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우 시 <조금 늦었지만 괜찮아>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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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늦었지만 괜찮아 외 4편
연 우
조카만의 규칙
보이지 않는 선을 그려놓고 나는 넘어오지 말라고 한다 아이들은 동시에 여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오른손은 송곳니 없는 개의 입 왼손에는 칼을 쥔다 아직 울지 마요 이모가 바라는 걸 구해올게요 말한다
무엇을 구해올 거니?
할머니를 구해올 거예요
어디에서?
할머니 안에서요
나는 등뼈 하나를 놓친다
데구르르 굴러가다 고모가 밟고 넘어진다
고모는 우울증 환자라 실비도 없는데 큰일 났대요
울지 않는 아이들은 씩씩하게
옷장 속에서 튀어나오고 쌓아둔 방석 위로 뛰어내린다 정말 용감하구나
그 안에 뭐가 있었니?
방금 전까지
할머니가
더 낮게
허리를 접는다
무너지지 않게 손끝으로
아이의 말 밑을 받친다
조카는 벽을 두드린다
벽이 아니라 뻥 뚫린 초원을
할머니를 내놔!
두 주먹이 하얗다
그러면 뱀처럼 얇고 길어진 할머니가 쑥 하고 튀어나올 것처럼
아이는 뛰어다니며 모든
사람들의 표정에 대해 간섭한다
조카가 손가락질하면 다들 입을 뗀다
밥맛이 좋군요
비가 오지 않네요
그제야 주변이 생겨난 것처럼
조카는 옆 호실에 뛰어들어갔다가 하얀 그릇을 손에 쥐고 나온다 그건 돌려줘야 한단다 하지만 어른들이 내게 쥐여 줬어요 밥을 꼭꼭 씹어먹으라고 했어요
아이는 수저로 식탁을 두드리다
가장 아낀다는 분홍 스티커를 할머니 사진에 붙인다
내가 정말 아끼던 사람이었어요…
아이니까요
아이니까
그래서 더 무섭다
조카가 내 등을 두드린다 무언가가
쑥
뼛속에서 나오려는 것처럼
나는 무릎을 모으고
작아진다
그제야 조카가
기쁜 얼굴로 나를 안아 준다
―2026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괄호
우리는 커다란 벽 안에서 살았다 그곳엔 해변도 불도 있고 바람도 불었다
소금기가 벤 몸을 맞대며 함께 식사를 하고 잠에 들고
깨어나면 가장 먼저 서로의 작은 얼굴을 더듬었다
내가 된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야
19세기 아프리카 대륙의 분단만큼
어려워
우리를 우리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세심한 구분이 필요했지만
그것이 일직선의 국경 같은 걸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집은 어디에 있지?
가장 어린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해변가에서 모래를 쌓았다
작은 모래성
바닷물이 밀려오고 빠져나갈 때마다 잠시 형태를 유지하는
무언가를 지키고 싶을 때는 그것이 무너지는 모습을 상상하면 안 돼
우리는 집에 대해 궁금해졌다 어린 우리는 집의 구조와 수많은 전류의 작동을 이해할 수 없다 벽과 지붕과 바닥이라는 삼요소의 건축물 그러나 그 많은 자재를 어디서 구하지
집이 무너질 땐 무엇이 먼저 꺼지는지
우리는 싸웠고 화내거나 우는 날들이 이어졌다 해안가로 망가진 기계와 신이 함께 떠내려왔을 때 우리는 집을 부수기로 했다
집을 훼손하기 위해서 집을 오독했다
똥통 판자때기 거대한 구멍 구닥다리 썩은 계란
외칠수록 외로워졌다
불이 불이기를 포기할 때까지 곁에서 몸을 데웠다
우리는 조도에 따라 달라지는 표정을 가지고
매일 같은 놀이에도 다른 규칙을 붙였다
통통한 관자놀이는 영혼의 주머니라고 믿었다
누군가 집이 어디니 물으면
우리는 집이 없다고 말하며 벽 너머를 가리켰다
가끔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지나치기도 했다
―2026 신춘문예 당선시집
한 번만 더
감당할 수 있는 슬픔까지만 이야기하기
셔틀콕이 공중에 머무를 동안
너와 나는 그것이 떨어질 위치를 가늠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바닥과 맞닿는 순간을 지연시키기 위해
체육관 강당에 누워 있으면 바닥의 박동이 들려
다른 크기와 모양의 발들이 만들어내는
우리의 사이로 떨어지는 셔틀콕
이건 허락할 수 있는 장면
결혼 같은 걸 해 보면 어때
검은 머리가 하얗게 세는 것을 바라보는 거
함께 손의 물기가 마르지 않는 날이 연속된다면
망가진 가구와 가전제품쯤은 한숨 한 번 쉬고 넘길 수 있다면
강당 문을 열고 들어온 아이가
땀 냄새를 풍기며 너의 품에 안긴다
자신을 닮은 아이를 보며
너는 내가 닿지 못할 미래를 완성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그곳까지
다시 시작하기
