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노래의 언어는 직접 보고 있는 붓다를 가리킨다 - (초특급 강렬한 대서사大敍事, 제2탄)
페이지 정보
작성자본문
내 노래의 언어는 직접 보고 있는 붓다를 가리킨다
사문沙門/ 탄무誕无
시작을 알 수 없는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단절도 없었고 소멸도 없었다
자궁으로 숨어들기 전 벌써 있었댜(인간으로 태어나기 전 이미 있었다)
이 몸이 살아 생존한 기간보다
죽어 태어나기 이전의 시간이 더 길었다
몸은 옛 몸이로되 사람이 옛사람이 아닌지, 오래
예전 같은 모습에 예전 같은 얼굴로
예전처럼 손발 움직이나 언필칭言必稱 다른 사람이다
몸을 볼 때 무생멸無生滅의 몸을 보는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남의 타불他佛을 의지해 서술하는 게 아니다
무명無明이 몰락해 미혹마저 거세된 비지비관非止非觀 스스로,
타他에 의하는 바 없는 진공묘유 진제眞際 정견正見이다
사람이 바뀐 몸의 즐거움 환歡과 마음의 기쁨 희喜,
진정한 이해는 인간의 본래 성품을 바로 보는 데서 비롯된다
인간의 육체는 육체로부터 태어나지만
인간의 본래 성품은 육체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 진면목은 계합의 영역으로
성불成佛은 나 자신으로부터 태어나는 제2의 탄생,
나를 낳은 기쁨보다 더한 것은 없다
일체가 제2의 잉태 아닌 게 없다
사람은 있는데 소식 없는 것처럼,
학문과 학식적 총명을 깨침의 증거로 삼을 수 없으며
체득한 견처見處는 귀신도 엿볼 수 없다
돈오頓悟 소식은 점수漸修론 전혀 불가능한 체험의 영역이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문자와 정보를 통해서는 체득體得될 수 없다
자신한테 있는 걸 문자와 정보에서 찾으려는 자는 정신 나간 사람,
사실이 사실이니만치 직접 보는 것만큼 커다란 앎은 없다
실지實智를 깨치고 난 후부터 앎이야말로 진정한 앎,
사바를 보림총림保任叢林으로
안이비설신의 모든 감각과 의식을 일등 선방으로
존재계 전체를 가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술을 마시지 않고, 반야의 종지 보리菩提에 취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인간이 인간의 본래 성품(붓다)을 보고 깨치면
그 사람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경전이 된다
수천 가지 경전은 인간의 밝은 본성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와 모든 철학과 모든 인간이 나오는 출구,
인간의 본래 성품이 거짓 없는 참된 진실한 교회敎誨,
숭배나 사람을 지배하는 힘이 아니라 사람보다 더 사람다운 사람
자신의 내면에 있는 영원불멸 핵심적 존재를 아는 힘이다
인간의 본래 성품이 선지식禪智識을 만든다
본래 성품은 사람이 죽을 때 사람 몸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다
몸이 죽는다고 같이 따라 죽는 게 아니다
심리학처럼 마음을 분석해 본래 성품을 이해하려 하지 말라
인공 기획물 지식과 정보로만 굳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말을 배우는 데는 인간의 시간이 걸리고
보이지 않으면서 본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침묵을 배우는 데는 붓다의 시간이 걸린다
붓다의 침묵을 진정한 침묵이라 한다
자신을 재판하는 판사도 되었다가,
