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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포석조명희문학제 4박5일기행2-일송정ㆍ윤동주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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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찬란한빛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1,285회 작성일 18-08-21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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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에서 내려다 본 혜란강..2018.7.6.금요일



연변 포석조명희문학제 참여차 4박5일 중국기행

언제: 2018.7.3.화-7.화(4박5일) 
어디: 연길ㆍ백두산ㆍ용정ㆍ도문

옌지(延吉/연길)는..
중국 지린성(吉林省)에 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州都) 인구 약 23만 1천(1990). 
중국내 조선족의 문화 중심지이며, 주변 농업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의 집산지이다. 
주민의 절반 이상이 한국인이다.

이곳은 청말(淸末)에 
간무국(墾務局)이 설치된 이래 발달하였기 때문에 국자가(局子街)라고도 불렀다. 
1902년 엔지청(廳)이 설치되고 1909년 부(府)가 되었으며, 중화민국 수립 후 현(縣)이 
되었다. 1909년 젠다오 조약 이후에 교역주로서 개방되자 많은 한국인 이민이 
이주하여 시의 주변지역을 개척하였다.

중국에는 소수민족이 모여 사는 지역을 자치주라는 이름을 붙여 그 민족 스스로가
그 지역을 가꾸어 나가도록 하는 소수민족 우대 정책을 펴고 있어 자치주 내의
정부기관이나 신문 광고 등에 그 민족 자체의 문자를 우선적으로 쓰도록 하고 있다.
그 때문에 연변에 도착하면 거의 모든 옥외광고가 한글로 되어 있음을 볼 수 았다.
사람들이나 옷, 집, 길거리를 둘러봐도 전혀 낯설지 않은, 
우리나라의 어떤 도시에 온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연변은 자연환경이 우리나라와 거의 같은 곳이고 백두산 가는 길목이므로 중국을 찾는 
한국 여행객들에게는 임시 안식처와도 같은 곳이 된다. 
부근에 석탄ㆍ금 등의 광산이 있고ㆍ광공업이 발달해 있다. 
한국어 방송국과 신문사가 있으며,의과대학ㆍ연변대학 등이 있다.



2
일송정ㆍ윤동주생가

룽징 시
용정(중국어 간체자: 龙井, 정체자: 龍井, 병음: Lóngjǐng, ·문화어: 룡정, 표준어: 용정) 은 
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있는 도시이다. 
면적은 2591km², 인구는 26만여 명이고, 전체 인구 중 한민족 비율이 67%에 이른다. 

가곡 <선구자>로 알려진 정자 일송정이 있으며, 시인 윤동주의 고향으로 그의 무덤이 있다. 

동남쪽으로는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접해 있다. 
동북쪽으로는 연길, 도문, 서남쪽으로는 화룡, 서북쪽으로는 안도에 접해 있다. 
백두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도시 가운데로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이 흐른다. 


일송정으로 이동중에 만난 푸른풍경

용정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중부에 위치하며 주도(州都)인 옌지(延吉)에서 남서쪽으로
20km 떨어져 있는 상공업도시이다. 1913년에 옌볜현이 설치되었다가 1983년에 룽징현으로
개칭하였고, 1988년 7월에 시(市)로 승격하였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3ㆍ13 만세운동의 현장(용정중앙소학교)를 비롯하여 1880년경 한국인이 
우물을 처음 발견하였다는 용정 기원(起源) 우물이 있다. 삼림 및 광산자원이 풍부하여
동ㆍ은ㆍ납ㆍ아연 등이 채굴된다. 공업으로는 기계ㆍ화학ㆍ제지ㆍ야금ㆍ피혁 등이 생산된다.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해란강)이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며, 주변의 비옥한 농경지에서는
쌀ㆍ콩ㆍ옥수수ㆍ아마(亞麻)ㆍ사과ㆍ배 등 농산물을 산출한다.장투철도(長圖鐵道:長春~圖們)가 
시내로 지나며, 교육기관으로는 3개의 대학원과 146개의 소ㆍ중ㆍ고등학교가 있다.

문화적으로는 비암산의 일송정(一松亭), 3ㆍ13 반일의사의 묘지, 한왕상고성(汗王山古城)
유적등이 있다.시내는 현대적 도시로 급성장하고 있으며, 백두산 관광기지로도 큰 몫을 한다.


용정으로 가다 보면 길 오른쪽의 야산 위에 자그마한 정자가 하나 눈에 띄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일송정'이다. 전에는 늠름한 자태의 소나무가 한그루 
서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작은 소나무 한 그루와 정자가 있다.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의 이 '선구자'를 8.15 해방 전에는 '용정의 노래'라고 하여
망국의 슬픔, 암울한 앞날을 견디지 못해 우리 겨레는 이 노래를 부르며 많은
눈물을 흘렸고 한숨을 토했다.