너와 나는 물비린내를 맡으며 개천가를 걷는다 언젠가 너는 가출을 하고 저 다리 밑에서 새우잠을 잔 적 있다고 한다 나이 든 노숙자들이 빈 술병을 껴안으며 가는 풍경이다 잘 갔을까 그들의 목적지를 떠올릴 수 없고
너는 다리 밑에서
발견되기 위해 몸을 웅크린 채로 오랫동안 기다린다
멈춰 있는 시간처럼 보여서
그 모습을 오래 지켜본다
너는 자신을 닮은 아이를 낳았을 것이다
그 아이가 자라서 학교에 가고 성숙해지고
다투기도 하는 순간을
나는 볼 수 없을 테고
너의 기쁨은 나의 등 뒤에서만 시작되고
딱 여기까지만 내가 바라볼 수 있는 장면
이것 좀 봐
그림자가 커지고 있어
저녁이 되면 가로등이 켜지고
불빛은
불빛으로부터 멀어지는 사람을 희미하게 만든다
너는 넓은 계단 위에 웅크리고 있던 무릎을 편다
셔틀콕이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이 계단에서 먼 길의 끝까지
고개를 돌리면
폐건물의 현수막이 펄럭인다
―2026 신춘문예 당선시집
체험
민법상 군대는 병원과 민가를 공격할 수 없다
기사를 읽은 날부터
뱃속의 공습경보가 울린다 나는 방에서 눈을 뜬다
책상에 놓인 유리컵
저건 반투명한 장기일까? 깨끗하게 씻겨진
누군가의 몸 안에 달아 줘야 하는……
파란 까마귀와 헬기가 창문을 긁고간다
나는 민가일까?
내 피부는 지붕이 될 수 있을까
두개골은 방공호의 천장일까
무거운 섬광
징조와 직전의 틈새에 엎드린다
고개를 숙이고 귀를 막는다
징조가 미래를 찌른다
숲에는 숲이 없고 연기가 된 나무들만 있는
직전은 말없이 통과된다
중요한 것을 서랍 안에서 잃어버렸는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
튀어나온 사투리가 하필 이 나라의 말이 아니게 느껴지듯
오해받기 딱 좋게
가방을 챙긴다
접시는 깨져버릴 것이다 양손으로 수프 접시를 받쳐 핥아먹는 상상 깃털은 불이 되고 사람은 무엇과 지낼 수 있지? 모래와 얼음으로 만든 방에서 눈을 뜬다 사람은 무엇이 될 수 있지?
왜 무거운 순서대로 떠내려갈까?
떠내려가면 안 되는 것들까지
깨지기 직전의 몸
가방을 뒤집는다
꿈에서 집어온 플래시 하나
빛을 쏘아도
바닥은 없다
벽이 얇아지고
내 몸이 벽이고
피부가 떨린다
가상의 날들이 맥락을 가지고 지속된다면 그것은 현실과 구분할 수 없습니다
이름을 부르면 나보다 더 미래로 가 있던 친구들
벽 뒤에 숨어 나오지 않는다
일렬로 늘어선 나무들
잎이 없다
기척이 있다
내가 있다
이미 언젠가 봤던 장면
한 아이가 손끝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광장과 텐트가 있다
사람이 보이지 않지만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흰 깃발
몸만 남는다
깨진 파편들을 쥐고
가방 속으로 들어간다
다시 꿈속에서 꺼내오기 위해
―월간 《현대문학 》 2026년 4월호
걸려 있는 하루
슬픔은 고작 일그러진 플라스틱을 닮아서
틈 사이에서 빛이 새어나온다
집집마다 현관문 앞에 물병들이 놓인다
방의 문지방들이 조금씩 내려앉아 있다
시간이 발소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혼자 식사를 차리면서
작은 접시를 둔다
낡은 집은 천천히 삐뚤어지고
베란다에는 부피 큰 빈 상자가
자꾸만 늘고
집은 사람의 손을 타지 않으면
쉽게 해져 버리는데
사람의 손을 타지 않는 사람은 어디서부터 낡아갈까
오래된 벽에 구멍을 뚫는다
못이 틀어지면서
벽을 통과한다
집은 그렇게
벽 속으로 천천히 몸을 접어 넣는다
거실에는 그런 자국들이 많이 있다
못 위에 비스듬히 걸려 있는 것처럼
하루를 끝내고 얼굴을 씻으면
얼굴에선
낡은 소파 냄새가 난다
오래오래 문질러서 반들거리는
서로가 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는
그런 가족사진은
가져 본 적이 없어서
활짝 웃어 보세요라는 말에서는
낡은 소파 냄새가 난다
긴 여름을 지날 때마다 같은 꿈을 꿨다
물을 주면 액자에서 가족이 자라나는 꿈이었다
―계간문예 2026년 봄호
1996년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연세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수료
202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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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신춘문예] 조선일보 詩 부문 당선소감
슬픔을 비눗방울로 빚는다… 그 터진 부산물이 내 詩다
죽으면 관을 들어줄 사람 여섯이 필요하다. 우리는 벌써 셋이나 있어서 다행이라고 친구가 말했다. 한 명이 죽으면 나머지 둘을 위한 하나를 계속 섭외하자는 제안도. 그 하나가 계속 이어지는 아름다운 세상을 상상했다. 그건 사랑의 방식이 분명했다.
