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경계를 넘는다 / 정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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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경계를 넘는다 / 정한용
목숨은 길마다 몸을 풀어 놓는다, 콩새들이 허공에 금을 긋는 것이 묵은 유언을 집행하기 위함이듯, 망초풀이 봄마다 강둑을 물들이는 것도 천근 바람을 새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당신과 나 사이가 기억조차 아득해졌다, 다시, 몸을 포갤 만큼 가까워졌다, 다시,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한 채 돌아섰다, 이제, 소용없다, 그곳 주소까지
만년 전 씨앗이 오늘 새로 움을 틔웠다, 곧, 그렁그렁 눈물 같은 흰 꽃 매달 것이다, 우리가 다졌던 서원들도, 어김없이 반역이 되어 흔痕을 남길 것이고, 그것은 DNA에 적힌 밀지가 되어, 다시 만년 뒤로 넘어갈 것이다, 가슴 미어지지만, 향기까지 적셔 훗날을 기약한다면 나, 미욱해도 좋다, 당신 있던 자리, 그대로
[감상]
이 시는 멀어짐으로 가까워지는 법을 배운다.
콩새가 허공에 긋는 실선 위로 씨앗—움—흰 꽃—향기,
한 생의 서사가 조용히 개화한다.
“다시,”라는 짧은 고리마다 강둑의 날숨이 들고난다.
머뭇거리는 쉼표들은 물수제비처럼 건너뛰며
부재의 자리를 손바닥으로 더듬는다.
그대로, 라는 마지막 음절은 체념이 아니라
따뜻함이 식지 않도록 덮어 두는 덮개에 가깝다.
자연어와 현대의 어휘가 맞닿을 때, DNA와 일기장 사이로
미세한 꽃가루가 흘러 관계의 시간표가 바뀐다.
경계는 높아지지만, 향기는 담장을 모른다.
꽃은 국경을 통과할 때 여권 대신 냄새를 꺼내 보이고,
우리는 그 향을 맡으며 서로의 오래된 이름을 호출한다.
그래서 이 시의 주체는 꽃이면서, 우리다.
(글 / 양현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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