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잠을 깨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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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는 아주 얇은 새벽빛처럼 흔들리고
먼저 눈을 뜬 책 몇 권이
표지의 미세한 떨림으로 나를 맞이한다.
바닥은 꿈이 식으며 남긴 물결처럼
발밑에서 조용히 움직이고 내 걸음마다 잉크의 향이
포개진 시간 사이로 피어오른다.
책들은 제각기 다른 속도로 잠에서 깨어나는 중이다.
어떤 책은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페이지 사이에 남아 있는 꿈을 털어내고
어떤 책은 아직 반쯤 꿈속에 있어
표지가 부풀어 오른 채 나른히 숨을 쉰다.
손끝이 한 권의 등표를 스치자
잠꼬대 같은 문장이 흘러나와 내 어깨 위로 걸터앉는다.
그 문장은 내 귀에 입술을 대고
자신이 방금 꾸던 꿈의 마지막 장면을 천천히 옮겨 적는다.
페이지를 펼치면
글자들은 아침 안개처럼 흩어졌다 모이며
물결처럼 흔들리는 빛의 결을 따라
내 눈동자로 들어와 내 마음 속 빈 공간에 자리를 잡는다.
서점의 천장은 이내 하얗게 깨어가는 하늘로 변하고
행간에서 빠져나온 이야기의 조각들은
새벽별처럼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 떠오른다.
멀리서 들리는 책장의 사각거림은
누군가의 꿈이 완전히 깨어나는 소리 같아
나는 조용히 숨을 고르고 그 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 더 천천히 걷는다.
그리고 문 밖으로 나서기 전에
책들은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부드럽게 읽는다.
마치 나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마치 아직 끝나지 않은 꿈의 일부라는 듯.
밖으로 나오면
현실은 조금 더 무거워 보이고
나는 조금 더 종잇장처럼 가벼워져 서늘한 바람 속에서 살짝 흔들린다.
그때 뒤에서
서점의 문이 아주 조용히 닫히며 속삭인다.
“다음 오면 너의 뒷 페이지를 보여줘.”
댓글목록
이장희님의 댓글
걸음마다 잉크의 향이 포개진 시간 사이로 피어오른다는 표현 넘 좋네요.
마지막 연 여운이 오래 남을 것 같네요.
종로서적, 교보문고, 영풍문고 한창 누비고 다닐때가 있었는데...그때가 그립네요.
서점에 많은 인파들이 있었는데 요즘은 뜸한 걸 보면 좀 아쉽긴 합니다.
좋은 시 잘 감상하고 갑니다.
늘 건필하소서, 수퍼스톰 시인님.
수퍼스톰님의 댓글
시인님께서도 여러 유명 서점을 이용하셨군요.
오래전 공부할 때 까다로운 영문과 교수가 T.S 엘리엇의 "전통과 개별 재능"을 읽고
창작과 비평에 대해서 논하라는 과제 때문에 원서를 사러 종로서적, 교보문고를 비롯하여
여러 서점을 헤매었던 적이 있습니다. 결국 동대문 옆 중고서점을 뒤져 겨우 구했지요.
그때 너무 고생을 해서 잊혀 지지가 않습니다.
편안한 저녁 되십시오. 이장희 시인님.
김재숙님의 댓글
마지막연에서 살짝 미소가 번지네요 표현이 참 좋습니다. 그리고 책을 많이 읽으시는 분이시죠?
저는 서점보다는 공공 도서관을 많이 이용합니다 그리고 중고서적을 손에 넣엇을때는 왠지 따뜻한 사람냄새가 나는 것 같아 참 좋습니다. 수퍼스톰도 시에서도 댓글에서도 은은한 향내가 남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시인님~~~^^
수퍼스톰님의 댓글
시인님 다녀 가셨네요. 대접도 못해 드렸는데...
주로 공공 도서관을 이용하시는 군요.
시인님의 글이야 말로 이슬을 머금고 있는, 싱그러운 풀잎 향이 납니다.
숲의 향기처럼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퍈안한 저녁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