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라율 시 <파도의 감정> 외 4편
페이지 정보
작성자본문
파도의 감정 외 4편
권라율
여름도 여름이랑 사이가 좋아야 해요
김정 씨랬죠? 김정 씨, 생각은 파도를 타죠
김정 씨가 굴러요 돌돌
몇 달 아니 몇 년 끙끙 밀린 연차가
달려가는 달력이 달달 시계가 흘낏
소금사막이나 빙하는 진작 품절이고
영어도 못 하고 할랄 음식도 모르면서
그저 구를 만큼 구르고 싶어서
파도와 한 몸으로 조는 붉은가슴도요
생각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라서
만국기 휘날리는 유람선 갑판 뒤에 올라탄
먼지 낀 동네 버스처럼
차창 가까이 날아드는 불빛에
이물감으로 흔들려요
홍학의 부리나 들소 뿔의 파편
흰 산봉우리를 기어가는 설표의 꼬리뼈
가끔 캐리어 속 번뜩이는 칼날들
깊숙이 넣어둔 조약돌 몇 개
퇴근길 당신은
뜨거운 낮에 든 서늘한 목덜미에 화들짝
밤낮이 서로 먼 날이네
당신은 턱까지 지퍼를 올리고 단추를 채우며
허리 버클 떨어진 줄도 모르고
구겨진 잠은 주말로 접어두고
맥주 한 캔에 다시 펼쳐 보자 할 때
돌돌 툴툴 구르며 어느 선창가
후미진 호텔로 들어가는 캐리어 하나
아무 방이나 주세요
당신은 마른 빵 한 조각으로
오줌내 나는 바닥으로 앉아
비로소 캐리어를 열어보려는데
수천수만 킬로미터 밖에서도
꾹 다문 입술의 여권과 꾹꾹 따라온
여름 저녁이라는 감정
오로라를 보러 갈 걸 그랬지?
오로라에는 여름 감정이 없다는 듯
딴전을 피우는 김정 씨
극야의 눈동자는 별의 미간만큼이나 멀어서
신은 목덜미에서 허리춤에서 자꾸 흘러내린대요
하늘이 맥없이 툭, 떨어지면
느린 목 근육을 키워야지
벽을 가로지르는 바퀴벌레의 다리 힘처럼
성경이나 코란 불경에 있는지는 모르겠는데요
김정 씨, 소뇌 대뇌에도
운동장이 있어 지퍼를 열면 빛과 구름 바람이
우르르 쏟아진다더군요?
하늘만 한 운동장에서
떨어지지 않는 눈동자와 눈동자 사이를 줄곧
온 우주가 달려온 거라면요?
먼지 날리듯
홍학 부리가 차창에 부딪히듯
설표가 당신이 돌진해가는 거라면요?
캐리어 속에서요 무한한
김정 씨, 돌아서 어느 여름 중이신가요?
