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세라 시 <개망초>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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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망초 외 4편
최세라
걸었다 잘게 흔들리는 풀꽃 너머로
네가 잠깐 보이다 사라졌고
사거리엔 망초꽃들이 시들어가고 있었다
먼지와 콜타르 반죽이 눌어붙은
담뱃재와 찢어진 필터가 흩뿌려진
저 꽃들, 창백하게 사라져 가는 것들 심장을 가진 적 없는 것들 나는 오명처럼 걸었다 오탈자처럼 걸었다 발 밑에선 지구만 한 공허가 자전했지만 거짓말처럼 하루는 조금의 오차도 없이 빽빽했다
풀꽃 너머 사라진 너를 찾아 헤맸다 너는 이 땅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는 너의 오랜 번역이지만
이 파괴의 세상에서 너는 어떻게 몸이 되나 그 눈빛과 떨림이 목숨을 빚어내나
개망초, 라고 부르면 살아서 돌아온 이의 이름이 빛났다
너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둘레가 깊어지고 있었다
―계간 《생명과 문학》 2025년 가을호
공유합니다
손바닥에 모이를 놓아
다친 새를 기르는 노파를 본다
새의 성한 한쪽 눈은
아무런 대상도 뜻도 없이 공중에 띄워진 공
공을 함께 안고 싶은 마음들이 공원에 모여든다
더운 숨이 섞이는 한겨울의 대기
얇은 책 속에서 무수한 눈동자와 만나는 텍스트
이런 것들을 공유합니다
완경이 된 여자의 피 흘릴 일 없는 한밤을
서두르지 않아도 잡아탈 수 있는 막차의 느린 바퀴를
아낌없이 공유합니다
회복되는 새를 들여다보던 사람들이 아! 하고 일제히 탄성을 지르면
뒤늦게 떠오른 생각처럼 위로 뿜어지는 구름
언젠간 이런 것도 공유합니다
네가 방금 손으로 써서 건네준 편지
두 손바닥 위에서 구겨진 종이가 차츰 펴지는
―계간 《생명과 문학》 2025년 가을호
밤의 유리창의 일부
우린 알게 돼 언니, 놀이터 모서리에 앉아 흙모래를 쥐었다 펼 때 알게 된다 흐르는 모래보다 손바닥에 들러붙은 모래알이 생에 가깝다는 것
구멍 많은 돌 조각은 울음이 얽은 자리라는 것
손 안에 잔존하는 모래는 곧 올 내세를 구성한다는 것
어두운 눈동자 속에서
언니의 손을 놓쳤지
나는 걸었다 걷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안쪽을 계속 걸었다
시소에 앉으면 왜 맞은편으로 건너갈 수 없을까 이곳에서 누르면 저쪽에선 기울고 저쪽에 잔존하면 손바닥이 증발했다
내가 흔적이라 부르는 우묵한 바닥을 언니는 흉터라 불렀다
국적이라 부르는 걸 체류가 금지된 타국이라고
돌아와, 두 팔을 내밀어 허공을 감싸 안으면
사람만 한 모래시계가 낱낱의 모래알로 떨어져 내렸다
견딜 수 없는 잠이 밀려왔다
바닥에 퍼덕이는 나방은 날아다니는 커다란 눈동자 무늬를 갖고 있었다 눈 속의 펄럭임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밤은 서서히 찾아왔고
망가진 그네가 제자리에서 회전하는 동안
나의 이번 생은 언니의 몸을 입고 계속 깨어나는 얕은 꿈
―웹진 《시인광장》 2026년 4월호
고양이를 볼 때 천사를 믿는다
두 개의 촛불처럼 눈동자가 흔들린다
같은 시공간에서
고양이는 동물계를 나는 인간계를 살았다
냄비에 눈송이 끓는 소리를 내며 고양이가 기대 온다
그릉그릉 물에 젖은 공간이 열린다
고양이는 동물계의 발톱으로 현관에서 가장 잘 보이는 벽지를 긁어 놓았다
나는 인간계의 이빨과 혀로 고양이를 야단쳤다
털이 티슥티슥하고 꼬리가 뭉텅 잘린 길고양이를 본 적이 있었는데 계속 울며 전봇대 주위를 뒤지고 있었다 고양이에게도 소유라는 게 있을까
깨진 접시 조각이 방금 전 가졌던 둥그럼을 소유하듯
이해하지 못하는 기도문을 외우며
천사라고 부르면
울컥 기울어지는 게 있어서
자꾸 서려고 하는 고양이를 안는다
고양이는 아주 정교한 보일러처럼 내 목구멍에 뜨거운 호스를 밀어넣는다
방안에 오줌이 퍼진다
나는 온 방안을 더듬는다
네 개의 발로 기며 바닥에 코를 대고 킁킁거린다
방금 전까지 소유했던
따스함을 되찾기 위해
고양이를 볼 때면 천사를 믿는다
나는 동물계를 살게 된다
―계간 《시와 경계》 2024년 여름호
조금 덜 어두운 검정
병약한 이모의 모든 걸 닮고 싶었다 이모의 길고 흐린 손가락을 볼 때면 무명실처럼 초라해졌다 집안에 들여놓은 화초들은 추위에도 잘 자랐지만 귀엽게 생기지 못한 길고양이가 겨울을 못 넘기고 죽었을 때 이모는 가파른 계단을 끝도 없이 내려가 머리빗을 만들었다 가끔 이불 속에서 전화를 받는 소리와 거는 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월급날엔 이불을 뒤집어쓰고 본드가 거멓게 눌어붙은 손가락으로 지폐를 셌다 이모의 뒤를 밟으며 남자가 따라온 적이 있었고 빗 공장을 그만둔 날이 있었다 피혁 공장으로 옮겨간 뒤엔 온몸이 빨갛게 염색됐다 이모가 나을 때까진 무명실처럼 초라한 채 살고 싶었지만
시간이 끝나 버린 이모의 코에서 검붉은 물이 번져 내 살에 닿았다
이모의 자취방에서 가져온 화분은 연탄불 옆에서도 잘 자랐다
―계간 《시와 경계》 2024년 여름호

1973년 서울 출생
2011년 《시와반시》 등단
시집 『복화술사의 거리』,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 『콜센터 유감』
2021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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