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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은 시 <적면>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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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65회 작성일 26-03-17 16:25

본문

적면(覿面) 4

 

     강영은

 


그림자를 등에 진 벽()을 본다.

벽면에 담긴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말 걸지 말아줘,

나는 지금, 눈앞에 놓인 장면과 씨름하는 중이야.

 

낮게 드리워진 햇살이 창날처럼

벽을 찌른다.

 

그림자와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등줄기가 뜨거워지고 심장이 벽을 두드릴 때까지.

 

철새 몇 마리,

어두워져 가는 하늘을 끌고 간다.

눈물을 닦아주는 손수건처럼.

 

모든 배경에는 고통이 숨어 있다.

 

노을 지는 하늘 너머에

또 다른 하늘이 스며든다.

 

길어진 그림자가 벽을 비워낸다.

나는 그림자와 하나가 된다.

 

정면을 마주한다는 것은 무너뜨리는 일이 아니라

함께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그 벽과 맞서는 일이

삶을 견디는 또 하나의 방식이라는 것을.

 

옥상 난간에 생각을 세웠던 날,

벽 너머를 보았다.  

 

 

베가(Vega)

 

 

네가 쥐고 있는 건

돌멩이뿐이지만

 

네가 나를 겨냥했을 때

나는 이미 눈부신 빛을 지니고 있었다.

 

네가 돌을 던졌다는 걸

믿지 않았다.

 

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다만 눈이 부셨다.

 

첫사랑이여!

 

네 이름을 부르는 순간마다

얼마나 많은 기쁨이 그림자가 되었나.

 

네 그림자는 내 어깨까지 자라서

밤마다 별빛을 흔들었다.

 

나의 모든 것을 움켜쥔 너,

끝내 사라지지 않는 너.

 

나는 너의 시작이 아니었으나

너는 나의 모든 시작이었다.

 

너는 내 노래의 심장.

 

네가 남긴 눈부심 속에서

나의 한 생은 그림자를 이끌며 걸어간다. 

 


 

사막 고래

 

 

  4천만 년을 네 발로 땅을 걸었다는 고래 화석이 오쿠카헤(Ocucaje)* 사막에서 발견되었다.

 

  뜨거운 모래벌판을 지나던 커다란 몸뚱어리가 언제, 어떻게, 물속으로 사라졌는지 알지 못하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래의 발자국이 나를 모래밭으로 이끈다.

 

  엄마와 함께 갔던 그 모래밭에는 네 발로 걷던 내 발자국이 들어 있고 해류에 휩쓸린 모래언덕엔 

그날의 갯바위가 남아 있는데

 

  출렁이는 물살에 드러눕던 어머니, 하늘로 돌아간 발자국은 디딘 깊이가 다르다.

 

  기원이 같은 죽음이 가만히 내 속으로 와 모래알을 굴리는 밤, 고개 들어 하늘을 본다. 하늘에도 발자

국을 묻어둔 사막이 있는 걸까?

 

  터벅터벅 걸어가는 고래 발자국, 젖을 물리는 포유동물의 별자리가 눈동자 속으로 툭 굴러 떨어진다.

 

  언제까지나 너와 함께 걸을 거야, 울타리 없는 사막, 내 마음의 폐허에 어미 고래의 숨이 가만히 발자

국을 눌러 새긴다.

 

  그리움은 어디서나 단단하게 굳은 족적을 남긴다.

 

  *페루의 사막 지명

 

 

 

어느 애연가(愛煙家)의 고백

 

 

초겨울 저녁,

연초(煙草이파리 같은 별이 떴다.

 

애련(愛戀)저 별 따다

폐 깊숙이 쌓인 독기를 걷어 가 줘,

두 손으로 눈을 비벼도 보이지 않던

네가 내게 와 닿게.

 

사랑한다사랑한다.

심장을 누르는 문장들은 지워 줘,

사약 같은 말에 길들지 않게.

담배밭 가장자리에서 나눴던

첫 키스그때를 기억해?

 

쓰린 입술에 낯선 향이 번지고

용기 대신

무모를 끌어안았던 네 마음 내 마음에도

오늘 같은 별이 떴지.

 

사랑인지 습관인지 구분 못 하던 밤들.

그때 그 입술로 돌아가 고백할 거야,

이제그만 만나자.

 

하지만 나는 알아

하늘의 재처럼 부스러질 나를,

 

초겨울 저녁,

폐로 드나들던 네 이름을 불러 본다.

네 이름이 왜 애련이었는지

오늘은 알 것 같다.

 

쉽게 잊히지 않는

네 이름을 입술에서 떼어낸다.

 

성냥불을 끈다.

채 익지 못해 떨어진 이삭처럼

()과 연(사이,

떨림이 먼저 사그라든다.

 

 


 

미망(未忘)

 

 

내가 가장 가고 싶은 집은

당신 있는 집.

 

그러나 내게 남은 것은

당신 없는 집빈집.

 

빈집에 들어선다.

 

아내라는 이름을 지우고

여자라는 외투도 벗어 던진다.

 

당신을 찾아 헤매는 바람 소리일까,

문풍지가 달달 떨린다.

 

창호지를 덧바른 문을 여니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나도 없는 빈집.

 

아니다나는 한 번도

나를 비운 적 없다.

 

불 꺼진 방마다

먼저 눕는 것은 마음이다.

 

우편물도발소리도 닿지 못하는

마음은 먼 곳,

 

그리움도문풍지에 머문 나도

멀어서 가지 못한다.

 

어디에 있을까,

당신 있는 집. 

 

계간 시와사람》 2026년 봄호 신작 소시집

  


  

 

제주 출생 

제주교육대학 졸업
2000년 계간 《미네르바 》등단
시집 『스스로 우는 꽃잎 』『 나는 구름에 걸려 넘어진 적이 있다』
『최초의 그늘』 『풀등, 바다의 등』 『마고의 항아리』 상냥한 시론

너머의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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