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로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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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아름다운 경계
새 그림자 흘기듯 부딪쳐 와요. 해는 한시적으로 떴다 사라지곤 했는데 깨어지지 않고 온전하게 줄기로 기억한 곳까
지 뻗어갈 거예요. 새는 온전히 기억 속에서만 사는 아지랑인지도 몰라요. 그녀들에게 묻기 전 부정합 때문인지 소켓
램프가 불안정하게 볼륨을 키웠다 줄이길 반복하고 그날은, '분당'으로 날아간 새 그림자를 본 것 같아 해 뜬 것을 알
게 되었고요. 눈동자 깊이 날아간 그림자에 대해 말할 때면 내 그림자를 먼저 꺼뜨려둬야 했을 거예요. 불안정이 반
복된다거나 결렬된 볼륨의 베이스를 걸어두면 얼마나 척박한 파열음이 생겨날지. 찰나를 소켓에 접지해 둔 그날에 대
해 가지 손 뻗은 해에 가 앉아 있곤 했지만요. 세상 아름다운 정경은 항상, 가장 높은 나뭇가지를 매달릴 때에만 환
해진다는 걸. 긴 그림자 끌고 가는 해질녘 희박해지는, 푸르른 그녀들이 지저귀며.
벚꽃 필 무렵에서 '분당'까지 걸어가 끊어진 해를 치맛자락으로 잇고 있을 것만 같았어요. 바람의 볼륨이 조금 높고
아찔해진
나부끼는 새 그림자 '분당'으로 된 이국으로 나는가 봐요. 정오가 되기 전 대륙의 몽우리가 깨질 듯 밟히던 소리에
벚꽃 잎이 연분홍빛으로, 뺨에서 풋풋하게 번져든, 정오를 넘기면 국경 멀리 이지러진 향에 취해 발자국 따라 가지
끝에서 끝으로만.
봄에 실려 갔을 낙화경유지에로 새 그림자 어둑히 곱고 화사할 새 '분당'은.
2016.03.30.
리버스 아리 reverse ARI
선착장으로 입항하지 않는 3노트의 항속이 엘도라도를 향한다. 노을을 깎는 수만 년 눈꺼풀에 뒤척이던 해일과 연노
랑은 굵게, 수위에 함몰된 긴긴 동안 표류하는 물의 정박이라야 캄캄하고 더 육중하련만, 바다가 건조되는 겹겹의 흔
적만큼 두텁고 물 획은 저 혼자 헤맨 항로에 대하여 신열을 앓고서, 손수레가 헛바퀴 도는 틈에 끌려나온 내일의 표
류가 뭍 위를 항해하면 아리는 엘도라도에서 지팡그 밥을 짓고 있겠는데.
마노아는 태양을 향한 노을이 번진 바다에서 헤엄친 물고기인 듯이, 파도에 저항한 몸부림으로 비늘이 벗겨지면 손
바닥으로 떨어지는 사금의 어둠조각과, 손금처럼 생긴 해협을 지나, 하얗게 식은 밥알들을 떠먹는 사이에서 오게 된
다. 친구라 부르던 후예들은 모조리 태양이 쏟아내는 황금충에 눈이 멀었다. 비린내를 물씬 흡입한 기류의 흉부에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으로 된 동굴이 조개를 키우며 있다. 발자국처럼 물거품으로 파도는 지문을 남기고 비린 과거와
헤어지듯 연체가 만든 마당에로, 혀끝에 가물었던 파편의, 흙먼지에 싸인 바람의 활자가 점점이 혈관처럼 솟는.
엘도라도에 구름처럼 가 앉는 바람의 활자는 동굴처럼 조개의 마당에서 푸르른 호흡으로 밑이 닳아빠진 갈증을 적시
고, 오랜 과거의 유물처럼 생긴 숭늉을 마실 새, 석회질 집에 돌아온 프랑켄슈타인은 파도문양의 자개를 치며 수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연노랑은 가없는 조개의 바람으로 된 활자가 갈증으로부터 엘도라도까지 마당을 쓸며, 노을이 번진 불길사이로 밥을
지어먹던 오색자개 뜸을 놓았다. 친구라 부르던 후예들은 그 이후 활자조개를 주우러 엘도라도 바닷가에 갔다.
물결이 수레처럼 손수레를 따라 밥알로 활자를 짓다 간다.
2016.04.03.
