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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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이전, 공간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곳.
빗방울이 처음 땅을 두드리기 전의 기억처럼
나의 가장 먼 내부에서 울리는 파문이 있다.
그곳엔 벽이 없다.
벽 대신 흐름이 있다.
물의 곡선으로 된 문턱을 넘어 나는 알 수 없는 문장을 지나간다.
파란 숨결. 젖은 언어. 눈을 감은 채 말해지는 진실.
창은 바다가 아니라 바닥의 꿈을 본다.
어떤 물고기는 기억을 물고 다니고
어떤 해초는 이름 없는 사라짐을 노래한다.
가끔 나는 묻는다.
왜 이곳을 떠올리는지.
왜 숨이 물결처럼 되돌아오는지.
그때마다 물은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나를 천천히 감싸며 잊음을 가르친다.
침대는 조개껍질 같지 않았다.
손끝에 식은 바람이 닿고 가라앉은 별빛의 부스러기가 흩어졌다.
거기서 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잠시 평화롭다.
이 집에서 말이 녹아 있다.
소리는 물에 섞여 형태를 잃고 침묵은 자라나 나무가 된다.
그 나뭇가지 위에서 새는 울지 않는다.
대신, 울지 않음이 울림이 된다.
나는 손이 없다.
그래서 만질 수 있다.
나는 눈이 없다.
그래서 볼 수 있다.
나는 이름이 없다.
그래서 살아 있다.
시간은 펄처럼 둥글다.
아무 곳에서도 시작되지 않고 어떤 결말도 남기지 않는다.
숨소리만이 유일한 나침반,
떠오르려는 기척만이 내가 가진 기억.
가끔 이 집에 머무는 것은
꿈이 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나를 밀어내기 때문이다.
그럴 때 나는 고요한 식탁에 앉아
빈 물컵을 마신다.
그 안엔 오래전에 마셨던 슬픔의 맛이 남아 있다.
그리고 나간다.
지느러미처럼 흔들리는 내 몸을 느끼며
조용히 수면을 찢고 나간다.
현실이라는 이름의 얇은 껍질을 천천히,
다시 뒤집듯.
그 후로 나는 조금 투명해지고, 조금 더 속이 비쳐 보이는 존재가 된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라 부르지만
나는 돌아갈 집을 잃지 않으려 이렇게 투명해진다.
댓글목록
김재숙님의 댓글
마지막 연은 감동입니다. 돌아갈 집. 투명해 진다...... 저도 좀더 투명한 사람이 될가 봅니다
좋은시 잘 감상 했습니다. 편안한 하루 되세요 시인님~~^^
수퍼스톰님의 댓글
부족한 글에 맘을 얹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잊힘과 평온 사이에서 존재의 근원을 고민해 보았습니다.
좋은 오후 시간 보내십시오. 시인님.
너덜길님의 댓글
문장을 지나,
잊음을 지나,
울림을 지나,
기억을 지나,
슬픔을 지나,
침묵은 자라나 나무가 되고, 비로소
돌아갈 집을 잃지 않으리라.
그리고 시는 돌아갈 집으로 나를 인도할
나침반이리라 생각하게 됩니다.
참 좋은 시 잘 읽었습니다.
수퍼스톰님의 댓글
부족한 글에
좋은 말씀으로 힘을 얹어 주신 시인님 감사합니다.
늘 건필하시고 편안한 밤 보내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