, 자식을 위해서는 나쁜 일도 하신 은혜이니, 강산 같이 중하신 부모님 은혜 그 은혜 깊고 깊어 갚기 어려워. 자식의 괴로움을 대신 받기 원하시고 자식이 고생하면 어머니 마음도 편치 않네. 먼 길 떠난다는 말만 들어도 가는 길 잠자리는 춥지 않을까. 아들 딸의 고생은 잠깐이지만 어머님의 마음은 두고 두고 쓰려라. 열째, 끝까지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시는 은혜이니, 부모님 은혜는 깊고도 무거워라. 사랑하는 그 마음 마르지 않아 앉으나 서나 마음엔 자식 생각 뿐.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자식 생각 떠나지 않네. 어머니의 나이 백 살이 되어도 여든 된 자식을 걱정하시네. 이 같은 어머니의 사랑은 언제 끝나랴. 명이 다하시면 그제서야 그칠까 석남사 영산전(石南寺 靈山殿) 보물 제823호 영산전은 석가모니불과 그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를 함께 모신 불전의 명칭인데, 이곳은 16나한을 함께 봉안한 것이 특징이다.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된 팔작집인데 칸수에 비해 규모가 작은 건물이다. 낮은 기단 위에 민흘림기둥을 세우고 지붕기구는 오랑으로 구성하였다. 내부를 보면, 불단은 건물 뒷벽에 붙여 중앙에 불단을 설치하여 석가삼존불을 모셨고, 그 위에 부처를 보호하고 장식하기 위해 닫집을 매달아 장엄하게 꾸몄다. 중앙의 불단 좌우에는 ㄱ 자형으로 불단을 구성하여 16나한상을 모셨다. 이 영산전은 1562년 건립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을 면하였다. 조선 초기에서 중기 사이의 양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민흘림 기둥: 기둥 뿌리가 굵고 위로올라가면서 굵기가 줄어드는 기둥. *닫집: 궁전 안의 옥좌 위, 또는 법당의 불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의 모형. 영산전 아래의 연당지에 연꽃이 꽃봉오리를 세우고 있다 시원한 석남사 사찰 앞 산으로 오르는 산길 옆 계곡 박두진 문학관을 마지막 일정으로 두었는데, 물 좋은 시원한 계곡에서 오래 머물어 시간이 촉박해서 아쉽지만 서울로 곧장 내 달렸다. 이것으로 4편까지 3박4일 여름기행을 마칩니다. 학습겸 두고두고 보려고 깁니다. 울 낭군님이 작은 글씨 읽을 수 있도록 일일이 타닥으로, 그리고, 그 삼복더위에 전문적인자료까지 찾아 꾸민 것을 옮겨놓았습니다. 건강하세요. 찾아주신 모든님! 찬란한 빛/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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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안박사님의 댓글

profile_image 안박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찬란한빛`김영희* 旅行作家님!!!
"김영희"先生任! 오래間晩에,뵈오니 방갑습니다..
"朗誦詩`房"의  "자작나무`숲"에 들가니,痕跡이 없고..
 한동안 "旅行記`房"에 뜸하여서,"김영희'任을 못뵈었고..
 間晩에 들어와서 "記行文&映像"을보며,"郎君님&영희님"을..
"찬란항빛`김영희"作家님! "處暑"가,코앞에..늘,健`安하시어要!^*^

찬란한빛e님의 댓글의 댓글

profile_image 찬란한빛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안박사님, 안녕하세요?
그렇군요. 이제서야 오랫만에 뵙는군요.
건강하신 여름을 보내신것 같아 감사한 생각입니다.
한적한 여행기방에 잊지않고 찾아 주심 또한 감사하답니다.
누구든 둘러보기만 해도 감사한데 박사님께선 흔적까지 두시니
인기척으로 저의 마당이 활기가 솟는 듯 기운이 펄펄 나네요. ㅎ
더위로 갈아앉은 기진맥진이 좀씩 살아나니 반갑게 뵙게 됩니다.
아침저녁으로 머지않은 가을날이 느껴지기도 하는 요즘입니다.
내내 건강하시고요.. 고운자리 해 주심을 진정 감사드립니다.

낭송시방, 자작나무숲에도 총총걸음으로 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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