벚꽃메신저
열다섯 날이 백만 번쯤 지나면, 아니 그보다 백만 번째의 오늘이 열닷새쯤 지속되는 그 어떤 환란으로 왔을 때, 말
하자면 벚꽃이 만든 미지로부터 날아온 연하장을 수인하게 된, 그 날이 오늘이라면
오늘로 된 우편물을 나르는 집배원의 하루는, 그러니까 벚꽃 피고 지는 동안 오롯이 그만큼만 또 다시 동봉하던 봄
의 숨결에서 수하인에 이르기까지 긴긴 봄날과,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아 지운 흔적까지 더한 그리움의 나날로, 미지
의 동경이 있고 바람에 날리는 하루살이 떼 같은 꽃 이파리 부수와, 딱 고만큼 열람되던 봄의 잔상을 지나게 되고
한 때, 푸르고 낯선 미지와의 교신으로 알던 시절도 하루가 저문 것처럼 이제는, 수취인불명으로 전할 수 없다거나
메신저를 클릭했을 오늘, 그 긴긴 하루가 지워지지 않을 때까지, 벚꽃은 다시 피고 지는
차창 밖으로 떠다니는 꽃 이파리 행렬, 그 보다 더 오래 된 달콤한 잼 속 마비의 도로, 반복되는 사람과 인파간의
부대낀 흔적으로 하루살이 떼처럼 서로에 대해 가벼웠지만 진중한 풍경 속 배경으로 남아 기억에 수납되길.
스무 살의 벚꽃은 메신저 같았고 그 보다 더 스무 살 같던 무렵을 동봉한 벚꽃은 피고 질 오늘에서, 젊고 푸른 하루
가 반송되어 돌아오지 못할 미지의 한 그루 아름드리에, 수취인미상의 봄을 또 다시 띄워 보낼.
그리고 그러하였으며, 서로에 대한 미지가 되어 주었지만
이제부터가 아닌 이제는
잘 지내고 있니?
백만 번쯤 벚꽃 피고 지는 해가 넘겨질 때쯤, 그 무렵의 하루가 또한
오늘처럼 느껴져 올 것만 같은, 그러한 길을 가다, 오는 긴긴
2016.04.05.
자유는 쟁취하는 것이다, 물건처럼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했을 때에만 자신의 것으로 온다.
권익과 권위는 이러한 자유 속에서만 존재한다.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잘못된 일탈, 분위기의 조장, 주인과 노예로 된 계급화 된 신분들은 누가 만들어 가는 것인가?
돈의 노예가 되어 돈을 파워라 여기는 인간 이하의 짐승들에게 경고한다.
언젠가 새로운 인물이 도래하는 날, 의식이 있는 사람이 있어, 짐승과 그 짐승새끼의 목을 베고 그 피로 강산을 물들일 날 반듯이 오게 된다. 천지를 흔드는 토벌격문을 만방에 써붙이고서, 나폴레옹처럼 나서는 인물이 반듯이 온다. 이 나라에도 더 이상 구정물이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지고 배수관이 미어터지는 날, 그 날에 반듯이 사단이 나게 되겠지.
아니면 의식 있는 다수의 노예들이 들고 일어나, 하지만 민중은 현대의 총칼에 이길 수 없다. 어나니머스와 나폴레옹만한 군인출신이면 족하다. 어느 나라의 역사를 보더라도 프랑스혁명 또한 그러하였으며, 군인출신이어야 한다.
지금의 정치와 기업인들의 관계는 혈족에 가깝다. 고로 이들을 모조리 토막내고 쳐죽일 수 있는 파워는 군벌에서 나와야 한다.
그것이 보다 안정적이고 세상을 뒤엎을 힘이 있다.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기 위해 의식이 있는 젊은이들은 군인이 되어 장성으로 성장하길 권고한다.
그래서 모두 봉기하길 염원하는 바이다.
지금의 세상은 산수로 되어 있다. 덧셈뺄셈이면 인생이 끝나는 세상이란 말이다.
수학은 컴퓨터가 하고 있고, 우리는 그냥 기호로 쓰일 뿐이다.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길 바란다. 동네 양아치나 노예근성으로 한 세상 살지 말길 바란다.
오늘 뉴스에 정주영 손자 정일영 새끼가 양아치질 한 소식을 보며 귀가 더러워졌다.
이런 병맛 세상을 살고 있는 게 퍽이나 새롭지 않은데, 우리는 21세기를 산다고 자부하지?
