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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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아직 이름을 얻기 전의 새가 되어
새벽의 이마를 쪼았다
어둠이 완전히 물러나지 못한 시간
아침은 젖은 종이처럼 접혀 있었고
나는 생활 쓰레기를 모아
다세대 주택의 폐처럼 숨 쉬는 분리수거장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버려진 것들이 서로의 꿈을 꿰매며
다시 태어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깨진 의자 다리는 척추를 세우고
신문지는 밤새 읽힌 예언처럼 스스로를 접고 있었다
그 틈에서 나는 한 권의 책을 주웠다
낡은 표지, 바랜 색
그러나 제목을 읽는 순간
공기가 얇아지며
심장 속에서 살얼음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시간이 멈추고
나의 그림자가 나를 앞질러 책 속으로 먼저 들어갔다
영문판 마틴 하이데거
『시, 언어, 사상』
오래전부터 만나고 싶었던 이름이
이른 아침의 쓰레기 더미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자
활자들이 제자리에서 미세하게 흔들렸고
중간쯤 끼워진 메모지 한 장이
마치 다른 차원의 문서처럼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월간 강의 시간과 횟수, 보수의 총액,
그리고 지출의 흔적들
숫자들은 계산이 아니라 한 여자의 호흡으로 읽혔고
나는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그 여자를 상상했다
강의실에서 언어를 펼쳤을 인텔리 여류학자
존재를 설명하다가 문득 창밖을 보았을 사람
그녀는 어떤 연유로
이 허름한 다세대 주택의 낮은 천장 아래로 흘러들어왔을까
그날 이후 내 머리와 심장 사이에
보이지 않는 주름이 접히기 시작했고 그 주름 속에서
사유가 자꾸만 방향을 틀었다
다세대 주택을 드나드는 여자들은
모두 잠정적인 철학자가 되었고
나는 그들 각자가
한 권의 책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저마다의 존재 이유를
상상하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책을 펼칠 때마다
하이데거의 문장들은 내 방의 벽을 밀어내고
공간을 조금씩 낯설게 만들었다
언어는 사물이 되고 사물은 질문이 되었으며
질문은 다시 나를 쓰레기장으로 돌려보냈다
나는 지금도
하이데거가 시적 감수성으로 탐구한 존재의 의미를
살얼음 서걱이는 내 마음에 날마다 로딩 중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어쩌면 그를 설득할 하나의 명제가
아니면
그가 나를 설득해버린 빈 자리 하나가 내 안에 남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 이 책이 다시 버려진다 해도
그때는 이미 나의 존재 일부가 책갈피처럼
그 안에 끼워져 있을 것이다.
댓글목록
이장희님의 댓글
하이데거 이름은 들어 봤는데 철학자인 줄 몰났네요.
아직도 읽어보지 않고 난 뭐했는지 쩝~~
특별히 잘 빚어 내셨네요.
좋은 시 잘 감상하고 갑니다.
늘 건필하소서, 수퍼스톰 시인님.
수퍼스톰님의 댓글
이른 아침 생활쓰레기 분리수거장에서
누군가 읽고 버린 마틴 하이데거의 영문원서를 주웠는데 국내 번역본은 아직 없는 책이었지요.
저의 집 아래 최근에 신축한 원룸 세입자 중 한 명이 버린 것 같은데 저에게는 보물이었습니다.
책갈피에 끼워있던 메모지를 보았는데 강의시간, 지출내역 등으로 보아 여자임이 분명합니다.
지금도 그 건물을 드나드는 여성분들을 보면 혹시 저분이 인텔리 학자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ㅎㅎ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이장희 시인님.
미소님의 댓글
하이데거
인텔리 여류학자
그리고 수퍼스톰 시인님
이렇게 이어지나요
세분 지성의 무게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어쩌다 "허름한 다세대 주택의 낮은 천장 아래로 흘러들었을까"
정말 어떤 삶이었을까요?
가난까지도 상쇄시키는 지적 아우라를 읽고 갑니다
수퍼스톰님의 댓글
미소 시인님, 저는 그분들 축에 끼지 못합니다.ㅎㅎ
도대체 어느 분이 읽고 버렸을까
가끔 애완견을 데리고 산책하는 30대 후반 여성분이 있는데 그분이 아닐까.
아무튼 궁금증이 사라지지 않네요. 편안한 밤 되십시오. 미소 시인님.
마콜리님의 댓글
저도 하이데거라는사람 처음들어보내요
쓰레기장에서 주운책을가져다가 읽어보고 넘기면서 문장하나하나 낯선공간에 와잇는듯
저도 멋잇는단어한개잇습니다
"허름한 다세대 주택의 낮은 천장 아래로 흘러들었을까"
이말이 가장멋있엇습니다 ㅎ
수퍼스톰님의 댓글
부족한 글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건필하시고 좋은 시 많이 빚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