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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현근 시인의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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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니 / 이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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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99회 작성일 26-01-03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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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니

   ―어떤 사랑이랄 것도 없는 사랑 이야기

 

        이덕규

 

 

박선자 말인가,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집 맏딸 박선자, 동생이 여섯이었던

박선자, 쥐약과 감기약을 구분 못해 쥐약을 먹고 아버지가 죽은 박선자, 와루바시처럼

비쩍 마른 엄마 대신 집안일 도맡아 하던 박선자, 빈속에 종일 진달래 따먹고 울며

뒹굴던 박선자, 살구를 따먹다가 앞집 명식이한테 얻어맞은 박선자, 명식이를 패주고

살구 두 알을 쥐여준 박선자, 가끔 애들 도시락을 뺏어준 박선자, 집에서 보리쌀을

훔쳐다준 박선자, 열네 살에 다마 공장 공순이로 간 박선자, 울타리 밑에 숨어서

날리던 휘파람 소리를 끝끝내 못 들은 척하던 박선자, 공장 기숙사 담장을 넘어들어가

만나고 온 박선자, 평화시장 미싱 시다로 간 박선자, 스무 살 어느 날 불쑥 찾아와

자장면을 사준 박선자, 그때 자장면을 처음 먹어봤다는 박선자, 못생긴 박선자, 병신

같은 박선자, 웃는 게 꼭 우는 것 같은 박선자, 사람들 많은 데선 숨도 못 쉬던 박선자,

동생들 학비 대주다가 오십이 훌쩍 넘어버린, 이제는 고향에 오지 않는 박선자,

박선자, 이제는 고향에 오지 않는데도 해마다 봄이 되면 들판에 줄지어 떼 지어 손잡고

몰려나오는 저 나쁜 꽃 새끼들…… 꽃구경 가자 박 선 자!

 

이덕규 시집, 놈이었습니다(문학동네, 2015)

 

 

[시 감상]

 

이 시는 사랑이라는 말을 꺼내놓고도,

끝내 그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박선자라는 이름이 문장마다 되풀이될수록,

한 사람의 생이 호명 속에서 닳아갑니다.

가난과 굴욕과 노동과 책임이 숨 돌릴 틈 없이 이어지고,

그 끝에 남는 건 사랑보다 먼저 오는 미안함입니다.

쥐약처럼 어처구니없는 죽음의 그림자, 보리쌀을 훔쳐 쥐여주던 손,

담장을 넘던 밤과 평화시장의 바늘,

그 장면들은 서사가 아니라 삶의 체온입니다.

자장면을 처음 먹어봤다는 한마디는 눈물보다 정확하게 가난을 증언하고,

웃는 게 꼭 우는 것 같은얼굴은

오래 참은 시간이 만든 상처의 표정입니다.

동생들 학비를 대주다 오십을 훌쩍 넘긴 세월은

헌신이라는 말로도, 사랑이라는 말로도 쉽게 정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의 나쁜 꽃 새끼들이 더 아립니다.

봄의 아름다움이 선자를 자꾸 불러내니, 아름다움조차 원망이 됩니다.

꽃구경 가자 박 선 자!”는 초대가 아니라 부재를 향해 던지는 외침,

오지 않는 사람에게 계절이 대신 대답해버리는 잔인한 다정함입니다.

이 시는 사랑이란, 늦게야 알아채는 미안함의 다른 이름임을 보여줍니다.

(글 / 양현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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