ㅋㅋㅋ 미친 건지.......... 쌩또라이들.
댓글목록
어오님의 댓글
짧은 생각들.
1.
꽃눈은 눈곱 같은, 때를 잊은 지난겨울의 ?생김새? 모양새? 얼룩? , 잎사귀와 잎 새에 녹아든 눈꽃처럼, 허공에서 터진 림프관으로부터 피를 흘리다 방울방울 누각을 떠나듯이 색등으로 무너져 온다. 나무둥치를 받치던 뿌리는 뜨겁고 강렬하게 타오른 폭설의 화염에서 익어가듯 모닥불 속에 던져진 비명으로, 또는 빗방울 스크래치인양 언저리로부터 태형을 받는다. 사포질을 받는 나뭇결에서 분진보다 더 가루가 되는, 비는 화염 속에서 그렇게 꽃잎들을 태우다 떨고 있다. 바닥을 쓸고 있는 그 보다 더 아래로부터 쓸린 듯이 물결은 일어나고, 물살을 이기지 못해 흐느적인 몇 날 몇 밤이 지나야 화석처럼 생긴 주름 안에서 미라가 되는, 잎 새 이파리가 더 묽어지도록 더 가라앉지 못할 지경에까지 희끄무레한. 수많은 그 보다 헤아리지 못해 포개어진 모래와 모래바람사이 소리 없이 움튼 새순처럼 머리카락은 조명이 켜진 듯 볼륨의 파문을 새긴다. 파문이 번지다 녹아든 햇살은 어딘가에서 무너져 온 바람이었을까? 물결이 바람을 깎는 모양으로 희끄무레한 속살을 뒤채며 더 이상 깎아질 것 없는 햇살이 되고 그 물결과, 오래 전 아버지의 무등 타고 휘저은 새가지 팔을 흔들고서 기억에서 무너져 온다.
2.
빈 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 넣을 때 사실 빈 것은 주머니가 아니라 손이었다. 빈손은 주머니 속에 들어와 온전히 빈 것이 될 수 있었다. 주머니를 발성해야 할 때 주로 포켓이라 말하고 주로 담배나 라이터를 끄집어내곤 했지만, 한 개비는 그냥 장작 따위로 해석되곤 했다. 장작을 태울 때면 이것은 성냥개비 탑으로 전이하곤 했는데, 장작으로 된 탑과 같기도 하고, 불을 지피면 뭉게뭉게 피어난 꽃이거나 온기 같기도 했다. 장작 특유의 마른 향은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마당을 만들고 기억 속 아지랑이가 되기도 하였다. 사랑하던 여자의 입김처럼 좋은 것만 내뿜는 고즈넉한 향과 같은, 어지러운 마음을 비워내며 떠났던 듯 미끄러진 옷깃을 잡아두는데, 장작이 다 타버리고 나면 재로 남는 그리움을 닮아있다. 간혹 초지의 감촉이 배긴 온기를 찾아 방황했지만 손이 오래도록 사무친 것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빈손은 주머니 안에 있고 한 번도 포켓이라 말하던 바깥에서 허우적댄 적 없었다. 손은 늘 주머니 속에 넣어져 있었던 듯 빈 주머니 속에서 수없이 빈 감촉을 끄집어내는데. 오래도록 허전했던 바깥으로 날아가는 담배연기와 세상에 대해 말할 때 끄집어내는 포켓에 대하여, 장작은 나무 향으로 기억되기보다 불의 온기로 타다 남는 재 따위로 흔해 빠진 캠프파이어로. 주머니 손이었을 때 토막잠에서 꾸었던 꿈이 가장 달콤한, 사람들은 아르마니아산과 이태리제에 열광했지만 아늑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치 주머니 속을 떠난 적 없는 빈손이었다는 듯이 점점, 부유 속 빈곤이나 극빈의 한 가운데에서 뭍으로 오르지 못해 허우적이며 허공에 팔을 저어가는 또는 휘젓는. 담배에서 빠져나간 장작개비보다 남아있는 사람들이 더 슬퍼지는 이상한 세계, 아무도 그 아무도 장작의 나무 향을 기억 못하게 될까 불안해지면 슬그머니 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 넣어보곤 한다. 사랑하던 여자에게서 곧 전해진 안부와 같고 한참동안 입김을 그려보다 따스해진 빈손은 포켓에 있었지만...... 곧 또 다시 호흡하는 짧은 동안의 긴긴 향 그것이라면 어떨까?
