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 안시아
페이지 정보
작성자본문
[양현근의 아침을 여는 詩]
오후 / 안시아
책상 끝 동전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제법 멀찍한 곳까지 온 몸으로 또르르 길을 낸다
마지막 힘을 다해 원을 그리다가
또 하나의 원으로 끝내 눕는다
연산기호같이 셈해지던 나날들,
창틈으로 햇살이 아득히 녹슬어 있는 기억을 비출 때
동전은 어떤 해답으로 이곳까지 거슬러 왔을까
손끝으로 동전을 줍다가 그만 놓치고 만다
바닥의 중심을 퉁겨내며 굴러가는 동전,
때론 가장 절박한 순간이 生의 궤적을 그린다
가만히 주워 올린 손끝에서 또다시
낭떠러지가 되는 오후,
한껏 차 오른 봄날이 위태롭다
컴퓨터 모니터는 이따금씩 보호색을 띄며
갖가지 모양의 도형을 빙글빙글 돌린다
책상 귀퉁이 싸인펜이 휴지뭉텅이에
검은 노을을 풀어낸지 얼마나 되었을까
창 밖, 자전거 바퀴가 길을 일으켜 세우며
언덕을 오르고 있다
[詩 감상]
굴러가는 궤적이 그려낸 정오의 수직선
책상 끝에서 떨어진 동전 하나가 정적을 깨우며 시를 엽니다. 시인은 단순히 물건이 떨어지는 찰나를 넘어, 그것이 온몸으로 바닥에 ‘길을 내는’ 처절한 동력을 응시합니다. 연산기호처럼 건조하게 셈해지던 매일의 반복 속에서, 동전이 그리는 원은 가장 절박한 순간에야 비로소 완성되는 생의 치열한 지도와 닮아 있습니다.
아득히 녹슬어가는 햇살과 휴지 뭉텅이에 번지는 싸인펜의 ‘검은 노을’은 무기력한 오후의 권태를 서늘한 아름다움으로 치환합니다. 싸인펜이 남기는 발자국을 검은 노을로 바라보는 시인의 상상력이 삶의 권태마저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게 합니다. 가슴 복판에 차오른 봄날조차 위태로워 보이는 순간, 시인의 시선은 창밖 자전거 바퀴로 향합니다.
쓰러져 있던 길을 바퀴로 일으켜 세우며 언덕을 오르는 자전거처럼, 우리 삶 또한 끊임없이 굴러가야만 비로소 수직으로 설 수 있다는 역설을 보여줍니다. 이 시는 정체된 오후의 끝에서 다시 ‘동전의 구름’을 시작해야 하는 우리들의 숨 가쁜 실존을 조용히 다독이고 있습니다.
(글 / 양현근 시인)
[양현근의 아침을 여는 詩] 오후_안시아 < 양현근의 아침을 여는 詩 < 칼럼(기고/기자수첩/카드뉴스) < 오피니언·이슈 < 기사본문 - 폴리뉴스 Polinews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