그 '일송정'이라는 이름은 비암산 벼랑의 바위 위에 소나무 한 그루가 푸름을
자랑하며 우뚝 솟아 있었는데, 그 모양이 정자 걑았다는 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놀이철이 되면 이 소나무 아래 바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또 나무를 수호신처럼
여겨 치성을 드리기도 했으며 용정의 조선족 학생들은 비암산에 소풍을 나가
학교에서 배운 '학도가' 같은 노래를 힘차게 불렀다.




일송정 입구 주차장이다.
이곳부터는 걷거나 여기서 운행하는 오픈차량을 이용해야한다.







일송정을 알리는 표지석, 일송정이 있는 산이 비암산이다. 


한국과 수교후 
중국 조선족들과 한국 역사학자들의 도움으로 중국과 함께 조성한 일송정


인솔자 조철호회장님의 상세한 해설을 들은 뒤, 일송정 노래를 힘차게 제창도 한다.
 


2년전에 왔을땐 일송정 노랫말이 이처럼 있었는데 이번엔 없어졌다. 

龍井의 노래 (先驅者)
作詞 尹海榮 作曲 趙斗南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때
뜻깊은 용문교에 달빛고이 비친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때
사나이 굳은마음 길이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꿈이 깊었나 


지난해 한중 관계악화로 인해 
이곳 일송정 노래가사에도 영향이 미친것을 보면 안타까운 일이다,


일송정 노랫말이 없어진 부분이 하얀면으로 남아 있다.

일송정 비 좌측에 있는 돌비가 '비암산 진달래비'
비암산 진달래 / 조 룡남

산.산. 비암산 봄이 오는 산
봄눈 녹는 길목마다 피는 진달래
꽃가지 부는 바람 연분홍 바람
네마음 내마음에 꽃물이 드네

꽃술을 세여보자 꽃말을 읽자
세전벌 오십리에 밭갈이 노래

산.산. 비암산 꽃이 피는 산
꽃눈트는 굽이마다 우는 솔쫑새
-님아. 님아. 오시리 오시리잇고
일송정 추녀아래 꽃꿈이 곱네

꽃잎 따서 그리운 편지에 접어
룡정의 봄소식을 전하여주자
2004.4.20

일송정 비 우측에 있는 돌비가 '용정 찬가비'
룡정찬가 / 이태수 龍井贊歌/李泰洙

백룡승천白龍升天
신비한 전설傳說 
용드레우물에
무지개로 섰다

그 광환光環
해란海蘭에 비끼고
비암琵岩에 걸려
서전산야瑞甸山野를 비추니

천지정기天地正氣
인걸人杰에 용龍꿈을 선사하는
천혜天惠의 땅
성聖스러운 터 룡정龍井

2004.4.20




일행들이 일송정 표지석 앞에서 기념촬영이다.


동양일보 조철호 회장님과 단독 기념촬영을...






일송정에서 바라 본 해란강은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해란강으로 그 물줄기가 실개천처럼 보인다.
해란강은 간도(만주) 지역을 흐르는 두만강의 지류인데 연길 시내 중심을 관통해 흐르고 있다.
우리 민족이 간도 지역에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 해란강 주변의 들판인데 
주로 옥수수를 재배하던 중국인들과는 달리 이곳 북방에서 벼농사를 시작했던 억척같았던 
선조들에게 해란강은 생명의 젖줄이었다.



일송정에서 바라 본 해란강 물줄기

해란강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한 줄기 해란강'의 해란강이 바로 이 강이며, 이 일대를 
평강평야라 한다.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형 조건이 토지 이용을 결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하천을 중심으로 좌우로 가면서 하천-자연제방(논농사)-경계부(취락)
-구릉지(밭농사)의 패턴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나무가 심어진 제방 사이를 흐르고 있는 현재 하천은 논농사를 짓고 있는 범람원과 
뚜렷이 구분된다. 하지만 원래 하천은 넓은 범람원을 관류하던 망류 혹은 
곡류 하천으로, 구하도의 흔적을 범람원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송정은 그 이미지 만큼이나 아픈 상처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일송정(一松亭)은 중국 지린성 연변자치주 용정시에서 서남쪽으로 4km 떨어진 비암산 정상에 
우뚝 서서 일제시대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중심지인 용정시를 굽어보고 있다.