벌하는 검사도 되었다가,
변호하는 변호사도 되었다가,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은 그대만의 것이 아니다
마음은 제도권의 산물이다
누에가 실을 토해 자신을 묶듯 마음은 인간을 구속한다
올바르게 사용하면 사회적 훌륭한 도구지만
마음을 참나라 여기면 부림 당해야 할 도구가
주인을 부리는 전도 상태가 된다
마음은 생각이 투사된 사회를 만들고
그 투사된 사회가 마음을 만든다
사량분별思量分別 먹고 살찐 마음은 사회적이다
짓기는 마음대로 짓되 받을 땐 몸으로 받는다
알아차림으로 끝나면 더 이상 윤회는 없겠지만
몸 감각으로 받아들였을 때
인과응보의 수레바퀴는 굴러가게 된다
이것이 생각이 죽고 사는 마음의 윤회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이름을 붙여놓고 인격화시켜 놓은 건
사회 질서와 인류의 오랜 종족 번영과 안녕을 위해서다
무슨 이름도 없었다 어떤 꾸밈말도 없었다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다
사회적 질서와 안녕을 위해 체계화시켜 놓은 이것이
인간 본래 성품의 다른 이름 붓다에 대한 진리가 아니다
본래 그 이름과 어떤 것도 없었다 할지라도
붓다를 관觀할 땐 불정학적佛正學的이어야지
아정학적我正學的 견해로는 등식이 성립되지 않는다
부처는 부처가 아니고 인격화 측면 이름이 부처다
어디서든 다르지 않고 같고 같다 하여 또 다른 이름이 여여,
수많은 수식어와 특정 명사로 승격시킨 수많은 대명사가 있다
그대가 진짜 사랑해야 할 사람은 그대이며
그대가 주목해야 할 진짜 부처는 그대 안에 있다
그대 안에 진정한 선사자禪師者 불상이 살아 숨 쉰다
그대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대는 스승을 찾기 위해
삶과 죽음의 밑바닥까지 이르러야 할 것이다
그렇게 찾은 스승이라도 그가 인간의 본래 성품(붓다)을 보고
깨치지 못한 이상 그는 스승이 아니다, 애먼 선생일 뿐이다
읽은 순간 바로 둘, 알아들었으면 셋, 전해주면 넷
가고 옴이 없고 일절 말 없는 붓다는 가만있는데
인간이 온갖 이름을 갖다 붙여 차별된 사람처럼 만들었다
시대성과는 아무 관련 없이 어떤 시대든
다 포섭하고 있는 시대 없는 법계法界를
시대 영향을 받는 해석과 형상의 세계로 번역하고 있다
초무시리 출발부터 천언만어 잘못되었다
붓다의 속성 허虛씨는 처음이 없고 끝이 없는 이름 공인데,
어물쩍 언어적 유희를 다 갖다 붙일 수 있다고 하나
물에 도장을 찍은 것처럼 공이기 때문에 붙지 않는다
상식을 주름잡는 개념의 붓다라는 이름 붙기 전에는
붓다는 붓다가 아니었고 여래도 여래가 아니었다
이름이나 식병識病 걸린 지식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특정 맥락 특정 측면에서 같은 뜻 다른 이름으로
수많은 주사主辭를 행한 수많은 표현,
객사客辭시킨 수많은 수식어에 속지 말라
표현과 수식어 이름만 다르지, 일체가 하나같이
부처표 공을 가리키는 전부 같은 뜻 다른 말,
속이지 않았다 이보다 더 공정空正할 수 없다
불공佛空을 받들어도 제대로 받들었다
이념도 아니면서 철학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종교도 아니면서
하나이면서 전체이고 초월적이면서 내적이고,
하늘과 땅 그 어디에나 있고 소리와 색이 모두 이것이다
생명은 있되 뛰어다님 없는 생명체
묻겠다 법의범절法儀凡節을,
언어만을 향해 달려와 의미만 문 순간 죽음 목숨이었다
육신의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글을 읽은 것에 대한 느낀 감정 따위는 묻지 않겠다
글을 읽으면서 나타난 경계는 어떠했는가?