물의 부조에 대해 시를 쓰고 싶었는데, 하는 생각들을 하다가 못내 아쉬워 끄적여 본 것들은 이랬다.
초안 - 달은 지구에서 보자면 고유한 부조인 셈이다, 그리고 태양은 언제나 환조에 가깝다. 이것은 지구에서 보는 관점에서 정의되었을 때 지구중심의 시각이다. 물론 이것은 접목을 위한 하나의 가지로 쓰인 셈인데, 예를 들자면 얼굴에 화상을 입은 사람이라면 분명 상흔의 부위를 드러내지 않으려 감출 것이고, 이것은 지구에서 보는 달의 부조와 흡사하다. 대륙과 해양을 준거하자면 여러 수많은 섬들은 단지 활자이거나 앞으로 전개하려는 볼륨에 대한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대륙에서도 가장 높은 고산이나 지대는 고부조에 속하며 물의 부조에서도 가장 멀다. 타이틀은 물의 부조이며, 이것은 볼륨을 해석하고 조명하면서 자연스레 넘어가야 할 지점이 된다. 볼륨을 정의하고 질서를 규정하지 않고서는 물의 부조 단계로 넘어설 수 없는 한계에 치닫는다. 점진화법은 말하자면, 자연스러운 접목을 위한 가장 좋은 작용을 일으킨다. 생뚱맞지 않게, 낯설지 않게 포장하는 표현력은 점진화법이 가장 유용하다. 도입부분이 가장 고심되는 지점일 텐데, 사실 구도를 잡지 못한 단계에서 구상을 먼저 쓰고 있는 셈이다.
두 번째 물의 부조 - 비 오는 날, 그것은 빗방울의 못에 긁혀, 거리의 웅덩이나 잎사귀들의 등에 올라 고여 나타난다. 이것은 맑은 날과 다르게 희소성을 상대적으로 내포하는 어법이다. 날씨와 상관관계에 빠지는 딜레마에 놓이지만, 가령 예상 밖의 일이 발생했을 때 당황하게 되듯, 이것은 사건 자체로 생뚱맞다. 그리고 극히 자연스러운 화법으로 접목해 있다. 이것이 비 오는 날의 좋은 예이다.
몸의 흉터는 이러한 부조를 설명하는데 있어 가장 적합하다. 상처는 드러나는 상처와 내면의 상처로 대비된다. 이것은 일종의 부조가 한 단계 진일보한 표현이 된다. 한 사람의 상처를 관찰하면서 이것을 통찰한다. 부조의 내외를 끄집어낼 수 있는 하나의 통로가 설정된 것과 같다. 이목구비는 몸의 돌출부일 뿐, 이것은 원시적 부조의 표현에 불과하다. 고로 상처는 외부로부터의 피부의 다른 자극에 의한 가장 높게 형성된 부조인 셈이다. 내면의 부조를 표현하기 위해 먼저 상처에 대한 서술이 기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비 오는 날 구도가 성립된 부조는 이러한 테마로 가닥을 잡는다.
세상은 왜 이렇게 길들여져 재미없어 지는 걸까? 부자를 욕한다 해서 세상이 바뀔 수 있다면 온갖 욕을 섞어 칼라풀하게 도배를 해 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부자 앞에는 지배라는 개념이 먼저 오는 관계로 그들의 잘못만은 아닌 셈이 된다. 지배라는 개념에는 정치인, 지식인, 상류층인사, 따위가 온다. 그리고 이것은 기회주의자들에 있어 희석되어버리는 중화를 거치고 있다. 세대가 바뀐다거나 시대의 흐름이 바뀐다거나 하는 따위의 설정과 맞물린다면, 우리가 구태라고 말하던 것들은 이미 복구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예로 신드롬이 있었다. 우리는 구시대의 유물들로 포장된 사회를 동시에 살아가며 미래지향적인 셈이 된다. 보니 샌더스에게서 내가 보았던 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해봐야 의미가 되지 못할 테니까, 그냥 끄적여 두고 말 일이다. 세상은 어차피 누군가의 지배와 복종 속에 굴러가게 되어 있으므로, 이것은 주종이나 상하 관계의 예속, 구속력, 속박 따위를 해결할 방안이 되지 못한다. 보니 샌더스가 어떤 이론을 들고나와 큰 인물이 되더라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그냥 답안이나 답안지일 뿐이다. 세상의 모든 이념과 이론을 통달하더라도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아프리카의 가난과 기아를 해결하지 못하고 지구환경을 깨끗한 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소리없는 전쟁의 화염 속에 던져지는 어떤 연소물질일 뿐이므로. 그것이 인간과 인간의 구도였든 인간대 자연의 구도였든 인간과 지구의 신이라 불리는 대결 구도였든 우리는 우리에 대해 잔인해질 뿐이다. 그것이 나와 우리를 이해하는 첫걸음이 된다. 신을 경배하거나 믿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이웃에 대해 연민을 호소한다면, 그들은 사후세계를 처방할 것이다. 안타까운 사람들은 이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무리들이다. 조종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처참한 최후에 눈 멀게 하는 것인지........ 그들은 하나의 실험대상이 될 뿐이었다. 나는 종교를 혐오하지 않지만, 종교를 혐오하지도 않을 것이지만, 구태라 생각한다.
