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초 시 <디아스포라> 외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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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외 2편
이형초
우리에게 박물관이 생긴다면
입구는 화물차처럼 만들자 좁은 열차에 갇혀 초원을 가로질렀던 순간처럼 긴 철로를 지나 부모를 만나러 가고 싶다 척박한 평야에서 씨앗을 뿌리고 토굴을 짓고 새를 잡아먹으며 봄이 오기를 기다렸던
먼 사람들의 이야기
흠뻑 젖은 곡괭이와 밤의 나뭇가지들
따뜻한 진열창에 넣어두자 우연한 행인처럼 그곳을 지나치며 우리의 역사래,
러시아어로 중얼거릴 것이다 유리창 사이로 언어와 계절이 바뀌고
러시아인도 카자흐인도 한국인도 아닌
무국적자의 밤이 쌓이는 곳 비가 오든 눈이 내리든 자신들만의 농장을 만들었답니다, 말하던 큐레이터는 사실 그들의 가족이고, 새벽마다 불을 밝히는 경비원은 자기 이름 대신 그들의 이름을 외우던
가득 찬 박물관 모두 연결된 사람들
텅 비어 있어도 가득 찼다고 믿으면
어디든 둘러볼 곳은 있지
결국 우리는 같은 출구로 나갈 테니까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에서 사람은 늘 몰려든다 어디에서 불어온 눈바람이 머리가 되고 어디에서 쌓인 눈송이가 몸이 되는지
몰라도 좋은 박물관, 다 사라져도 기억해 주는 이야기, 우리에게 박물관이 생긴다면
그냥 걷기로 해
마음보다 몸이 먼저 앞선 곳엔
정말 내 마음이 없는지 궁금해
우리는 우산과 핫팩만 들고 바다로 도망쳤지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딱 삼 분만 기다렸다
단 삼 분이면 우리는 카레도 먹을 수 있고 핫팩을 뜨겁게 데울 수 있고
두고 온 것을 잊기에도 적당한 순간이지
폭죽 소리는 빛이 터지고 난 뒤에 들리기 마련이고
비는 늘 우산을 펼치기 전에 바닥에 닿아
너는 인간의 마음이 뒤늦게 펼쳐지는 모양과 닮았다고 한다
그것참 물에 띄우기 쉽구나
오리의 물갈퀴를 가졌구나
눈을 반쯤 감은 수평선엔 가느다란 도로가 있고
사람들은 비가 내려도 불꽃을 쏘지
어둠 속에서 빛이 터지듯 삶은 탄생했다고 믿었는데
우리는 다리 밑에서 태어났고 바다는 그때처럼 차갑고
사람들이 불꽃놀이를 하는 이유는 한순간 사라지는 빛을 보기 위해서라고
크루즈에서 엄마를 껴안은 채 낙조를 구경하는 아이를 보며
너는 저 아이의 생이 우리보다 더 일찍 출발한 것뿐이라고 말한다
생각 없이 걷다 보면 문득 무언가를 깨닫듯
그 기민한 것이 불안을 잠시 지워주듯
그냥 걷기로 해
서쪽엔 바다가 낮게 일렁이고 동쪽엔 모래와 흰 집들이 있으니까
저 멀리 흩어지는 불꽃의 잔해들이 마음의 잔상 같을 때
눈보라는 뜨겁고 세상은 걸음처럼 엇갈려
우리는 서로를 지운 채 보폭을 맞추며 걸었다
― 2026 신춘문예 당선 시집
실명
이 가상안경을 벗으면
방금 본 장면은 신속하게 흩어질 수 있다
호숫가에서 아이가 허우적거리고 작은 배에 탄 여자가 아이를 지나치고 있었다
여자는 방관하고 새들은 사라지고
나의 배도 아이에게 가까워지는 중이었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밀도 있게 짜인 숲의 구조와
자연에 속하지 않은 물결 소리와
기계에 대해 생각하느라
아이는 죽어간다
안경 너머 전시장엔
사람들이 입을 살짝 벌린 채
저것 좀 봐……
벽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고
호숫가의 영상은 작은 유리알 속에서 끝없이 되풀이되어서
이러다 우리는 몽땅 깨질 수 있겠다는 생각
아이의 영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이에 대해 말하기를 멈출 수 없다
죽음에 대한 상상은 안경알처럼 정교해서
두 눈을 가려도 너무 멀리 바라보게 되고
우리는 눈을 자주 잃어버려서
몸도 마음도 어두워진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다고, 헤드셋에서 누군가 속삭인다
옆을 보려고 고개를 돌리면 아무도 없다
눈 먼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무어라 중얼거리는 오디오와 함께 작은 배가 거칠게 흔들린다
호수에 빠지는 것이 두려워 몸을 숙인다
진짜 같았어?
