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채운 시 <연어 떼가 돌아온다는 강에서>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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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 떼가 돌아온다는 강에서 외 4편
오채운
모든 것이 선명하게 생각난다
그때 나는 강물 한가운데 서 있었다
허리까지 잠기는 물 한가운데서
물을 잡고 싶어 안달했다
움켜쥔 손에 힘을 줄수록
물은 더 멀리 달아나버렸다
뜨거운 태양 아래 내가 타던 자전거가 서 있다
그와 나는 딴 길을 걷고 있다 여기서
길을 잃으면 연어떼를 한꺼번에 놓쳐버린다
모든 것이 선명하게 살아난다
바다로 떠났다던 연어떼가 돌아오고
슬픈 맛으로 내 입에 씹히는 강물
지금 이 물을 움켜잡는 손은
떨리는 마음으로 커피 잔을 움켜잡고
얘기를 나누던 그 손이 아니다
내가 타던 자전거에 죽은 연어를 싣고
힘겹게 물 위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
지금 내가 건져낼 수 있는 건 물이 아니라
자물쇠로 굳게 잠긴 판도라의 상자이다
집
당신이 계속해서 오래 내 안에 있었으면 해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당신을 알기 전부터 내 속에 집을 짓고 있었지
당신이 좋아하는 북향의 창 앞에 책상을 들여놓고
하루 종일 햇빛이 비치지 않는 방을 가질 수 있도록
흐릿한 유리 때문에 내 밖의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도록 말야
희부윰한 창밖에서 햇빛이 넘보려 해도
당신은 365일 창문을 열지 않고
그런 당신 옆에서 오후 세 시를 견디고
방 밖에 머물지도 모를 알몸의 나를 위해
옷을 만드느라 닳아버린 당신의 손가락을 훔쳐보며
세상을 향한 모든 문을 닫아걸고
그 안에서 행복할 수 있어
당신만 생각하면 온화한 달과 해가 번갈아 떠주고
북극성은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켜
북향의 방에 머무는 나의 항로를 가르쳐주지
매 순간마다 창 앞에서 비를 기다리며
당신 속에 스며드는 맑은 빗물이 되곤 해
상상 속에서는 모든 일을 버텨낼 수 있지
계속 당신을 기다리고 비를 기다려
너덜거리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때로는 손까지 먹어치우며
창밖의 마른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며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나를 보지 못해
이곳에 방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해
처음에 당신이 나를 보고 있는 줄 몰랐어
당신이 나를 위해 방문을 열어놓은 것도 몰랐어
그 열린 문을 발견했을 땐 그저 두렵고 떨렸지
그러나 당신 속에 살기로 결심하는 순간
모든 사물과 모든 관계가 헛것이 되었어
짧은 낮잠을 청하는 것처럼 가볍게
세상을 붙잡고 있던 연줄들을 면도칼로 끊어버리고
이 지상에 태어나기 전 태아가 되기도 전의 한 점 물방울처럼
흔적 없이 당신의 자궁에 스며들고 싶었어 어머니
사람들이 나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고
살기 위해서 내가 할 일은 당신 안에 머무는 일뿐일 때
그때
오이도
누구나 꿈꿀 수 있는 일탈
오이도에 가네
참외도엔 안 가니?
수박도엔 안 가니?
친구들은 가벼운 말장난으로 놀려댔지만
이 기차의 종착역은 오이도
무엇이든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아름다운 섬은 없고 바다도 없는 곳
폐허의 쓰레기장이나
한겨울의 공사장을 떠올리며
오이도에 가네
길을 찾지 못하네
세찬 바람이 불어오네
떨어져나갈 것 같은 귀
바람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내 귀를 자르네
아아 나의 귀, 까마귀의 귀가 잘려나가네
오이도가 보이지 않네 오이도를 찾지 못하네
어둠에 묻혀 힘없이 돌아서네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해
무작정 입석버스에 오르네
지붕이 낮은 집들 사이의 골목을
버스는 허덕거리며 지나가네
어둠 속에서 입석버스 불빛에
수줍게 몸을 내미는 회색 담벼락들과
지붕 낮은 집들의 조용한 열병식
그래, 오이도
누구나 한 번 꿈꿀 수 있는 일탈
까마귀의 귀를 달고
내가 아직 어린아이였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곳
잊어야할 아픔들이 아직 생기기 전인
태아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곳
버스는 양수를 헤엄쳐가네
어른이 되어버린 낡은 내 속에 숨어 있는
그 골목의 수줍은 오이도를 향해
그리운 오뎅국수
북향의 방을 나서는 당신을 상상하며
영하의 콘크리트를 밟는 내 발은
불안한 제자리걸음만 계속한다
짓무른 뿌리 맑게 덮어줄 겨울산에 가려고
상봉 시외버스 터미널, 눈보라를 버텨내는 얇은 나무 한 그루
신발 속을 파고드는 눈꽃의 냉기에 함몰되며
굳어버린 어깨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서있는 나무들
뒤늦게 나타난 당신이 나를 끌고간 곳은
비린 냄새 낮게 흐르는 오뎅국수집
그릇 가득 바다가 출렁이고
가슴에 흘러들어온 태양이 몸속의 얼음을 녹여내는 집
그렇게 맛나게 오뎅국수를 먹다
겨울산으로 가는 차를 놓쳐버리고
도심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몸을 실으면
창문을 헤집고 들어와 웃어대는 햇살 한 줄기
결국 우린 오뎅국수 한 그릇 먹으려고 그곳엘 갔었군
그릇 속에서 비린 냄새 풍기던 어묵들
짧은 시간 쪼개어 당신은
내게 바다를 맛보게 해주려던 건 아니었는지
얼어붙어 당신에게만 머물던 내 발을 녹여
어디로든 가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지
당신은 나를 등진 버스에서 끝내 내리지 않고
내 발은 여전히 얼어붙어 누구에게도 가지 못하네
행선지가 지워진 차표를 북향의 창에 비추어보는 밤
당신과 먹던 오뎅국수 한 그릇이
그립고 그리울 뿐
내 가슴을 뚫고 나온 말들은
그의 귓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허공에서 가늘게 춤을 추다 공중분해된다
말은 튕겨져나간 척추가 되고
말은 아예 바스라져 뜨거운 뼛가루가 된다
벽제를 막 빠져나온 그 가루는
참 따뜻하고
참 빨리 식어버린다
나무 밑에 흙을 파고 정성스레 묻어도
비루한 열매 하나 맺지 못한다
일시에 무너져버리는 몸
그가 없이는 내 몸의 붕괴를 막을 수 없다
핀으로 고정할 수도 접착제로 붙일 수도 없다
바스라진 말들을 쓸어 모아 하얀 가방에 담고
먼 길을 떠나는 남자
길 끝 하늘과 바다가 갈라지는 곳에
잎이 다 져버린 나무 그림자가 보인다
남자가 떠난 자리를 옥죄어 들어오는 늪
진흙탕에 박혀 나는 중얼거린다
너와 함께라면
목까지 차오르던 진흙이 나를 완전히 집어삼킨다
죽어도 좋아
— 오채운 시집, 『모레를 먹고 자라는 나무』(천년의시작, 2009)

전북 김제 출생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한양대대학원 국문과 박사
2004년 《동서문학 》으로 등단
시집 『모래를 먹고 자라는 나무』 『소년이었던 소년』
저서 『현대시와 신체의 은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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