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점 시 <봄은 전화선을 타고 온다>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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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전화선을 타고 온다 외 4편
박홍점
죽은 것들조차도 부산해져서
막무가내로 밀고 나오는 손톱들 머리카락들
눌러대는 손가락들
하루 종일 전화벨이 마디를 늘려가며 울린다
새롭게 시작해보겠다고 손 내밀어 잡아끄는, 빛나는 눈동자들
그들은 나를 물관으로
꽃 한 송이 피워보겠다고 안달이다
너한테 흘려줄 한 줌의 물방울도 없어,
건초 같은 머리칼, 주름살을 들이민다
집에 머무를 수가 없다
공원 벤치에 앉아 근심 어린 손금을 들여다본다
이곳은 안전지대인가 묻고 대답하다가
.
그냥 걸었어……
.
햇살이 좋아서……
.
살아 있구나……
우울증 보이는 어둠에 잠겨 있는 나를 내가
불러내고 만 것이다
봄은 아슬아슬하다
동백꽃이 부르다
초경을 시작한 아이들이 귓속말을 하며 수줍게 웃는다 아직 필까 말까 망설이던 꽃봉오리가 별안간 헐떡이며 터진다 일제히 터지지 않고 옆에서 옆으로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저희끼리 소리를 주고받는다 수많은 아이들이 문을 열고 뛰쳐나온다 꽃이 피려고 또 밤이 온다
그녀를 부른다 그녀와 나는 내장에 이것저것 집어넣듯 순대를 먹고 밥을 먹고 국을 먹고 마지막으로 붉은 꽃을 나누어 먹고 꽃 속 햇살을 바람을 아직도 물 뚝뚝 듣는 샘을 마시고 소곤대다가, 그녀는 돌아가고 나는 꼭 해야 할 말을 잊은 것 같아 뭐였더라, 뭐였더라 뒤적거리며 내내 서성이는데,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아가처럼 생긋 웃는 동백 한 그루, 사람이 꽃을 부르고 꽃이 꽃을 부르고 꽃이 또 사람을 부른다 아주 먼 곳에서 옷자락을 끌며 다시 그녀가 그가 그이가 온다
풀의 공법으로
맥없이 키만 자란 풀이 흔들린다
아무것도 감고 오르지 못해 사소한 바람에도 휘청거린다
처음엔 이파리만 흔들리다가 나중엔 줄기까지 흔들린다
흔들림에 취한 듯 온몸이 흔들린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용쓰지 않고 물 흐르듯 흔들린다
풀은 흔들리다가 흔들리다가 꽃이 핀다
꽃이 필 때면 풍선처럼 가벼워져 더욱더 흔들린다
풀은 저희끼리 몸 부비면서도 순간, 순간 흔들린다
때로는 제 흔들리는 줄도 모르고 흔들린다
흔들릴 때마다 깊은 곳에서 굵어지는 것이 있다
단단해지는 것이 있다
불끈 쥐고 버티는 갈퀴 같은 손이 자라고 있다
자라고 또 자라도
풀은 흔들리는 힘으로 끝까지 나무가 되지 않는다
어떠한 폭풍우에도 우드득 부러지지 않는다
뿌리 뽑히지 않는다
풀은 버석버석 말라서도 선 채로 흔들린다
죽지 않았다고 끝까지 서걱거린다
언제나 언니
그는 언제나 집안의 흥 반장
동생이 여섯
베틀에 앉아 뚝딱뚝딱 베를 짜고
동생들 머리를 감겨 주고 묶어 주고
아모레 화장품 가방을 들고 골골이 찾아다닐 때
그의 어깨는 오른쪽으로 기울고
오만 원짜리 지폐를 택시 창밖으로 내던지고
어린 조카 미미의 집 커튼을 달고
사계절이 있듯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네 번의 쉼표와 네 번의 마침표
그는 과연 누굴 사랑했을까
미끈한 다리로 미니스커트를 입고
용두산 엘레지를 익숙하게 부르고
그는 언제나 집안의 흥 반장
사랑하는 조카가 열여섯
이제는 돌아와 6인실 요양병원 침상에 누웠다
집안의 역사였던 그가 창밖 단풍나무 쪽으로 돌아눕는다
가을비는 연거푸 한낮의 길을 지우고
앞차의 전조등을 지운다
석류
웃음 가득한 방
그라나다의 거리를 불러낸다
두 팔이 생략된 청색 원피스를 불러온다
이국의 도시에서 별안간 너와 나는 혈맹을 맺고
너는 쏟아질 것 같은 치아를 드러내 놓고 곧잘 웃는다
네 삶에서 한 줄도 유용하지 않은 시나 소설 속 문장들
쉽게 열광하지만 내일이면 잊어버리는 사람과 풍경들
오늘은 사랑했지만 내일은 잘 모르겠다는 표정
너의 민낯은 수인사보다 먼저 붉다
―박홍점 시집, 『차가운 식사』(서정시학, 2006), 『언제나 언니』 (파란, 2023) 등
전남 보성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차가운 식사』 『피스타치오의 표정』 『언제나 언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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