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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가난한 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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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김용호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479회 작성일 25-04-04 00:10

본문

노년의 가난한 평등

국어 선생님의 부고가 날아왔다. 경기고등학교 십년 선배이기도 한
선생님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모교로 왔다.

하얀 얼굴에 검은 뿔테안경을 쓴 귀공자 같은 선생님은
전형적인 수재타입이었다.
선생님은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이었다.
현대문학상 등 굵직굵직한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젊은 선생님 부부는 서울에서 흔하지 않던
아파트에 살았다.
부러웠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다.

세월이 흘렀다.
나는 혼자만의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소설을 쓰고 있었다.
나는 첫 소설집을 선생님께 보냈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나의 사무실로 찾아오셨다.
어느새 선생님의 머리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려 있었다.

“자네가 보내준 소설집을 꼼꼼이 다 읽어봤는데 복선이
좀 부족하더라구. 그걸 보충하면 좋은 작품이 나오겠어.”

“지금도 시를 쓰세요?”

내가 물었다.

“아들이 노트북을 사줘서 지금도 시를 쓰지.
내면에서 떠오르는 시를 뽑아내지 않으면 변비가 걸린 느낌이야.
여러 편 써 뒀어.
그런데 돈이 없어 시집은 내지 못하고 있어. 지금은 변두리의
작은 아파트에서 집사람하고 둘이 살아. 한 달 한 달 생활이 걱정이지.
개척교회 목사인 외아들에게 손을 내밀 수도 없고.”

선생님은 늙으면서 가난해 진 것 같다.
일찍 퇴직해서 연금도 없다고 했다.
나는 서너 명의 제자들과 함께 시집을 내드렸다.
시집이 나오는 날 선생님은 정말 좋아하셨다.

그때부터 다시 십칠년의 세월이 흐르고 부고장이 날아왔다.
부고장에는 ‘85세’라고 나이가 적혀 있었다.
선생님의 기나긴 노년은 가난의 고통이었다는 말이 전해져 왔다.

선생님 같은 가난의 내리막길을 가는 게 십년 후 우리의
모습이라는 글을 올린 동창이 있다. 수명이 늘어나 오래 산다는 것은
좋기만 한 것일까.
기나긴 적막한 노년에 가난이라는 반갑지 않은 친구가 찾아오는 것 같다.

명문 학교를 나오고 좋은 직장에 다녔다는 사실은 잠시 나타났다
스러진 신기루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높은 자리도 마찬가지다.
기나긴 세월에서 가난은 누구에게나 물 같이 스며든다.
십 여 년 전 법정대기실에서 만났던 한 변호사의 이런 말이 떠오른다.

“검사장을 마치고 변호사를 한지 9년째 됩니다.
벌어놓은 게 없어 이 법정 저 법정 옮겨 다니면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검사장 다 소용없어요. 일장춘몽이죠.”

그는 힘이 빠지고 가난해지고 있었다.

몇 년 전 지하철 교대역에서 우연히 군 복무 때 상관이던 장군을 만났다.
육군 대장을 마치고 대사도 하고 대학총장을 지내기도 한 분이다.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얼마 전에 장군들 모임에 갔었는데 모두들 밥 한끼 살 돈이 없이
가난해졌더라구. 그게 장군 출신들의 노년이요.”

노년은 가난의 평등이 이루어지는 시기인 것 같다.

서울법대를 나오고 미국 유학을 하고 박사를 한 친구가 주차 관리원을
하다가 쫓겨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서울법대를 나오고 평생을 고시 낭인으로 지내면서 지하철 행상을 하는
사람의 가난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칠십대인 나는 또래의 가난을 너무 흔하게 본다. 인생은 ‘생노병사’의
고해라고 하는데 수명이 연장된 세상에서 가난이 하나
더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노인은 더 이상 가난의 물결을 거스를 힘이 없다.
옛부터 나라도 가난은 해결해 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종교는 어떤 길을 제시해 주었을까.
부처는 서른 다섯 살에 깨달음을 얻고 누더기 옷을 걸치고 맨발로
사십오년간 돌아다녔다.
가난과 고난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무소유의 생활이었다.

하느님도 이 세상에 가장 가난한 한 인간으로 들어왔다.
머리 둘 곳조차 없이 가난했다.
그러면서 가난한 사람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두운 그늘에서 숨죽인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단테가 묘사한
지옥의 장면들이 낯설지 않다. 단테는 지옥에서 연옥으로 빠져나간다.
이 세상도 목적지가 아니라 천국으로 가기 위한 훈련소인가?
나이가 들어가는 탓인지는 몰라도 주어진 여건을 정직하게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수용하는 쪽으로 돌아가고 있다.

노년의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과 받아들임이 아닐까.
마지막 인생이 나뭇가지 위에 매달린 낙엽 신세라면 떨어지는
자리를 묻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

출처 : 엄상익 변호사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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