일송정에 올라가면 용정시 양쪽으로 대평원이 펼쳐지고 뒤쪽으로 해란강이 한줄기로 
굽이굽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일송정 바로 옆 절벽 끝에 한그루 소나무가 우뚝 서 있는데 
전해오는 설에 따르면 정자를 닮은 소나무로 인해 일송정이라 불렀다고도 하고 
또는 한그루 소나무 옆에 나무정자가 있어 한그루 소나무, 하나의 정자라는 뜻으로
일송정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일제시대 일송정은 용정 일대 구국 청년들의 항일운동의 요람이며 성지로서 
주민의 관심과 칭송이 높아지자 일제는 정자를 없애고 옆의 소나무도 베어버렸단다.
이곳에는 1938년도까지만 해도 수백년 동안 온갖 풍상을 겪어온 아름들이 큰 소나무가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

해방이후 중국 용정시 정부는 1989년 한국인의 도움을 받아 다시 이곳에 정자를 세우고 
소나무를 심었는데 누군가에 의해 계속 잘리거나 말라죽고 현재 서 있는 소나무는 
2003년에 9번째로 심은 것이라 한다.










女作家 姜敬愛 文學碑

소설가 강경애는 
1906년 4월 20일 조선 황해도 송화에서 출생하여 장연으로 이주하였고
1921년 평양 숭의녀학교를 다녔다. 1825년 룡정에 와 1년반 정도 교원으로 지낸바
있고 1931년 1월 처녀작 '파금'을 발표하고 6월 룡정으로 이주했다. 

'어머니와 딸'(1931) '채전'(1933),'축구전'(1933) 등에 이어 룡정의 문학단체인 
'북향회'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중편 '소금'(1934), 장편 '인간문제'(1934), 
단편'지하촌'(1936') '어둠'(1937)등 17편의 소설과 기타 문학작품을 발표했다. 

1940년 2월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조선 황해도 장연으로 돌아갔고 
1944년 4월 26일 병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38세 

강경애는 다년간 룡정에서 살면서 최하층 인민등의 생활을 동정하고
올굳은 문학정신으로 일제와 그 치하의 비정과 비리에 저항하면서 
녀성 특유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아름다운 문학형상들을 창조한 
우리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녀성작가이다. 

강경애의 문학 정신과 업적을 기리고자 한국 녀성문학인들의 사랑과 지원에 
힘 입어 이 문학비를 세우는 바이다.


인간사회에는 늘 새로운 문제가 생기며 
인간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투쟁함으로써 발전될 것이다 - 강경애




체육관앞 주차장으로 다시 내려 옴



윤동주(尹東柱)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명동학교 교원이었던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의 3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 아명은 해환(海煥)이다. 
그가 태어나기 석 달 전이었던 9월 28일, 친정에서 살던 고모 윤신영이 아들 송몽규를 낳았다. 
고종사촌 관계인 윤동주와 송몽규는 그렇듯 한집에서 태어나 후일 죽음에 이르기까지 
평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윤동주는 간도 이주민 3세였다. 
19세기 말 청나라의 봉금정책이 풀리고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 기근이 심해지자 
기아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은 너도 나도 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터전을 옮겼다. 
1886년 함경북도 종성에 살던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도 간도의 자동으로 이사했고, 
1900년에는 기독교 장로였던 할아버지 윤하현에 의해 명동촌으로 재차 이사했다.

1906년 10월 애국지사 이상설과 이동녕이 용정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웠다. 
북간도 최초의 근대식 민족교육기관이었다. 그런데 이듬해 4월 이상설이 용정을 떠나며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던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이 명동에 
명동서숙을 세운 다음 수많은 애국지사를 길러냈다. 
명동서숙은 1908년 4월 명동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윤동주는 1925년 4월 4일 송몽규와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친구 문익환 목사와 당숙 윤영선, 외사촌 김정우 등도 같은 학교를 다녔다. 
비교적 가정이 유복했던 그는 소학교 4학년 때부터 경성에서 간행하던 《어린이》,
《아이생활》을 구독하면서 문학의 꿈을 키웠고, 5학년 때 급우들과 함께 
《새명동》이란 등사잡지를 만드는 등 활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소년기의 윤동주는 내성적이면서도 의연했고 씩씩했다. 재봉틀로 해진 교복을 직접 
고쳐 입었고 항상 책 속에 파묻혀 살면서 창작에 몰두했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송몽규, 김정우와 함께 인근 대랍자(大拉子)에 있는 중국인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 동안 공부했다. 

그의 시 〈별 헤는 밤〉에 나오는 패(佩), 옥(玉), 경(鏡)과 같은 이름을 가진 소녀들을 
만났을 것으로 추측되는 시기다.

이듬해인 1932년에 그는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명동 북쪽의 소도시 용정(龍井)에 있는 
기독교계 학교인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그의 집도 용정으로 이사했다. 
은진중학교 재학 시절 윤동주는 급우들과 함께 문예지를 만들고 축구선수로 활약했으며, 
교내웅변대회에서 ‘땀 한 방울’이라는 화제로 참가하여 1등을 하는 등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였다.


