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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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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8건 조회 376회 작성일 26-01-23 22:35

본문

 

  동행




    하루의 일을 마치고, 봄에 뿌릴 하얀 눈송이들을 준비하는 벚나무 아래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구시죠, 남자의 칼칼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전 그 휴대폰 주인의 남편입니다만, 아 예 148번 종점으로 오세요, 휴대폰은 저희 사무실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며 떨어뜨린 아내의 휴대폰 덕분에. 노포동 공용차고지까지 아내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갔다. 거기 있다니 다행이다,는 안도감 속으로 차창 밖 가로등 불빛들이 눈인사를 보내고 있었다. 한 시간 남짓 짧은 거리를 한 자리 한 불빛 아래서 낯선 삶들의 표정에 섞여 가는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신용카드, 주민등록증까지 모두 간직한 그를 찾아서 가는 길 끝에 도착하니 슬그머니 어둠이 깔린 건물들이 보였다. 너무 고맙습니다, 고갤 연거푸 숙이며 인사하고 나오니 148번 버스가 출차하는 게 보였다. 오후 내내 전화가 안 돼 걱정하셨을 장모님께 먼저 생존 신고를 했다. 난 또 뭔 일 있는 줄 알았어, 찾았으니 다행이여. 오늘 서울 손녀네 집에서 내려와 막 순천엘 도착하신 구순 장모님의 여린 웃음 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평화를 되찾은 우리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뭐라도 먹고 가자며 동래시장에서 내렸다. 분식집에 들어가 우동과 김밥을 시켜 먹었다. 오래전 먹었던 맛과는 달랐지만, 어쩌겠나 삶이 이런 걸.


  말이 없어도 표정이 없어도 노래가 없어도, 말이 생기를 얻고 짐짓 표정이 생기고 옛날처럼 노래가 들리는  세월 넘어 생의 맛은 따스한 김과 함께 되살아났다. 아내는 언제나처럼 말이 적고, 나는 말이 많고. 30년 전과 비슷한 풍경화, 조금씩 덧칠하며 그려 온 우리.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손 위로 국물 한 방울 떨어지고 그 손을 어루만지는 손 위로 내려앉는 눈웃음 한 방울.


  잊었다 싶었는데 가끔 슬픔이 태어난 거리를 지나면 슬픔은 예전 모습 그대로 우릴 바라본다. 김밥처럼 퍽퍽한 내게 따뜻한 우동 국물이 되어준 당신에게 국물 위 피어오르는 김 정도의 따스함이라도 주려 자꾸 재잘거리는 나.


  그러므로 슬픔의 이름을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뱉지 않고 견디기. 그러나 곧추세운 자세로 살아가기.


  계산을 하고 가게 밖으로 나오니 집으로 가는, 눈송이처럼 하얀 버스가 보였고 우린, 언제나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가는 우린 이 밤 구원의 별,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프리지어라고 저장된 아내의 전화번호를 꾸욱 눌러 본다. 차창 밖에선 별들이 눈인사를 보내고 있다.




  

댓글목록

콩트님의 댓글

profile_image 콩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시인님의 행간에 잠시 내려 산책하는 이 밤,
프리지어처럼 샛노란 별빛이 어둠이 세월처럼 쌓인 생의 길 위에 내려앉아
저와 동행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밤입니다.
날씨가 춥습니다. 건강하시고 건필하십시오.~^^

너덜길님의 댓글의 댓글

profile_image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귀한 마음, 고맙습니다.
그저 사소한 생활을 표현해봤습니다.
이런 것도 시가 될지 궁금해 하면서.
늘 강건하시길 빕니다.

너덜길님의 댓글의 댓글

profile_image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시는 자칫 나를 포장할 수도 있어,
항상 사소함 그대로 표현해보려 합니다.
아름답다 하시니, 그저 부끄럽습니다.
건강하시길 빕니다.

이장희님의 댓글

profile_image 이장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영화에 한장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아내가 있어 좋겠습니다.
그래도 난 혼자인게 좋습니다. ㅋㅋ
오랜만 인사드립니다.
늘 건필하소서, 너덜길 시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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