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밖의 시간 / 김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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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밖의 시간 / 김혜주
닫혀있던 자리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나는 나의 폐허였다
부스러진 나뭇잎에는 녹색의 뒷모습이 남아 있다
떠나간 손이 쥐어 준 흔적
돌아가야만 기다릴 수 있다는
조용한 타협
마르면서 자라나던 눈물이
능금을 훔쳐 먹은 자의 원죄같이 배어 있다
짐승의 울음소리로 자라나고
찔레의 매운 향기로 돋아난다
가까이 있던 것들은 점점 멀어지고
너의 간절함은 나의 절실이기도 하였는데
언젠가 반드시
나는 나에게
아름다운 부고를 내고 싶었다
―김혜주 시집, 『B플렛』 (리토피아, 2025)
[시 감상]
이 시는 제목부터 이미 시간을 한 번 더 접어 넣습니다.
시제 <시간 밖의 시간>은 시계를 벗어난 시간이 아니라, 상처가 머무는 방식으로서의 시간,
끝나지 않는 현재, 혹은 되감기와 정지가 뒤섞인 내면의 기상(氣象)처럼 읽힙니다.
닫혀 있던 자리에서 소리가 난다는 건, 잊었다고 믿었던 아픔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지요.
“나는 나의 폐허였다”는 말이 서늘하지만, 그 서늘함이 오히려 진짜입니다.
부스러진 나뭇잎에 남은 “녹색의 뒷모습”은, 떠난 뒤에야 보이는 생의 잔빛 같습니다.
떠나간 손이 쥐어 준 흔적은 위로라기보다, 자꾸 만져지는 부재의 온도로 남고,
“돌아가야만 기다릴 수 있다”는 구절은 조용하지만 깊습니다.
기다림은 앞으로만 향하는 게 아니라,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 마음을 놓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마르면서 자라나는 눈물, 원죄처럼 배어 있는 슬픔,
이 시의 슬픔은 말보다 먼저 울음과 향기로 자랍니다.
짐승의 울음, 찔레의 매운 향기 같은 것들로요.
가까운 것들이 멀어지는 동안,
너의 간절함이 내 절실함이 되었다는 고백은
사랑이 남기는 가장 아픈 진실을 건드립니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 “아름다운 부고”.
그건 죽음이 아니라, 낡은 나를 정성껏 떠나보내고
새로운 나로 다시 살아가고 싶다는 조용한 다짐처럼 들립니다.
(글 / 양현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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