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남 시 <영산홍 쓰다듬으며 제암산 호랑이를 잡는다>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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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홍 쓰다듬으며 제암산 호랑이를 잡는다 외 4편
김영남
그대여, 호랑이 키울 일 있거든 내게로 오라.
세상으로 호랑이 몰고 갈 일 있거든 지금 빨리 오라.
난 한국산 호랑이, 그대에겐 아무르산 호랑이 잡아주겠다.
야생은 포악해 내 조련해서 잡아주겠다.
지혜롭고 익살스런 것 한 마리도 묶어주겠다.
호랑이는 깊은 산속에만 있는 게 아니다. 네게도 있고,
내 맘속에도 있고, 저 꽃밭 속에도 있다.
봄날 숲 속에서 태양은 또 한 마리의 호랑이.
여기에선 호랑이를
앉아서 잡고, 누워서 잡고, 하늘에서도 잡겠구나.
그러나 해 기울면 더 이상 잡을 수 없겠구나.
어스름 속에선 호랑이 아니라 추한 하이에나가 나타날 것 같아
바람 불면 한 마리가 아니고 여러 마리가 나타날 것 같아
개울 물소리만 들려도 오소소 몸 떨려 잡을 수 없겠구나.
그대여, 호랑이 보듬을 일 있거든 전라도 장흥으로 오라.
더 어둡기 전에
호랑이보다 더 큰 것을 잡고, 호랑이가 아닌 것도 잡아주겠다.
영산홍 쓰다듬으면서 붉은 여우 잡아주겠다.
모닥불 가에서처럼 제암산 영산홍 꽃밭에 앉아
잡은 여우 풀어주고…… 우리 모두 한국산 호랑이 되겠다.
으르렁댈 일 있어도 지혜롭게 발 모으고
익살스런 송곳니 세계를 향해 보여주겠다.
'아줌마'라는 말은
일단 무겁고 뚱뚱하게 들린다.
아무 옷이나 색깔이 잘 어울리고
치마에 밥풀이 묻어 있어도 어색하지 않다.
그래서 젊은 여자들은 낯설어 하지만
골목에서 아이들이 '아줌마' 하고 부르면
낯익은 얼굴이 뒤돌아본다. 그런 얼굴들이
매일매일 시장, 식당, 미장원에서 부산히 움직이다가
어두워지면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짓는다.
그렇다고 그 얼굴들을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
함부로 다루면 요즘에는 집을 팽 나가버린다.
나갔다 하면 언제 터질 줄 모르는 폭탄이 된다.
유도탄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진 못하겠지만
뭉툭한 모습을 하고도 터지면 엄청난 파괴력을 갖는다.
이웃 아저씨도 그걸 드럼통으로 여기고 두드렸다가
집이 완전히 날아가버린 적 있다.
우리 집에서도 아버지가 고렇게 두드린 적 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한 번도 터지지 않았다.
아무리 두들겨도 이 세상까지 모두 흡수해버리는
포용력 큰 불발탄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여량역에 홀로 서성이니
정선 아리랑 애정편은
여량에 아직도 흐르고 있으리.
땅에 스며 싹이 되고 줄기 되어
꽃을 계속 피우리. 피우다가 이울면
누가 따서 다시 피우리.
그대여, 저기 고개 쳐드는
민박집 담쟁이 넝쿨을 보아라.
이 고을 저 고을 오르내린 사연 있고
그 밑 완두콩 속에
여기 강가에서 여문 우리들 몸이 있구나.
경(景)아, 해오라기야, 저녁 안개야!
저 완두콩 속 그리운 텐트 위로하며
이제 난 동쪽으로 가야 하나, 서쪽으로 가야 하나?
뗏목처럼 도착한 열차는
날 태우지 않고
여량의 옛날만 싣고 떠나네.
마량항 분홍 풍선
골목이 시작되고, 골목 옆구리
파도 출렁대는 곳에 환한 창이 있다.
그 창에선 초저녁부터 김칫국 냄새가 번지고
가끔 웃음소리도 들리곤 한다. 그런데 빠져나온
웃음소리 하나가 창을 부풀게 한다.
자꾸만 부푸는 게 커다란 분홍 풍선이다.
쪼그리고 앉아 그 풍선 잡고 있으니 내가 질질 끌려간다.
끌려가 감나무에 걸려 대롱대다
바다에 빠져 죽을 것 같아 안간힘으로 버티어본다.
그러자, 갑자기 내 어머니가 나타나고 쓸쓸한 우리 집 식탁이 보인다.
식탁 너머로 내 이른 귀가를 기도해주던 상도교회 구역장님이 지나가고
복슬 강아지, 검은 고양이, 군고구마 아저씨도 지나가고……
지나가지 않아야 할 것들도 지나가고 있어
난 잡고 있던 풍선을 그만 놓아버린다.
에구머니나, 분홍 풍선이란
잠자던 것들까지 깨워 띄우는 신기한 기구.
허름한 유리창에선 더욱 높게 빛나는 밤하늘의 별.
찬 바람 불면 더욱 슬프게 펄럭이는 어선의 깃발.
난 그 풍선을 잡고 먼 나라로 가고 싶다.
항구란 배만 타는 곳이 아니라 그런 풍선을 잡고
더 따뜻하고 아늑한 나라로 출발하는 곳임을,
풍선에 바람이 빠져버리면
예서부터 흔들리는 귀환이 시작되는 곳임을
배운다, 마량항 부둣가에 고동처럼 붙어서.
고년! 하면서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비가
떠난 그녀가 좋아하던 봄비가 내린다.
삼각지에 내리고, 노량진에 내리고, 내 창에도 내린다.
내 창에 내리는 비는 지금
고년! 미운 년! 몹쓸 년! 하면서 내린다.
머리끄덩이를 잡고 끌면서…… 길게 내린다.
비가 욕을 하면서 저렇게 내리는 것은
또 처음 본다.
비가 내린다 비가
을랑이 엄마, 내 유리창에만 유독 저주스럽게 내리는 이유를 아느냐?
모른다면 아는 척이라도 하며 저 내리는 비에게 박수를 쳐라.
박수 칠 기분이 아니라면 커튼이라도 좀 쳐라.
비가 내린다 비가.
불 켜고 있기에 좋은 비가 내린다.
내소사에서 사온 촛불에 내리고, 모항 '호랑가시나무 찻집'에 내린다.
이제 비는 더 이상 내리지 않고
내 가슴속에서만 내린다.
피딱지를 뜯었다 붙였다 하면서 내린다.
재즈 음악으로도 다스리지 못할 비……
아니 재즈풍에 어울리는,
그녀가 몸을 흔들면서 내린다.
길게 신음하면서 내린다.
—김영남 시집, 『푸른 밤의 여로』(문지, 2006)

1957년 전남 장흥 출생
중앙대학교 경제학과 및 同대학교 예술대학원 졸업
19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정동진역』 『모슬포 사랑』 『푸른 밤의 여로』 『가을 파로호』 등
1998년 윤동주 문학상, 중앙문학상, 문학과창작 작품상, 현대시 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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