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한 고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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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한 고립
이영균
마음이 허물어질 때는 차분히 가라앉힐 곳 찾아 무작정 길을 떠난다
해묵고 고즈넉한 그다지 낯설지 않은 그런 양지마을
바람 우묵한 무덤가 할미꽃 함초롬한 노모도 만나고
시오리쯤일 듯 깊숙해 보여 아늑한 초가에
계집아이와 소나기 긋던 벼 낟가리같이 아롱아롱한 호롱불도 만나
발바닥 곱은 두 다리 쭉 펴고 누우면
부린 몸 위로 허물어진 마음엔 호롱불 그림자 가물가물 내리는
어둠의 기, 실할 때쯤이면
바가지에 씨알이 굵은 감자 서너 알 까먹는 길고 푸근한 방에 눕고
밤 깊을수록 문창호지 점점 환해 오는 건 필시 밤새도록 폭설 쌓일 징조
폭설 무장하기에 누렁이도 제집에서 쥐 죽은 듯 기척이 없다
사박사박 초저녁을 에워싸던 눈꽃 이젠 수북수북 산천에 목화솜 세 채를 덮는다
노모의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에 그 밤이 다 물러가면
밤새 목화솜 세 채에 파묻혀 숙성했을 잠 햇살에 노랗게 금빛을 띤다
이불 개키듯 노인이 눈길을 내면 길섶은 실한 됫박인 듯 눈 둔덕 수북하여
나풀나풀 바깥세상으로 뛰어가는 아이들 머리끝만 달싹거리는 정오 가까워지고
눈이 녹아 처마 끝 철퍽철퍽 물 마시는 소리를 낸다
늙고 헐거워져 버려진 듯 겨우 사람의 숨결 딸막거리던 집
옛집인 듯 내겐 새집이어서 깊고
노부부의 그 아침도 새날이어서 깊어지고
눈 쌓인 오지마을도 오지여서 깊어 오지고
고립도 한 이래 더 깊어진다
* 명절 끝 식구들 다 돌아가고 덩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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