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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 <젖지 않는 마음>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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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01회 작성일 26-05-12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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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는 마음 외 4편

 ―편지 3


    나희덕

 

 

여기에 내리고

거기에는 내리지 않는 비

당신은 그렇게 먼 곳에 있습니다

지게도 없이

자기가 자기를 버리러 가는 길

길가의 풀들이나 스치며 걷다 보면

발 끝에 쟁쟁 깨지는 슬픔의 돌멩이 몇 개

그것마저 내려놓고 가는 길

오로지 젖지 않는 마음 하나

어느 나무그늘 아래 부려두고 계신가요

여기에 밤새 비 내려

내 마음 시린 줄도 모르고 비에 젖었습니다

젖는 마음과 젖지 않는 마음의 거리

그렇게 먼 곳에서

다만 두 손 비비며 중얼거리는 말

그 무엇으로도 돌아오지 말기를

거기에 별빛으로나 그대 총총 뜨기를

 



 

그런 저녁이 있다

 

 

저물 무렵

무심히 어른거리는 개천의 물무늬며

하늘 한구석 뒤엉킨

하루살이떼의 마지막 혼돈이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바라보려 한다

 

뜨거웠던 대지가 몸을 식히는 소리며

바람이 푸른 빛으로 지나가는 소리며

둑방의 꽃들이

차마 입을 다무는 소리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들으려 한다

 

어둠이 빛을 지우며 내게로 오는 동안

나무의 나이테를

내 속에도 둥글게 새겨넣으며

가만 가만히 거기 서 있으려 한다

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한 어둠 하나

옹이로 박힐 때까지

 

예전의 그 길, 이제는 끊어져

무성해진 수풀더미 앞에 하냥 서 있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포기의 노래

 

 

네 물줄기 마르는 날까지

폭포여, 나를 내리쳐라

너의 매를 종일 맞겠다

일어설 여유도 없이

아프다 말할 겨를도 없이

내려꽂혀라, 거기에 짓눌리는

울음으로 울음으로만 대답하겠다

이 바위틈에 뿌리 내려

너를 본 것이

나를 영영 눈뜰 수 없게 하여도,

그대로 푸른 멍이 되어도 좋다

 

네 몸은 얼마나 또 아플 것이냐

 

 

 

살아 있어야 할 이유

 

 

가슴의 피를 조금씩 식게 하고

차가운 손으로 제 가슴을 문질러

온갖 열망과 푸른 고집들 가라앉히며

단 한 순간 타오르다 사라지는 이여

 

스스로 떠난다는 것이

저리도 눈부시고 환한 일이라고

땅에 뒹굴면서도 말하는 이여

 

한번은 제 슬픔의 무게에 물들고

붉은 석양에 다시 물들며

저물어가는 그대, 그러나 나는

 

저물고 싶지를 않습니다

모든 것이 떨어져내리는 시절이라 하지만

푸르죽죽한 빛으로 오그라들면서

이렇게 떨면서라도

내 안의 물기 내어줄 수 없습니다

 

눅눅한 유월의 독기를 견디며 피어나던

그 여름 때늦은 진달래처럼



  

떨기나무 덤불 있다면

 

 

내가 기대어 살아온 것은 정작

허기에 불과했던 것일까

 

채우면 이내 사라지는, 허나

다시 배고픈 영혼이 되어

무언가를 불러대던 소리, 눈빛, 몸짓, 저 냄새

 

내가 사랑한 모든 것은

그런 지푸라기에 붙인 불꽃이었을까

 

그러나 허기가 아니었다면

한 눈빛

어떤 눈빛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

한 손이 다른 손을 잡을 수는 있었을까

 

허기로 견디던 한 시절은 가고, 이제

밥그릇을 받아놓고도 식욕이 동하지 않는 시대

발자국조차 남길 수 없는 자갈밭 같은 시대

거기 메아리를 얻지 못한 소리들만 갈앉아

뜨겁게 자갈을 달구는 시대

 

불타도 사라지지 않는 떨기나무 덤불 있다면

그 앞에 신이라도 벗어야겠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그리로 그리로 기울고 싶다

 

나희덕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창비, 1994)




20070302134806197050752.jpg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 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그러나 꽃보다도 적게 산 나여』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산문집『반통의 물』 등
김수영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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