윤동주(尹東柱 1917.12.30 ~ 1945.2.16)

서시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인. 북간도(北間島) 출생. 
용정(龍井)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을 거쳐 도일,
동지사(同志社)대학 영문과 재학 중 1943년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하다 
사상범으로 일경에 피체. 44년 6월 2년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규슈(九州) 후쿠오카(福罔)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용정에서 중학교에 다닐때 연길(延吉)에서 발행되던 '가톨릭 소년' 에 
여러편의 동시를 발표했고 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도일하기 앞서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시집(自選時集)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그의 사후에 햇빛을 보게 되어 48년에 유고 30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 되었다. 

이 시집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비로소 알려지게 된 윤동주는 
일약 일제강점기 말의 저항시인으로서 크게 각광을 받게 되었다. 
주로 1938-41년에 쓰여진 그의 시에는 불안과 고독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강인한 정신이 표출되어 있다.

'서시(序時)'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십자가' '슬픈 족속(族屬)' 등 
어느 한 편을 보더라도 거기에는 울분과 자책, 그리고 봄(광복)을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져 있다.

연세대학 캠퍼스와 간도 용정중학 교정에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으며, 
95년에는 일본의 도지사 대학에도 대표작 '서시' 를 
친필과 함께 일본어로 기록한 시비가 세워졌다.

















조철호 동양일보회장님과 사진 클로즈업



윤동주 생명 전시관 내부 사진 전시물을 옮기며..















윤동주와 친구들
뒷줄 왼쪽 장준하, 가운데 문익환, 오른쪽 윤동주, 앞줄 가운데 정일권

윤동주(尹東柱)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명동학교 교원이었던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의 3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 아명은 해환(海煥)이다. 
그가 태어나기 석 달 전이었던 9월 28일, 친정에서 살던 고모 윤신영이 아들 송몽규를 낳았다. 
고종사촌 관계인 윤동주와 송몽규는 그렇듯 한집에서 태어나 후일 죽음에 이르기까지 
평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윤동주는 간도 이주민 3세였다. 
19세기 말 청나라의 봉금정책이 풀리고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 기근이 심해지자 
기아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은 너도 나도 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터전을 옮겼다. 
1886년 함경북도 종성에 살던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도 간도의 자동으로 이사했고, 
1900년에는 기독교 장로였던 할아버지 윤하현에 의해 명동촌으로 재차 이사했다.

1906년 10월 애국지사 이상설과 이동녕이 용정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웠다. 
북간도 최초의 근대식 민족교육기관이었다. 그런데 이듬해 4월 이상설이 용정을 떠나며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던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이 명동에 
명동서숙을 세운 다음 수많은 애국지사를 길러냈다. 
명동서숙은 1908년 4월 명동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윤동주는 1925년 4월 4일 송몽규와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친구 문익환 목사와 당숙 윤영선, 외사촌 김정우 등도 같은 학교를 다녔다. 
비교적 가정이 유복했던 그는 소학교 4학년 때부터 경성에서 간행하던 《어린이》,
《아이생활》을 구독하면서 문학의 꿈을 키웠고, 5학년 때 급우들과 함께 
《새명동》이란 등사잡지를 만드는 등 활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소년기의 윤동주는 내성적이면서도 의연했고 씩씩했다. 재봉틀로 해진 교복을 직접 
고쳐 입었고 항상 책 속에 파묻혀 살면서 창작에 몰두했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송몽규, 김정우와 함께 인근 대랍자(大拉子)에 있는 중국인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 동안 공부했다. 

그의 시 〈별 헤는 밤〉에 나오는 패(佩), 옥(玉), 경(鏡)과 같은 이름을 가진 소녀들을 
만났을 것으로 추측되는 시기다.

이듬해인 1932년에 그는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명동 북쪽의 소도시 용정(龍井)에 있는 
기독교계 학교인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그의 집도 용정으로 이사했다. 
은진중학교 재학 시절 윤동주는 급우들과 함께 문예지를 만들고 축구선수로 활약했으며, 
교내웅변대회에서 ‘땀 한 방울’이라는 화제로 참가하여 1등을 하는 등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였다.









윤동주생가 방문을 마치고 용두레 우물이 있는 거룡우호공원에 이른다.
3편에서 이야기가 전개 되겠습니다.



찬란한 빛/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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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소슬바위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소슬바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뜻 있는 문학기행 길이 된듯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찬란한빛 님 덕분에 각국 및
국내 유서깊은 곳은 쉽게 앉아서
볼 수 있어 참 행복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소서
감사합니다
이찬사 드림

찬란한빛e님의 댓글

profile_image 찬란한빛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소슬바위님, 시인님이시군요.
이찬사시인님..
시인님께서 이렇듯 오셔서 고운정을 늘 두고 가셨군요.
그 정성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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