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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미 시 <평범한 아침>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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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470회 작성일 26-04-03 09:59

본문

범한 아침 4

 

      한영미

 

 

어제는 졌고 오늘이 다시 피었다

그렇다고 하루가 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시간을 심어 가꾸는 나의 정원은

몸을 하위로 분류할 뿐

 

나는 긴긴 잠에서 깨어났고

여러 꿈이 다녀갔다

도대체가 이어지지 않는 파편이었지만

잇대어져 기억 속에 끼워졌다

어떤 것은 사납고 어떤 것은 아름다웠지만

잔상조차 남지 않은 것들은

골몰해도 들춰지지 않았다

지나갔으므로 사진첩처럼 덮어야만 한다

 

식사가 가능하겠냐고 누군가 물어왔다

변함없음을 확인하는 데는 밥만 한 것이 없어서

그 흔한 인사말을 붙잡고 살아간다

 

이젠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잘 버텨냈다고, 의사가 마침표 찍듯 말해줬다

잘 버텨내서 주어지는 것이 아침

 

어제가 끝나서 다행이다, 생각하며

돌아누웠을 때

 

충북 옥천에 가을 벚꽃이 피었다는 뉴스를 접한다

손목에 밤새 감겨 있던 묵주를 바라본다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식사 배급하는 이가 나를 일으켜 앉힌다

아침상()이다

 

 

 

의 여자

 

 

유리병이 여자를 담고 있어요

 

탁자 위에서 턱을 괸 것 같은 기울기로

햇볕이 쏟아져 들어와요

그 사이로 이해와 오해로 지어진 집이 있어요

어깨가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채로 서 있어요

 

여자는 백향목을 길러내고 있어요

세상이 다그칠 때마다

한쪽으로 쏠린 수위에서 숨이 술렁거려요

 

햇살이 비치면 물빛으로 반짝이기도 하지만

집은 대부분 비가 내린 날이 많아요

물때가 지워지지 않아 눈물로 남아 있고요

외벽엔 낡은 밧줄 자국이 선명해요

 

이따금 썩지 않은 물소리가 들려요

그것은 흐느끼는 것인지 젖어 드는 것인지

알 수 없어요

 

가끔 울컥거리기도 하는 것은 몸속에 잠긴

백향목 때문일 거예요

그때만큼은 영원이 뿌리를 뻗는 시간이지요

반쯤 열린 창문이 끝없이 푸르게 넘실거려요

 

여자에게 자꾸 빗물이 들이쳐요

조금만 흔들려도 모서리가 부딪칠 것만 같아요

날마다 파편이 되어 쏟아지는 말들,

여자는 너무 투명해서 꿈조차 깨지기 쉬워요

이제 그만 놓아주세요

 

당신의 병은 더 이상 이 여자가 아니에요

 

 

 

슈뢰딩거의 이별

 

 

상자는 너에 대한 나의 두 마음

나의 두 마음이 너를 향한 확률

 

나는 살아서 빛나는 파란 눈을 보지 못하고

죽어서 굳게 내리감은 눈꺼풀을 본다

 

손을 넣어 등을 만져볼 기척도 없이

흔들어 깨워볼 겨를도 없이 너는,

 

죽음을 쓰다듬는다

쓰다듬는다 죽음을

 

그 순간부터 나는 고양이,

그에 걸맞은 이별의 자세가 된다

 


 

 당신의 4*

 

 

꽃들은 어김없이 수명을 서록한다

 

내년이나 올해나

흩날리는 꽃잎들은 귀로 먼저 들려오고

 

낙화도 자책이 될까

슬픔이 겹겹 쌓이는 동안에도

꽃무덤은 여전히 봄을 간섭하고 있다

 

끝내 가지를 놓지 못해 낯선 현기증이 인다

모가 닳은 칫솔처럼 뭉툭한 우듬지에

햇볕 하나 꽂아두고,

불현듯 올려다보는 마지막이라는 벚꽃

 

그날의 비가 내린다

떨어진 어린 꽃잎들 물속에 잠겨

헤어나지 못한 채 흘러간다

얼마나 허우적댔으면 저리 힘없이 실려 갈까

 

모두가 휩쓸리고 난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비는 그치고

사람들은 이 봄날을 소란스럽게 채우는데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할수록

꽃 지는 소리가 비명인 줄을 알아서

4월은 꽃을 앓는다

 

귀를 막아도

꽃은 지고또 지고

  

*이만희 영화 OST에서 제목 차용

 

 

 

기약할 수 없는 말

 

 

갑작스럽겠습니다만 슬픔을 등록해드렸습니다

 

자세 고쳐 앉은 의사가 공손하게 말했다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선의인 양

안경테 바짝 끌어올리며

 

병동엔 항암 모자들이 바퀴를 밀며 오갔다

그는 그들 틈에서 언제 끝날지 모를

검사를 받고 또 받았다 금세 푸른 멍들이

팔뚝에 피어났다

 

언젠가 꿈에서 본 긴 행렬이 떠올랐다

맨 앞이 계속해서 지워지던,

창백한 사람들이 번호표 쥔 채

여전히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망연한 얼굴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믿는 것에 의해 후생이 달라진다면

나는 대체 누구의 믿음으로 여기에 있는 걸까

 

한결같은 말로 건네는 위로에

오히려 위로를 얹어 돌려줘야 할 것만 같아서

난감한 돌덩이 하나 주워 들 시간

 

그가 명치 부근을 두드린다

  

한영미 시집슈뢰딩거의 이별(시인동네, 2024)




서울 출생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9년 시산맥》으로 등단

2020년 영주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슈뢰딩거의 이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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