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포 /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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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근 시인의 詩 감상]
만리포 / 정호승
오죽하면 천리포에 있는 너를 만나러
만리포까지 가서 기다리겠느냐
너를 기다리는 일이 나의 일생이 되어
나는 파도 소리에 완전히 귀가 멀었다
바다의 눈부신 포말 흰 물결에
내 푸른 눈마저 어두워지기 전에
너는 성난 파도의 그림으로 달려오라
지금은 맑은 기도의 시간
무릎을 꿇고 이미 흘러가버린
인생의 시간 앞에 엎드려 속죄하는 시간
거짓으로 진실을 이기려고 했던
진실의 얼굴에 때로는 침을 뱉었던
용서받을 수 없는 용서를 청하는 시간
서로가 서로를 배반함으로써
우리는 사랑의 영원을 배반했으나
오래 썰물을 배반하고 밀물이 질 때
모든 배반의 사랑을 데리고 밀물처럼 오라
오죽하면 천리포의 수평선에 앉아 있는 네가 그리워
만리포의 수평선이 되어 기다리겠느냐
―정호승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창비, 2022)
[詩 감상]
파도는 귀를 닫게 하지만
기다림은 감각을 안쪽으로 이끕니다.
이 시에서 만리포는 지명이 아닙니다.
한 사람에게 이르기 위해
자기 생을 끝까지 늘여놓은 거리입니다.
기도는 신을 향하지 않습니다.
이미 흘러가버린 시간 앞에서
몸을 낮추는 행위에 가깝습니다.
배반과 속죄가 겹쳐 밀려오는 자리에서
사랑은 먼저 썰물이 되어
되돌아올 길을 남겨둡니다.
수평선은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다림은
끝내 한 사람의 자리가 됩니다.
사랑은 도착이 아니라
끝까지 머무는 선택임을
이 시는 낮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글 / 양현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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