“내가 신이라면 당신을 특히 사랑할 거야. 당신은 부당하게 불행했으니까.” 에릭 로메르 ‘겨울 이야기’의 대사다. 주위에는 부당하게 불행한 것들이 많고 그들을 사랑했지만, 나는 신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서 사랑을 소화하지 못하곤 했다. 불행을 불행으로 보존하는 힘을 조율하는 게 세계라는 걸 곧 알게 됐다.
그래서 친구들과 규칙을 만들었다. 슬플 땐 울거나 위로하면 반칙이다. 서로를 웃겨주며 슬픔을 가벼운 비눗방울로 빚는다. 높이 떠오르다 터진 비눗방울의 부산물이 나의 시였다. 여름에는 사랑하는 이들과 눈사람을 만들고 겨울에는 밤수영을 하며 세상을 역행하고 싶다. 우리가 틀렸다는 사람들에게 틀리지 않았다고 천 번 외치고 싶다. 귀신처럼 모든 틀의 밖에서 아름다우면 좋겠다. 시를 쓴 지 15년, 딱 인생의 절반이다. 모두의 애착 인형이나 애착 티셔츠가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사랑하고 시 쓸 것이다.
내적 동기를 언어로 이끌어주신 조강석 선생님, 사랑의 형태를 알려주신 김지은 선생님, 늘 응원해주신 채호기, 이원, 송종원, 김경후, 정한아, 서대경, 이영주, 희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다정한 사랑을 보여준 겸과 지리멸렬한 날들 속 서로를 읽어준 친구들도. 엄마가 좋다고 가르쳐준 건 아직도 최고라고 믿는다. 폭닥폭닥한 캐시미어와 정직한 마음 같은 것. 아버지는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고 오빠는 선함의 천재다. 변방에 있던 제 시의 등을 힘껏 밀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2026 신춘문예] 조선일보 詩 부문 심사평
독자의 마음을 '간섭'하고 '주변'을 만들기를 기대
시는 제격의 문(紋)과 문(問)과 문(門)을 담지한 언어의 그릇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생각과 마음을 헤아리고 해방시키고 이끌어내는 힘을 가진 문들 말이다. 그런 문들이 빚어내는 새로운 그릇됨, 그러니까 시됨을 가늠하는 일은 분명 설레고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다. 본심에 오른 열한 분의 작품은 역대급 응모 작품 수를 증명이라도 하듯 시적 완성도가 높았다. 최종 논의의 대상이 된 네 분의 작품은 당선작으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시적 개성과 완성도를 담보하고 있었다.
‘싱크홀’은 시적 사유와 개성이 돌올했다. 삶 속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싱크홀들, 이를테면 추락 혹은 죽음, 윤리적 파탄을 감각화해내는 시적 통찰과 사유에 힘이 있었다. 때로 설명적 진술이 아쉬웠다. ‘세이브’는 가족과 공동체의 해체적 징후를 사회적인 이슈와 연결시키는 묵직한 현실 응시의 시선이 좋았다. 시 창작의 구력이 미더웠으나, 완결된 구조가 갑갑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남은 두 분의 작품은 오랜 숙의의 과정을 거쳤다. ‘림보’는 존재와 부재, 산 자와 망혼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의 징후를 포착해내는 웅숭한 감각이 눈에 띄었다. 끝까지 고민했으나 기시감 있는 아포리즘과 비약적 진술이 마지막 낙점을 망설이게 했음을 밝혀둔다.
최종적으로 ‘조금 늦었지만 괜찮아’를 당선작으로 내놓는다. 할머니(의 죽음과 슬픔)를 구하기 위해 “옷장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조카의 활약상은 혁혁하다. ‘간섭’하면서 ‘주변’을 만들어내는 조카의 무해한 생명력과 무애한 상상력을 통제하는 정련된 메시지와 성찰은 시적 숙련과 시적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주었다. 이 새 시인이 빚어낼 시의 그릇됨이 많은 독자의 생각과 마음을 ‘간섭’하고 ‘주변’을 만들기를 기대한다.
(정끝별,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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