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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경비원의 하루(퇴고)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1,663회 작성일 24-10-12 10:18

본문

  어느 경비원의 하루 




  30년을 함께한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다녀올게, 눈빛 교환 한번 해야지.

  여전히 만리향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대문을 열고 출근길 위로 올랐다.

  무슨 비유인 양 좁다란 골목길을 지난다.

  도로 난간 옆 매실나무 가지가.

  찬바람에 부르르 떨고 있다.

  그를 지나.

  벚나무 둥치를 눈으로 매만지며 지하철역을 향한다.

  멀리 십자가가 눈에 들어온다.

  괴로웠던, 그러나 행복한 사나이라고 했던.

  형무소에서 죽어간 시인의 고백이 떠오른다.

  지하철 게이트를 자그마한 동백전 카드가 통과시켜 준다.

  나보다 조금 높은 곳에서.

  디지털시계가 일곱 시 십오 분을 표시하고 계신다.

  잠이 덜 깬 눈망울들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린다.

  저기.

  가는 삶. 

  오는 삶.

  기차는 뒷모습과 앞모습을 보이며 내 앞을 오간다.

  휴대폰 외엔 세상이 없는 것처럼.

  사람들은 그 블랙홀에 눈을 박고 있다.

  얼비치는 차창의, 

  이파리처럼 흔들거리는 나의 전신을 본다.

  그러나 나의 자세는 너의 자세와 다를 거라고.

  배에 힘을 주고 상체를 곧추세운다.

  서로의 낯선 입김을 주고 받으며,

  물결이 되어 흘러가던 지하철을 나와.

  아파트 곁 스물다섯 그루의 메타세콰이어를 바라보며.

  걷는다.

  지금껏 몰랐다.

  저들이 그 나무인 것을.

  삼나무로 착각하고 이 년을 보냈다.

  첫눈 내리던 어느날.

  호위무사처럼 눈송이들을 맞이하던 그들을 보며.

  나는 문득.

  그들이 메타세콰이어일 거라는 생각을 해내었다.

  미안했다.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지 못해서.

  그들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해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 꽃이 되었다 했던가.

  불현듯 옛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그들 우듬지에 자리한 세 개의 까치집이.

  세상의 마지막 희망인 양 앙상하게 매달려 있다.

  어제처럼 비가 내린다.

  언제나처럼 바람이 분다.

  오래고 낡은 내 구둣발이 풀이 죽은,

  낙엽들을 차고 지나간다.

  아파트 2층 동백꽃이 마지막 하나 남은.

  꽃송이를 매달고 있다.

  배롱나무는 아직도 빨간 꿈을 꾸는 듯.

  살짝 내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인사한다.

  만리향은 둥치와 우듬지가 동시에 흔들린다.

  문득 아이들이 생각났다.



      나를 다녀간 아이들에게



  안녕

  내 영혼을 다녀간 꽃봉오리들아.


  상류와 하류처럼,

  멀리 떨어졌으나 끝내 이어져 있을 마음들아.


  너희들 파란 마음이 앉고 서고 놀던 자리

  회색빛 생각을 하늘빛 생각으로 바꾸던 놀이터에서

  윤슬처럼 반짝이던 아이들아.


  하류든

  상류든 사랑으로 빛나기를.


  내게 투명한 즐거움을 부어주던 은빛 물고기들아.

  저 연어들처럼

  탁류의 세상 박차고 오르기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른들보다 순전한 지혜를 무심히 던져주던

  내 착한 쑥부쟁이들아.


  햇살을 받아 든 산등성이 물푸레나무에게

  처럼,

  마침내 푸르디푸른 축복 너희에게 닿기를.




  서울로 이사 가던 날.

  함께 사진을 찍자며 로비 근무 서던 내게로.

  와 주었던 하은이와 정우에게.

  우슬 같던 아이들에게.

  나는 이 시를 적어주었다.

  줄 게 내겐 이것 밖에 없다며.

  과학고에 진학해서 휼륭한 과학자가 되겠다던 시현아.

  처음 막막하던 내게,

  아저씨 고마워요, 라며 고마운 손편지를 주었던 서윤아.

  클레멘티 소나티네 악보책을 보이며 환하게 웃던 하연아.

  홈플러스 간이 공연장에서 

  어른들과 합주했다며 자랑하던 리원아.

  어느 비 오는 날

  엄마와 함께 비를 맞으며 비처럼 미소 짓던 진아.

  난 몰라요, 밖에 모르는 어여쁜 꽃송이 같은 지원아.

  늘 주먹인사 날리며 씩씩하게 인사하던 하준아.

  아저씨, 밝아지려는 마음이 더 아저씰 밝게 만들어요,

  어른 같은 말로 나에게 가르쳐주던 지유야.

  정문 게이트에서, 로비 근무 중인 나를 발견하곤,

  한달음에 달려오던 환한 얼굴의 나은아.

  늘 조용히 눈인사만 건네며 지나가던, 그러나

  손으로 만든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었던 윤서야.

  작은 포스트잇에 내 초상화를 그려주곤,

  이게 아저씨 신분증이예요,

  하던 내 착한 아이들아.

  내 치료제였던 물푸레나무들아.

  내 시를 너희들에게 보낸다.

  수많은 나날.

  정문 게이트를 열어주면서,

  나는 후문 게이트의 안위를 생각했다.

  들고 나는 차들의 얼굴과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바퀴의 하루를 생각했다.

  여러 모양.

  여러 생각.

  그러나 단 한 번의 하루.

  그 하루를 뒤로하고 

  아파트를 나와 지하철 역으로 향한다.

  이파리 같은 사람들과

  서로 복사한 것 같은 하품을 지나.

  집 초인종을 누르면 들리는 소리.

  잘 다녀왔어요?

  아내의 30년 묵은 사랑이 내 심장을 지그시 누른다.

  저녁은 깊고 구기자차는 맑다.





  

  

  

  












     

  

  

  

  

댓글목록

수퍼스톰님의 댓글

profile_image 수퍼스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시를 읽는 내내 가슴이 따듯해지는,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듯했습니다.
참 좋은 시 읽었습니다.
제가 신춘문예 심사위원이라면 저는 시인님의 시를 선정합니다.
언제부턴가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정신분열증 환자의 독백 같은 글을 나열한 시들을 선정하는 걸 보면
시를 읽는 독자가 줄어드는 게 다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늘 건필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너덜길님의 댓글의 댓글

profile_image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감사합니다.
여전히 잘 지내시는지요.
저는 어려운 시는 잘 모릅니다.
그저 제 생활을 얘기할 뿐.
실제 삶을 떠난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기도 하고요.
말씀, 너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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