세 시에는 세 시의 눈동자가
다섯 시에는 다섯 시의 눈동자가
성운 사이 흩날리면서
―2026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심상보 씨의 일
진해가 보이지 않는다 곧 출발 시간, 시계가 심상보 씨를 남의 일처럼 본다 일단 내려서 저녁 식당을 찾는다 진해가 없다 없다 저만치 금빛으로 반짝이는 진해를 향해 손을 흔든다 뛴다 뛰다가 뒤에서 누군가 바닥에 떨어진 이름을 주워 준다 점점 똑똑해지는 진해를 보며 심상보 씨는 다시 표를 끊는다
진해요? 진해는 아직 출발도 하지 않았어요
귀에서 재깍재깍, 시계는 아까부터 스스로의 힘으로 달리고 있다 어떤 진해가 진짜 진해일까 심상보 씨는 중얼거린다 북경이나 태평양으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진해는 열심히 가고 있다
심상보 씨는 오늘도 진해를 본다 어쩐지 진해는 남몰래 피를 흘리고 있을 것 같다 버찌를 짓이기며 여기저기 벚꽃 팡파르가 울리다가 차표가 풍경을 놓친다 진해를 믿기로 한다 네 생각이 난다 마산에서 내려야 할 것 같은 기분, 한번 닫힌 문은 열리지 않는다 요청된 문을 박차고 싶다 자리에서 일어서지 좀 마세요, 산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바닷물이 끓어 넘치다가 태양이 꺼졌다가 켜졌다가 눈발이 내렸다가 그쳤다가
저 멀리 보이는 항구를
내려요, 안내방송에 허둥지둥 심상보 씨, 한낮은 덥고 지나가는 개 한 마리 없다 소변을 누고 나오니 덜덜거리며 출발을 기다리는 배기통
진해, 진해
매초마다 오고 있다
남산타워
침묵 속 어둠이 환한 밤이었다
저 위에서 센서를 깔아주고 간 누군가가 소곤거리는 듯했다
칸막이마다
없는 소리가 화면으로 울려 퍼져
색색의 빛을 밝히고
보이지 않아도 미소를 짓고 있는 음성이었다
그는 누워 있었다
안이 훤히 비치는 관람차를 타고
커다란 눈으로 보이지 않는 회전축을 따라 도는
지구와 위성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행성들은 서로를 밀어내듯 끌어당기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기도 했다
아가미 없는 물고기처럼
띠를 두른 행성을 막 지나는 중이었다
관람차를 탄 이들이 마음속 불빛을 보고 있을 때
그는 누워 있었다
홀로 눈발이 몽환적으로 쏟아지는 세상이었다
거대한 관람차가
서서히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판타지
이 성에서는
누군가를 죽이면
반드시 누군가 죽을 거라는
예언이 있었습니다
돌을 들여다봅니다
돌에 볼을 대어 봅니다
돌에 발을 그려봅니다
제법 친해 보입니다
차갑고 단단한
입김을 불면서
누군가 돌에 구멍을 냅니다
들어갈 데가 없어서
채워진 채로 흐르는 당신 뺨을 때립니다
나아갑니다
원형경기장에서는
실제인 것처럼 부끄러웠습니다
사자도 투우사도 없었지만요
제발 홀로그램이기를 중얼거리며
그냥 앞으로 가고 있어요
진행되는 함성에 둘러싸여서
내가 뒷걸음치며
악수하면서 벌거벗으며 거리를
돌아나올 때
돌이 돌을 바라봅니다
이 성곽에서는
무리에서 빠져나온 돌을 부르면
따라서 돌이 된다고 합니다
네, 예언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성곽 속에서 우는 신도 수긍했습니다
말하는 그 입 속에서 모래알이 떨어지고 있었으므로
나는 당신의 붉어진 뺨이 진실이라고
일단 생각하기로 합니다
옆집
옆집과 나는 운동복 차림이다
쓰레기봉투를 들고
이어폰을 누르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오르내리므로
대화는 연속되거나 불연속된다
옆집의 그다음이 기억나지 않아서
늘 처음으로 돌아가서 타게 된다
붉은 숫자가 올라올 때까지
침묵 속에서
언제 버릴까
보이지 않는 쓰레기봉투가 넘친다
세상의 모든 옆집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생각한다
옆집은 늘 쓰레기를 버리러 가고
그 옆집은 앵무새와 대화를 하고
그 옆집은 아이와 반응 인형 놀이를 하고
전쟁놀이를 하고
이웃은 옆집이 우체부거나 은행원이거나
철인 3종 선수거나 마피아이거나
상관없어서
쌓인다
반응이 없는
흘러넘치는 우편함 틈으로 손가락을 끝까지 밀어넣는다
깜깜해서 보이지 않는다
옆집이 옆집이라는 증거물이 되지 않는다
바깥에서 보면
구석구석 쌓인 옆집의 몸에 불이 켜지기도 한다
세상의 옆집과는 2인 이상 탑승할 수 있으므로
잘 모르는 나를 껴안고 잘 모르는 당신과
인사한다
분류할 조건이 쌓인다
앞집과 뒷집은 모르는
다정한 묵례를 한다
절대적인 괄호가 겹치면
입사각끼리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티브이를 켜는데
옆집이 티브이에 나와
내가 흘려둔 남의 이야기를 증언하고 있다
나도 모르게 반사각이었다

경북 영양 출생
2026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
2026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소감
김정 씨,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군요. 고백하자면 신문사로부터 당선 전화를 받은 날 밤, 저는 한숨도 못 자고 희망과 절망으로 허우적댔습니다. 당신이 생각났어요. 우리가 만났을 때는 여름이었지요. 겨울이기도 했습니다.
