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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홍배 시 <바람의 색깔>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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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70회 작성일 26-04-2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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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의 색깔 외 

 

    배홍배

 

 

  앵두나무에 치는 눈발에서도 비는 뿌렸다 나무의 가지가 터져 붉은 빗방울들 맺힐 때 빗물까지 무슨 색깔의 바람은 불어갔을까 벽에 걸린 가족사진에서 갓난아기 때 죽은 동생이 떨어지고 떨어진 자리를 어머니는 가혹한 빨간 립스틱으로 덧칠했다 아버지가 잘라버린 앵두나무 뿌리에서 덧나는 무화과나무, 핏빛 같은 입술을 피울 때 초록으로 무성한 울타리 아래서 나는 첫 수음을 하고 꿈 밖으로 지워지는 몽정의 흔적에서 아이들은 다시 태어나 서러운 울음을 울었다 어디를 향해도 까마득한 바람의 자리, 자리마다 펑펑 눈 내리는 날

 

 

어라연

 

 

  4월의 태양 빛이 내리 꽂히는 발등에도 일기예보와는 무관한 여우비는 뿌려졌다 비가 되지 못한 풍경으로 걷는 방향 그대로 흘러가는 눈빛과 눈빛들, 어렴풋이 몰려간 곳에서 피어오른 목련 구름을 숭배하며 기상전문가들은 자신의 실수를 정당화했다 구름을 쫓아 날아오르다 꽃이 되어버린 나비의 날개가 공중의 초입을 쓸쓸히 지키다 흩날릴 때 빗방울에선 단맛이 났다 물 먹은 해가 길눈이 어둡기엔 하늘이 너무 밝아 하루에도 여러 번 잘못 찾아온 정오의 숭고한 몰락을 피해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봄, 꽃잎에 갇힌 빛들이 뛰어내린 멍 자국을 온전히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 슬픈 일이었다 꼭 쥐고 있었으나 끝내 놓쳐버린 누군가의 손금 같은 간지러운 것들로 자꾸 편입해 들어오는 무엇과 다시 무엇을 모의해도 강은 흐를 뿐, 그뿐이었다

 

 

 

봄볕

 

 

옛집 살구나무에 그믐이 환하게 걸리면

어머니 치마폭 그늘에서도 새벽은

파랗게 저물었다

변비에 푹 잠긴 엉덩이로

주저앉은 날들이

귓속에서 윙윙 밝아올 때

살구나무는 우리 집 가족사 끝까지

뿌리를 내려

나의 비애를 한껏 빨아올리고

맑은 하늘에서 소나기가 뿌렸다

그 빗방울로 세상은 웃고

빛깔 흐린 날들이

햇빛 쨍한 그늘에 숨어들어

텅텅 빈 봄

하루가 가기엔 아직 먼

봄볕 안으로 안녕, 안녕

들어가는 길이 영 낯설었을까

풍경에 쫓겨 간 하늘이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섬진강

 

 

  쪽배가 길을 더듬어 굴러온 육십 리를 전라도 땅은 울먹이며 흘렀다 흐르고 흘러가서 제자리에 고이는 옛 구례길 모래 바닥에서 물고기들이 울고 매미가 허물을 벗었다 오픈카를 모는 아가씨의 스타킹이 흘러내리고 뒤따르는 자동차들이 하동행 편도 위에 뜻 모를 상형문자를 그렸다

 

  낮아지며 따라가며

  사람의 모양으로 강변 살자

  도로를 달려 집에 돌아가는 빈 배

 

  서투른 삿대질이 문자의 의미를 왜곡할 때마다 하동에서 구례까지 현대식 교량이 하나씩 세워졌다 수면 위엔 파문이 일고 깊은 산에서 내려와 인간의 그림자로 물 위에 떴다 재첩을 건져 올리는 여인들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온 물빛 마르는 강바람 속엔 아련한 사람의 무늬가 새겨지고 있었다

 

 

 

몰운대

 

 

  산골의 예고 없는 폭설에 무릎이 걸음 아래 아무렇게나 흘러 다녔다 삐걱거리는 다리에 깨끗한 숲이 울창한 곳은 나무의 전생이다 만져보면 죽은 나무의 영혼이 떠올랐다 영혼을 믿습니까 한 쌍의 노부부가 물었다 그들이 끌고 온 그림자가 죽은 나무의 그늘 안에서 땀을 흘렸다 잠깐의 망설임이 어제가 되어버린 오늘 훌쩍 키만 커져버린 시간 속에서 그들은 육체가 비좁다고 불평했다 늙은 해의 빈 방이 깜짝 붉은 노을로 채워질 때 보았을까 시늉으로 반짝이는 손에서 뜨는 별을, 생이 저문 뒤 영혼이 날아갈 밤의 깊이를 가늠해보는 것이었을까 그들은 절벽 아래로 빨던 캔디를 던지고 사과가 떨어졌다 가방에서 오래된 노트를 꺼내 뒤적이며 노부부는 서글프게 웃었다

 

배홍배 시집, 바람의 색깔(시산맥, 2014)




  

1953년 전남 장흥 출생

2000년 월간 현대시로 등단

시집 단단한 새바람의 색깔라르게토를 위하여』 

산문집 추억으로 가는 간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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