행동주의적 표지나 심리적, 정서적 공감을 통한
사고 기능으론 절대 붓다를 볼 수 없다
자타공인自他空人 여기선 그대 마음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
진여법신眞如法身을 깨치는 데는 어떠한 자세도 필요 없다
그대의 행동거지도 문제 삼지 않는다
어떤 행위에 의해 니르바나가 생겨나는 것 아니기 때문이다
교과서적 반응이나 어떤 종류의 의석義釋이나
의식의 몸놀림, 관념적 구성물도 필요치 않는다
지해知解 뛰어난 깨달음과 학습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공空 없이 축구逐句하다 깨달은 걸 깨침이라 하지 않는다
세법世法 화두가 선가禪家의 화두가 아니듯
깨달음을 깨침이라 표현하면 붓다에 반하는 씻을 수 없는 대역죄大逆罪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깨침과 깨달음은 차원이 완전히 다르다
언어가 다르듯 뜻도 둘은 서로 송두리 다르다
봄/ 시계視界가 다르고, 엄연히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다르고,
으레 가풍이 다르고, 시절이 다르고,
교전敎詮이 다르고, 각오覺悟도 남다르다
깨달음은 실로失路 말만 아는 피상적인 거고,
깨침은 부처를 마주 보는 실재적·현실적 체험이다
깨달음은 언어로 언어를 본 거지 붓다를 본 게 아니다
언어로 눈 가리고는 본래유本來有 붓다를 볼 수 없다
절묘한 묘지妙智여서 불공佛空에서만 볼 수 있다
오직 증득해서 눈 뜨고 볼 일이다
붓다의 문호門戶는 직접 볼 수 있는 체득의 눈,
직구로 통하는 실천적 체화體化 깨침에 있다
지적 이해 문자 오悟가 아니다
몸의 전 기능을 통해 붓다와 늘 함께하는 데 있다
부처의 체용體用 공을 받들어 말하기 때문에
깨침은 부처표 공의 체體와 용用을 잡고 용사用辭를 부리고,
깨달음은 마음을 체體로 하여 용用을 잡는다
인간의 몸이 보리수菩提樹이므로
깨침은 공불공空佛空을 빤히 보는 달견達見에 있지,
문자와 정보(AI)에 꼬마 잡힌 깨달은 해解에 있지 않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상相에 집착해 억지춘향 알게 되는 깨달음은
얼른 보기에는 훌륭해 보이는 것 같아도
출처가(공=불공) 없는 게 몽땅 흠이다
공들이지 않은 공부, 공 없음이 안타깝다
깨침은 붓다의 본체
부처표 공을 손바닥 보듯 훤히 보는 것을 가리킨다
누가 뭐라 하든 표리일체 볼 줄 아는 붓다 전공全空과 입맞춤,
깨친 선각에겐 더하거나 뺄 것 없이 살바야薩婆若는 분명하다
공에 귀명歸命치 않고 공을 떠나선 깨침을 체득할 수 없다
집執도 절截도 없고, 중㲴도 없고, 소消도 없는 붓다를
몸소 보느냐와 언어적 뜻만 아느냐는 천양지차,
정원 없는 깨침은 직접적 대면만을 필요로 하는 친증親證의 영역
있고 없고 잘나고 못남 없이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前,
이미 상속 없는 상속 위대한 유산 물려받은
본래 성품 붓다를 볼 수 없는 눈먼 중생이,
같은 처지의 눈먼 중생에게 안경 파는 행위를 하듯
만들어진 문화, 만들어진 명칭, 만들어진 규범으로
겉가량 속가량 언어적 기술, 발달만 가르치는 것과는
언어 문자가 아닌 불가시不可視 공의 자연현상,
붓다의 체용體用 공식空式 신묘총지는 다르다
인간이 만든 장치의 도덕과 문화는 행위와 관련이 있고,
행위 없는 행위 여실한 붓다는 존재와 관련이 있다
모든 것은 다 여기지만 이것은 어떤 것도 아니며,
어떤 무엇도 누구도 아니며 어디에도 국한되지 않는다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가운데 모두가 여기다
본래부터 스스로 있는 관자재觀自在 여기, 여기선
변역생사變易生死 반복하는 능변能變에 능한
인간의 마음은 탐욕의 어미와 미혹의 아비 허수아비,
언어와 문자는 전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손가락 천년만년 물고 빨고 해봤자
결국 진짜배기 달은 못 보고 만다
필요한 건 그대의 확철대오 깨침이다
'그대 여기 온 적 있는가?'
'지금 그대는 어디 있는가?'
1구句와 2구 낙처落處는
둘 다 장소를 묻는 게 아니다!
*
자주 반복해서 읽어보십시오.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