다음 세대가 시작할 때 내 글을 읽어준다면, 나는 그들에게 세상이 어떠한 원리와 어떠한 논리로 물려있고, 회전하는 것인가에 대해 먼저 가르쳐 주고 싶을 뿐이다. 그들도 똑같이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길 바라는 마음, 그 하나면 된다.
가난한 사람이든 소외된 사람이든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져야 한다. 균등한 기회가 아닌, 공평한 기회의 제공 말이다. 세상에는 균등한 기회가 있지만 공평한 기회의 제공은 사라지고 없다. 요즘 세상은 기회마저 돈을 주고 사고 팔거나 돈 그 자체를 직역하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곧 차별적 기회를 뜻한다.
기회를 갖기 이전에 종속되고 마는 고리의 악순환에 대해 사회는 싸워야 한다. 정치인들의 목을 베야 한다.
우리 사회의 기생충은 바로 정치인들이며, 이들은 사회의 암적 존재로 전락해 있다. 국정을 소화하기 위해 감독기관이 필요하다면 시민단체로 족하다. 정치라는 신분증을 모두 소각해야 할 시국에 도달한 지금, 우리는 반듯이 구태 정치에 대해 심판하고 이들의 수족과 직계 모두를 도살하는 혁명파가 되어야 한다. 모두 들고 일어나 국회로 나아가 이들을 광장으로 끌어내 참수해야 한다.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어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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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날 저무는 해와 길게 늘어진 표면감촉인양 흐린 감정 속에 놓여있다. 전기포트에서 끓인 물을 붓고 또한 가공된 인스턴트커피 두어 봉을 뜯어 차를 마신다. 물컵용으로 제작된 용기에는 그 흔한 귀가 없다. 차라리 손잡이 귀가 없다는 게 다행스럽기까지 하다. 물의 뜨거운 열기를 피부에 직접 닿는 면적만큼 고스란히 통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게 퍽이나 생동감마저 이끌어내게 한다. 아직 살아있다는 여유 비슷한 감흥에 싸일 수 있게, 이끌어준다. 무엇인가를 무엇인가가 무엇으로 무엇 하게 하는 무엇이라면, 나는 아직 빗나가지 않았다. 러시아 모던락밴드(modern rock band)의 음악 속에 있다. 어떤 무엇 속에 담겨있다, 라고 말할 때만큼 내가 잠겨있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사회 속에, 사람들 속에, 그러한 분위기 속에, 구태 속에, 지난 과거처럼 거기 담겨져 있거나 잠겨 있다. 내가 사회를, 사람들을, 분위기를, 구태를, 과거와 행적을, 모조리 지우고 싶다면 눈을 감으면 된다. 아주 간단한 리모컨 버튼을 조작하듯, 불을 꺼뜨리듯, 물을 비워내듯, 커서처럼 눈을 깜빡이며, 먼 별빛에 이른 것처럼, 우주 바깥에 가본 사람이 되어 의자에 앉아 어둠에 싸이면 된다. 별빛은 멀고, 그 보다 더 먼 우주 바깥에서 나는 앉아있게 된다. 러시아 록밴드의 음악 속에서 모두 잊은 채, 고요한 시간과 더 차분해진 감정으로, 한없이 침잔 한 세계에서 무엇을 그리워 해 보는 일을 하고 있다. 시간은 오후 5시를 넘어갔지만, 그 보다 더 오랜 오후 5시인 듯이 나는 그 시간 안에 있다. 나란 사람을 잊은 듯이, 아름다운 세계에 있다. 바깥은 이미 무너지고 어둠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