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승달 / 허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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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근의 아침을 여는 詩]
초승달 / 허영숙
나는 둥근 어둠을 받아 낸 봄밤의 의자다
어느 국가의 깃발에 걸린 용맹한 발톱이었거나
후미진 골목에 세워놓은 고달픈 청춘을 깎아내는 칼날이다
누군가 그늘진 마음을 아홉 자나 밀어 넣은 풍경,
나를 지나 멀리 서쪽으로 빠져나간 사람의 초저녁이다
아니다, 내가 남도의 외딴섬 동백으로 피었을 때
동박새로 앉았다가 갈 때도 못 알아보다가
이제야 나를 알아본 너의 얇은 눈썹이라 하겠다
―시마을 문예지 《시선》 2025년 겨울호
[詩 감상]
이 시는
어둠을 견디는 방식으로 빛을 말한다
초승달은 밤에 매달린 장식이 아니라
떠나간 마음이 남기고 간
가느다란 흔적이다
젊음은 깃발처럼 찢기고
골목에서는 칼날처럼 닳아가지만
그 모든 상처 위에 달은 조용히 걸린다
동백으로 피었다가
동박새의 눈에도 들지 못한 시간들,
그 무심한 계절을 지나
마침내 누군가의 눈썹으로 불릴 때
비로소 존재가 된다
이 시는 늦게 알아보는 사랑과
늦어서 더 아픈 저녁을
따뜻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양현근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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