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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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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1,311회 작성일 20-10-19 16:03

본문

시인 



흑백사진 속에서 난 그대를 찾았다. 목적 없이 위로 위로 뻗어나간

등나무 덩굴 위에 앉아있는 그대를. 난 무성한 청록빛이 그대를 더 가늘게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생각했다. 그대는 참 위태로와 보였다. 금방이라도 

허공 중으로 꺼져버릴 것 같았다. 


흑백사진의 가장자리는

빛이 바랬다. 등나무 덩굴은 너무 무성하다 못해

죽어가는 중이었다. 나는 만져지지 않는

먼 과거로부터 온 것을 쓰다듬었다. 그대는 내게 

미소 짓고 있는 듯 보였다. 그대는 

무성한 청록빛 잎과 잎 사이에 숨어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듯 보였다. 


바람이 

허공 중에 뭉쳐진 형상과 흩어지는 형상 사이로 

지나갔다. 내가 먼 과거로부터 그대를 불러내어 

아련한 표현들 사이에서 몰래 키스하는 것이든, 

아님 그대가 먼 환상으로부터 몸을 일으켜 

그대를 바라볼 내 안구를 빚어내는 것이든, 

우리는 영원히 이 흑백사진을 창으로 하여 

서로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닫힌 투명함 위에 어른거리는 

슬픈 것을 손으로 쓰다듬어 본다. 

팔십년 전 그대가 눈앞의 

카메라 렌즈를 쏘아보며, 

그 너머 날 바라보고 황홀에 빠졌듯이. 



* 노천명의 흑백사진을 바라보며. 어쩌면 그 사진을 찍으며 그녀는 카메라 렌즈 안에서 영원을 보았고,

나는 흑백사진을 보며 그녀 얼굴 안에서 영원을 보고. 서로 팔십년의 시간 차가 있지만, 

같은 영원을 바라보는 한, 우리 영혼은 겹쳐있다.


   

댓글목록

tang님의 댓글

profile_image tang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생명의 힘의 체현으로 심대함을 말하기는 일상적이지 않고 쉬운 일도 아니라 봅니다
어쨋거나 환희의 깨짐으로 비형상적이고 추상적인 얼개로 또 다른 높음을 추구하는 이전 트렌드인데도
상당한 가치를 전해줍니다 비정함으로 된 묵상의 힘에 도전한 격이 됐네요
있음의 힘의 시작을 말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은 점은 아쉽습니다
감성적 포인트에 무너져 내린 점 또한 이해되지 않습니다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profile_image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미인의 눈 코 입을 그리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날카로운 지적이십니다.

창가에핀석류꽃님의 댓글

profile_image 창가에핀석류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참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시간을 초월하여 시인 만이 느낄 수있는 것을
풀어 내셨군요. 코렐리님 만의 정서, 흠씬 느끼고 갑니다..고맙습니다^^~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profile_image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죽은 노천명을 불러내어 등나무 덩굴 위에 앉히고
수십년 전 노천명의 표정 안에 들어가 그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시인만이 가진 특권 같습니다. 어쩌면 제가 지금 표현을 주려고 하는 것을
수십년 전 노천명도 표현을 주려고 하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냥 노천명의 흑백사진을 보니 이런 저런 생각이 듭니다. 석류꽃님처럼 많은 것들을 -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
반사할 수 있는 심상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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