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양나무 숲에 들어 / 고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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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나무 숲에 들어 / 고두현
나도 알몸이 된다
희고 미끈한 허리
서로 닿지 않을 만큼
이 절묘한 간격
밤 깊어 새벽 별 조는 사이
몰래 오줌 누는 처녀 옆에 빙 돌아선
울타리처럼 온 숲이 몸을 가리더니
그 속에서 가장 젊은 나무 하나
다른 나무에게 가만가만
몸 부비는 모습
밤마다 그렇게 돌아가며
한 그루씩 아이를 낳는다는 걸
백양나무 숲에 알몸으로 든 뒤
나는 보았다
왜 나무들이 저만큼의 간격으로
떨어져 서 있는지
햇살이 서걱서걱 그 사이를
벌려 놓는 한낮에는
어떻게 잔뿌리들이 땅 속에서
은밀하게 손 뻗는지
그 속에서 밤을 새운
뒤에야 알았다.
― 고두현 시집, 『달의 뒷면을 보다』(민음사, 2015)
[시감상]
알몸의 감각으로 숲 앞에 서면 백양나무는 빛으로 눈금을 긋고
서로를 절묘한 간격에 세운다.
침범하지 않음으로 가까워지는 법, 잎맥이 먼저 예의를 가르친다.
낮의 숲은 울타리, 단정한 경계,
밤이면 말이 바뀌어 몸이 기억하는 언어로 아이를 예비한다.
겉으론 떨어져 있어도 땅 아래선 잔뿌리의 손들이 맞잡는다.
보이지 않는 연대가 보이는 거리를 지탱하고, 시의 목소리는
그 사이를 번역한다.
깨달음은 늘 체험의 뒤편에서 오고, 우리는 멀찍이 서서
더 깊이 이어지는 역설을 배운다.
이 숲은 풍경이 아니라 윤리다.
(글 / 양현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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