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 이성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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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근의 아침을 여는 시]
폭설 / 이성목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할 일이 없어 길을 걸었고
길 위에 내리는 눈도 할 일이 없어 보였다
눈을 맞는 길도 할 일이 없는 것 같았다
눈이 나를 따라오기도 하고
내가 눈의 꽁무니를 밟고 가기도 했다
눈 밟는 소리가 좋다고 눈이
한 뼘 더 내려야겠다고 했다
나는 할 일이 없었으므로
나도 눈 밟는 소리가 좋다고 했다
길도 끝나는 게 싫어선지 자꾸
골목을 돌아서 가느라 시간이 늦었다
어디로 가기로 한 것도 아닌데
시간이 늦었다고 눈은
길을 더 먼 곳으로 밀었다
길은 기꺼웠고 나는 걸었다
할 일이 없어 뽀드득 뽀드득 걸었다
할 일이 없는 눈이 내렸으므로
우리는 모두 할 일이 없었다
할 일이 없으니 그만
자야만 할 것 같던 밤이었다
그러자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잠결에도 눈은 할 일이 없어 자꾸 내리고
할 일이 없어 길마저 들어간 다음에도
나무 위로 지붕 위로 눈은
할 일 없이 자꾸 내린 것 같았다
아침이 무슨 할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왔지만
30년 만의 폭설이라고 뉴스가 쏟아졌지만
길은 길 위에서
눈은 눈 속에서
나는 이불 아래서 생각을 주물럭거렸을 뿐
우리는 모두
아무 할 일이 없었다
―이성목 시집, 『함박눈이라는 슬픔』
[詩 감상]
폭설!
하얀 무위(無爲)의 만찬입니다.
세상이 정해준 목적지를 잃어버린 날,
눈과 길과 나는 비로소 다정한 유랑자가 됩니다.
"할 일이 없다"는 고백은 게으름이 아니라,
존재가 존재에게 건네는 가장 순수한 안부입니다.
눈은 나의 발소리가 좋아 한 뼘 더 몸을 부풀리고,
길은 헤어지기 아쉬워 자꾸만 굽이돌아 시간을 늦춥니다.
뽀드득, 뽀드득. 그 고요한 소리는
어쩌면 우리가 잊고 살았던 가장 아름다운 노래일지 모릅니다.
30년 만의 폭설이라는 세상의 소란 너머로,
시인은 이불 속에서 생각을 조용히 주물럭거립니다.
아침이 '할 일'을 들고 서둘러 문을 두드려도,
온통 하얘진 세상은 우리에게 나직이 속삭입니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하다"고.
폭설은 차가운 재난이 아니라, 잠시 멈춰 서서
서로의 꽁무니를 밟아보라는 하늘이 내려준
가장 따뜻하고 하얀 쉼표입니다.
(글 / 양현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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