현실과 현실 아닌 것을 구분하지 못해서
흠뻑 젖을 것 같은
안경을 벗은 사람들이 유리문을 활짝 열고
비스듬하게 흩어지는 빛 속으로
화면이 꺼진다
아이가 물밑으로 가라앉고 여자의 뒷모습이 희미해질 때
내가 손을 뻗고 있던 곳은
환하게 열린 문틈
모두가 서로를 비껴가며 인도 위로 흩어지고 있었다
― 문장웹진 2026년 4월호

2001년 목포 출생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202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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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소감
작년 겨울, 이사를 했습니다. 화분을 들이고 새 커튼을 달며 집 안에 온기를 채웠습니다. 고향을 떠나 낯선 세상을 마주하는 일은 외롭지만, 동시에 감사한 일이기도 합니다. 나를 더 새롭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텅 빈 세상 앞에 서 있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시를 썼습니다. 가득 찼다고 믿으면, 어디든 다시 둘러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제 소식을 듣고 저보다 더 많이 울어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큰 축복일까요. 나의 기쁨을 온전히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 꿈은 결코 혼자 이룬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길을 닦아주었기에 저는 전력을 다해 달릴 수 있었습니다. 저와 이별했던 사람들에게도 다시 한번 손을 내밀고 싶습니다. 함께, 각자의 자리에서 잘 살아가고 싶습니다.
언제나 저를 믿어주신 천수호 선생님과 안도현 선생님께 가장 먼저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몇 번의 실패 앞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2023년 12월, 서로의 편지를 나눠 읽으며 펑펑 울었던 수진, 은지, 민이 그리고 스터디 멤버들. 앞으로도 저와 계속 글을 써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선 연락을 받았던 날, 어머니의 꿈에 할아버지가 나오셨다고 합니다. 두꺼운 봉투 속에 편지가 여러 장 들어 있었다고요. 아마도 지혜롭게 살아온 어머니의 삶이 적혀 있었을 것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께 제일 감사합니다. 부모님의 따뜻한 언어 속에서 저는 시인이 되었습니다.
잘 쓸 자신은 없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을 자신은 있습니다. 부끄럽지 않게, 그러나 멈추지 않고 쓰겠습니다.
△2001년 목포 출생 △단국대 문예창작과 졸업
◆ 2026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심사평
숙련된 솜씨로 역사적 상상력에 시적 사유 버무려
이번 본심에는 특이사항이 2개 있었다. 첫째, 이례적으로 응모작이 많이 늘었다고 들었으나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이 예년에 비해 썩 만족스럽지만은 않았다. 그래서인지 심사위원 두 명이 최종 고려 대상으로 들고 온 2명의 작품이 처음부터 일치했다. 다른 응모자들의 작품과 현격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명의 작품은 충분히 수일했다. 최종적으로 검토된 것은 ‘눈사람’ 외 4편과 ‘디아스포라’ 외 4편이었다. 둘 중 어느 작품이 당선작이 되더라도 충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 심사위원들은 재독과 숙고를 거듭했다.
‘ 눈사람’은 깊은 사유와 단정한 문장이 인상적이었고 “사람을 안으면 자꾸만 녹았습니다”라는 마지막 구절이 시 전체를 잘 마무리하며 시적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는 점에서 당선에 근접했다. ‘디아스포라’는 활달한 상상력과 더불어 사유를 시적 플롯을 통해 알맞게 조직하는 데 있어 숙련된 솜씨를 선보였다. 매끄럽지 않은 대목이 없었고 시 전체가 환기시키는 디아스포라적 상상력 역시 생경한 관념이나 강변 없이 적실하고 진중하게 전달되었다.
심사위원들은 두 작품 모두 당선에 값한다는 판단을 공유했지만 역사적 상상력에 가닿는 시적 상상력의 규모와 넓이, 그리고 예컨대, 시의 제목과도 맥락이 닿는, “우리에게 박물관이 생긴다면//입구는 화물차처럼 만들자”라는 표현에 담긴 재기 역시 손색이 없다는 것에 동의하면서 ‘디아스포라’를 올해의 당선작으로 내밀기로 결정했다. 만족스러운 마음 그리고 큰 기대와 더불어 축하의 악수를 건넨다.정호승 시인·
조강석 문학평론가(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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