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향 시 <참나리꽃>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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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리꽃 외 4편
조연향
점박이 무당벌레가 점 점 점 볼따구니에 불침을 놓고 간 자국
울타리에 머리 숙인 채 숨소리도 내지 않았고 흔들리지도 않았다
여름 밤 낮 햇빛과 어둠의 비늘을 번갈아 입고
몽타주처럼 활짝 핀 아수라로 뛰쳐나와 아주 잠깐 현현하듯 활짝
그리고 다시 어둠 속에 사라져버렸다
사랑한다는 뜻도
슬픔의 파닥임도 원한의 향기도 아닌
나비 한 마리 찾아 헤매고 있는 그것
그 상징이 오늘
밤바람 스치듯 살짝 꽃의 뒤쪽으로 숨어들었다
꽃이 꽃을 건너는 동안
— 황매실
깊은 산골입니다 눈 내리고 산그늘이 지면
꽃잎마다
푸른 잎의 우산을 받쳐도 온몸이 흠씬 젖습니다
초인의 눈 속으로 운석이 흘리드는 밤
뻐꾹, 구름이 울어대고 마을에 또 무슨 일 터졌나요
천둥이 깨지고 바닷물 뒤집혀도 호랑이 이빨 자국 지우듯
정신 차려 팔랑입니다
수상한 그늘이 펄럭이고, 강물이 넘쳐흐르는 동안
제 생을 익히듯 꽃은 속내를 익힐 뿐입니다
꽃이 꽃을 건너는 동안,
새콤한 속내를 생각하는 동안
어느 날은 누군가 매화꽃 그늘에 와서 밀어를 흘리고 가고
또 어느 날은 얼굴 없는 시체가 썩어 문드러진다고
새들이 천둥 속에서 그렇게 퍼덕거렸던가요
배꼽부터 물들이는 돌연변이의 봄밤도 미친 명약입니다
숨털이 보숭보숭한 꽃열매인들 나뭇가지에 앉아
땅의 일들을 못 보았겠습니까
누가 저 꽃벌레를 살해했는지 꽃벌레가 스스로 목을 매었는지
번개가 지나도 바람은 묵비권입니다 알 수 없는 염병이 홀연히 산비탈을 휘돌아가고
풀리지 않는 의문처럼 달빛은 원시림입니다 끝내 가보지 못해도 눈에 선한 그 마을의 서사가 새콤하게 한 문장으로 익었습니다
사이를 지나갔다
하모니카 울며 지나갔다
앙상한 귀뚜라미 울음이 찌르르 퍼져 나가고 목에 매달린 동전 상자는 오히려 고요했다
반쯤 눈 내리깔아 졸던 나는
그 소리를 바라보았으나 서로의 눈빛 건너뛰었다
전철 바닥에 비친 얼굴 위 점을 치는 지팡이
툭툭 어둠을 허공에 들어올리며 통로를 지나갔다
보이지 않는 길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갔다
젖은 어깨와 마른 어깨 사이 물고기 지느러미를 밟고
오래전부터 지나갔던 길
이미 정해져 있었던 사잇길을 찾아 약수역에 서는 전철
반복되는 순서와 질서 사이 바깥의 불빛들이 뒤로 비켜섰다 백양나무 가로수들이 멀어지거나 할 때,
철벽을 울리며 귓속을 달리는 캄캄한 소리
내 눈뜬 소경이 울음소리 따라가다 덜컹 넘어지고 만다
눈꺼풀로 밀어내지 못했던 눈물이 지팡이를 타고 흘러내리는데,
지하터널을 연주하는 하모니카 하모니카를 연주하는 지하터널
보이지 않는 길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갔다
끝을 잡아당기자 공중이 휘어졌다 파릇한 떨림의 매실
새소리가 묻어 있어 더 새큰하다
나를 후려치기도 하고 품어 안기도 했다
나무 속에 휩싸인 몸이 신록으로 출렁거렸다
높은 곳에 매달린 열매를 딸 수 있는 것은
끝을 적도 가까이 떨어뜨린 둥근 각도 때문이었다
피어 있었던 꽃의 생각이 행성으로 차오르기까지
당신과 나는 흰빛을 바라보고 황홀해 했고 봄날을 따려고 수없이 뒤꿈치를 들었다 놓았다
그럴 때마다 가지는 진액의 탯줄을 떼어 놓고 싱그럽게
최초의 자리로 되돌아가곤 했을 터
벌과 나비가 뒤범벅된 꽃의 격렬한 몸부림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매화에 든 별의 중력을 견디기에는 허공이 너무 헐렁했다고 했다
더러 놓친 열매가 바닥에 뒹굴고
이제 놓아준 매실나무 가지가 한 번 더 휘청하면서
하늘 가운데 제자리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살구꽃 나무 아래서
스무 살 딸 누구랑 밀고 당기고 있다
그 도깨비 나를 보자 얼굴 붉히며 달아나고
-자꾸 내 볼에 자기 볼 한 번만 대보자 그래서
나는 싫다고 그러는 중이었어-
망둥이 같은 딸 먼저 집에 들여보낸 뒤
살구꽃 흔들리는 등불 밑에서 한참을 서 있었네
그래 물색없이 살다 가려면
저 꽃! 허공 깊은 오랜 시간에 매달려
저리도 온몸이 핏빛으로 속 아릴 때까지
이 봄을 기다리지는 않았으리
봄에 피어나서 봄을 항거하는 저 아름다운 뿔짓
꽃잎 꽃망울 모두 수상하기만 하네
누구나 한 번쯤은 혁명 같은 사랑을 꿈꾸는 것이지
한 철을 건너 한 철까지
비바람의 빈터에서
외로운 마음이 아프도록
뿔을 부비고 싶은 풋사랑의 숨결이여
저토록 높고 위태로운 가지 끝에서
새순을 틔우는 환한 이름들이여
내가 서 있는 길목은
하얗게 어지럽게 깊어만 가고
오늘 밤이 아슬아슬 하늘 끝에 매달린 꽃 속 같네
— 조연향 시집, 『토네이도 딸기』(서정시학, 2018)

경북 영천 출생
1994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2000년 《시와시학》 등단
경희대 국문과 박사
시집 『제 1초소 새들 날아가다』 『오목눈숲새 이야기』 『토네이토 딸기』 『길 위에서의 질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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