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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흐리고 맑음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아무르박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1,115회 작성일 19-05-03 18:46

본문




한때 흐리고 맑음



아무르박

찐 계란에 사이다보다는

김밥이 먹고 싶어 가슴에 설렘이 가득했던 소풍 전 날


장롱 속에

더러는 보란 듯이 장식장에

라디오보다 대접을 받던 흑백 티브이

내일의 날씨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수하지만 컬컬한 목소리의 남자가

한 손에는 검정 매직펜과

다른 한 손에는 짧은 지휘봉을 들고나왔다


흰색 마분지 위에 등고선 같은 기압골이 흐르고

구름에 가려진 듯한 그 중심에 한반도가 있었다

일본 열도 넘어 태평양을 낀 해양세력과

멀리 만주 벌판을 넘어 몽고고원의 대륙세력

그리고 부동의 항을 꿈꾸며 그 틈을 호신 탐탐 노리는 시베리아 대륙의 사이

고기압과 저기압은 날마다 세력다툼을 벌였다


동과 서를 사십오도 빗금을 그은 두 줄의 기차길

언제 우리가 원했던가

민족의 벽이 되어버린 분단의 장막을 들추고

해양과 대륙의 세력이 충돌했다

탁구의 핑퐁 게임같이 주고받는 고기압과 저기압의 기압골


고고고 저저저

사슬을 이어놓고 지리멸렬하게 꿈트는 생명


과학적인 상식은 없었지만

맑고 건조한 태평양의 해양세력이

한반도에 진출해 주기를 얼마나 고대했던가

그래서 내일의 날씨는

콩나물 시루 같은 교실에서 도시락을 까먹는 일이 없기를

찢어진 우산이거나 그도 아니면

우산 살이 부러진 구멍 난 운동화

비 오는 날의 교문 밖의 풍경은

아이를 기다리는 어른들의 설렘이 우산을 펼쳐 든 바른 손에

할머니의 지팡이처럼 들려있었다

소풍 날 비가 오는데

아이들이 모두 교문 밖으로 떠나간 그 후에

우산도 없이 집으로 간다

이 참담함은 악몽 같은 시나리오

하지만 어머니의 김밥을 먹을 수 있다


자정을 넘어서면

습관처럼 열어보는 오늘의 날씨

애플리케이션

비가 올 확률은 시간 단위로 퍼센트를 표기한다


한 때 흐리고 맑음


세상의 시인들이여

우리 사는 세상의 풍경은

또한 인생은

이처럼 함축된 시어 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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