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수 시 <천년의 하루> 외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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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하루 외 2편
- 내소사
김진수
죽어서도 닿기 어렵다는,
능가산 발치에 입맞춤하듯 엎드렸더니
변산 바람꽃이 수줍은 웃음으로 맞는다
피안교, 마지막으로 건너야 할 강폭이 딱 이만큼인가?
큰 걸음으로 예닐곱 떼어놓으니 저쪽인가 싶은,
한 시절 고운 자태 입에 오르내리던 벚나무
둥치에 든 세월 겹겹이어도 다시금 꽃피울 봄날을 밀어 올린다
천왕문 들어서니
사천왕이 저마다의 표정으로 으름장이라 도망치듯 문지방을 넘는다
생긴 대로 놓인,
크기 또한 제멋대로인 대웅보전과 봉래루의 주춧돌
별자리처럼 틀고 앉아
천연덕스럽게 휘고 이어진 기둥 받들어 섬김이 천 년이 하루 같다
대웅보전에 들어 비어 있다는 포(包) 한 자리 찾았으나
나도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음인가 헛되다
부처님 뒤편 없는 듯 계신 백의관음보살
마주친 내 눈빛으로
숨어 지내야 하는 한(恨), 한 줌 덜어내시려나?
호랑이와 파랑새, 흐린 눈에는 보이지 않아
다음을 기약하며 산문을 나서니 들어갈 때 보지 못한
일주문 밖 당산 할배 큰기침으로 부른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할매 두고 까맣게 애 끓일,
지척이라 하나 하늘과 땅이라
오가지 못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이
그나마 다행이다 싶어
잡은 여인의 손이 따뜻하다
고란사
터전이 오목하고 외지다
밤새 절벽을 두드린 강물의 손이 시퍼렇고 비릿한 갯내가 물씬하다 긴긴밤 노거수에 빌붙어 쪽잠 잔 늙은 바람이 뒤란을 돌아 나오며 연신 희끗희끗한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마치 나 좀 봐 달란 듯이, 짐작하건대 석간수 몇 바가지 퍼마셨을 것이다 묵례를 주고받은 강물과 바람은 허구한 날 늦는 볕을 기다린다 한 시진을 기다려 도착한 볕은 벌어진 문 틈새를 헤집고 들어 그분을 뵙는다 볕에서는 싸구려 지분 냄새가 났다 셋이 만나면 무엇을, 어찌할 거라는 걸 아는 추녀 끝 청동 물고기 눈 흘기며 쫑알거린다
뒤란 석간수, 그 옛날 기꺼이 제 목숨 버린 꽃들의 눈물이지 싶다 그 눈물이 젊음의 묘약이라니 아이러니하다 샘 위 절벽 틈에 빌붙어 산다는 고란초 질긴 생명은 씻기지 않는 한이지 싶으나 눈에 담지 못함이 아쉽다
때마침 우는, 절벽에 부딪혀 되돌아 나와 강을 건너는 범종 소리 법의(法衣) 아래 드러난 맨발이 시리다
물, 바람, 빛의 협연이 시작되자 윤슬이 젖은 머리 털며 일어서는
오방색은 늪이었으니
단청은
작은 숲 하나 들이는 일이다
귀 기울이면 새 소리 바람 소리 들릴 듯하여
오방색은
나무고 풀이며 바위에다 졸졸거리는 물이기도 하고 살랑거리는 바람이다
코흘리개 적 어머니 손 잡고 처음 가 본 산사
온통 알록달록 오방색이었다
댓돌에 올라 활짝 핀 연화 문살 꽃잎 뜯어 날리던
아이, 그날 가슴에 눌어붙어
헤어나려 하면 할수록 끄집고 들어가는
오방색, 섬뜩한 경외심이었고 늪이었다
어린 아들에게 색의 오묘함을 안겨준 어머니도
내겐 늪이었으니
곁에 있으나 없으나
내 마음 끌어 잡고 놓지 않는다
목숨도,
지혜도 헤아릴 수 없는
늪이다
바라볼수록 아득하게 빠져드는
―김진수 시집, 『닿은 연만으로도 한 생이 환하겠다』 (상상인, 2026)

강원도 주문진 출생
2016년 《시와세계》 등단
시집 『설핏』 『꿈 아닌 꿈』 『닿은 연만으로도 한 생이 환하겠다』
동시집 『달을 세 개나 먹었다』 등
2023년 백교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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