우린 처음 만난 사이답게 적당히 즐거웠고 적당히 조심스러웠습니다. 대화 주제는 생생한 것이었어요. 늘 그러하듯 잘할 수 있는 일과 잘해 내어야 하는 일을 자문해야 했어요.
내심 삶이라든가 죽음 같은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어서 뿌듯했습니다. 열심히 설명하고 열심히 들었어요. 우린 끝내 다정했어요. 전 구직자였고 당신은 상담사였으니까요. 혹은 저는 상담사였고 당신은 구직자였습니다.
난데없는 것에 대해 생각해요. 사람이나 여행이나 난데없이 오니까요. 이번 일만 해도 그래요. 대책 없어서 빛나는 누더기도 있는가 봐요.
광주일보 관계자분들과 부족한 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양가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 선생님들과 문우들 소중한 남편에게 저의 마음을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오늘도 자신을 응대하기 위해 타인을 경청하는, 세상의 모든 김정 씨께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시 당선자 권라율
▲경북 영양 출생
▲동국대 경주캠퍼스 국어국문학과 졸업
2026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심사평
국내외로 여전히 불안정한 시국이 이어지고 있다. 이 모든 ‘불안’은 그 ‘끝’을 기다릴 수 있는 일시적 ‘변수’가 아니게 되었다. 이제 받아들여야 할 일상의 일단이다. 이번 응모작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특히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에 대해서는, 시적 표현과 상상력의 아름다움이 극대화될 수 있는 언어의 ‘전시실’을 얼마나 개성적인 설계로 구축하고 있는가를 보다 집중적으로 살폈다. 그 과정에서 남은 작품은 ‘파도의 감정’, ‘유령의 목록’, ‘튤립’이었다. ‘튤립’의 응모자는 그 언술 속에 유희성 짙은 특유의 리듬이 깊이 배어있었다. 그것은 단지 흥을 돋우는 운율의 층위가 아니라, 이미지의 확장으로 탐미적인 시공간을 만들어 낼 만큼의 힘이 있었다. ‘유령의 목록’의 응모자는 현실과 우화 사이 절묘한 위치에 시공간을 구축할 줄 안다. 가령 “7층과 8층 사이” 7.5층에 멈춘 승강기의 공간이다. 응모작 중에서 ‘유령의 목록’에 특히 주목했다. 섬광과 함께 남겨진 “빈 의자” 위에 구르고 있는 “펜 하나”의 이미지는 쓸쓸한 삶과 죽음의 선연한 잔해였다.
당선작으로 ‘파도의 감정’을 선정했다. 시의 외관은 가벼운 돛배 같았지만 묵직한 닻을 질질 끌고 나아가는 느낌이었다. 최종심의 다른 응모자들처럼 자신만의 색깔로 시공간을 경쾌하게 구축하고 있다는 점과 함께 한 가지 더 눈길이 가는 점이 있었다. 시라는 형식이 미지의 “오로라”를 향해 여행하는 돛이라면, 돛을 올린 바로 그 자리에 현실의 “여름”을 닻처럼 깊이 내리고 있었다. 그 무겁고 차가운 닻은 현실 세계와 미적 세계 사이에 균열을 내며 박혀 있다. 그 균열 속에서의 첨예한 균형감각이 다른 응모자에 비해 조금 더 주목되는 점이었다. 더구나 금도끼 은도끼 같은 그의 닻은 다른 응모작 속에서도 “딥시크”, “산성비”, “비관세 장벽” 등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어 든든했다. 그 넓고 깊은 여행을 계속하시길 바란다.
김중일 시인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현대시작품상, 신동엽문학상 등 다수
▲광주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