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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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 일기
2020.06.08. 월요일. 맑고 조금 더움.
지금 나를 돌보고 있는 건 보이지 않는 손과 기도와 어머니와 시와 공원과 물푸레나무다. 늦게 일어났다. 어머니는 오후 두 시쯤 어린이집에 도우미 일로 다녀오셨다. 저녁은 내가 차렸다. 국수에 양배추를 조금 썰어서 끓여 먹었다. 71번 채널에 '안녕, 헤이즐'이라는 영화가 나오길래 봤다. 블루투스 스피커로는 음악을 틀어 놓고 영화는 무음으로 봤다. 암스테르담의 안네 프랑크 박물관 씬이 좋았다. " 0과 1 사이엔 무한대의 숫자가 있고, 또 1과 100 사이엔 그보다 더 많은 무한대의 숫자가 있지. 수십만의 대중으로부터 사랑받는 것보다 너 하나의 깊은 사랑이 내겐 더 소중해." 대략 이 정도의 대사였는데, 아무튼 생각을 잡아당겼다. 마트에서 베트남산 양태 포구이를 사 와서 씹었다. 함께 생각도 씹혔다. 오늘부터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2020.06.09. 화요일. 약간 더움.
새벽 세 시에 잠을 깼다가 다시 잤다. 하루종일 몸이 축 처져 있었다. 오후에 어머니는 어린이집을 다녀오셨다. 집으로 오시는 길에 삼겹살을 조금 사 오셨다. 내가 후라이팬에 구워서 상추랑 밥이랑 해서 차려 드렸다. 물푸레나무와 함께라는 제목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의사의 조언대로 잔잔한 피아노 음악을 찾아서 들었다. 지금도 피로감이 든다. 생각하는 것이 힘들다. 자꾸만 끊어진다. 그만 자야겠다.
2020.06.10. 수요일. 맑고 더움.
아침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머니는 정오 즈음에 머리를 감으셨다. 그러시곤 어린이집을 다녀오셨다. 밤 열 시쯤 아내에게 전화했다.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지금 49번 채널에서 '라라랜드'라는 영화를 방영 중이다. 그냥 소리만 들릴 뿐,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다. 물푸레나무와 함께라는 제목의 시를 완성했다. 처음엔 3쪽 분량이었으나, 다듬어서 줄이니 1쪽 짜리가 되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아들의 글을 줄이고 또 줄이게 하고선 휴지통에 버리라 하던 그 아버지가 생각났다. 밤인데도 덮다. 시도 덮다.
2020.06.11. 목요일. 흐림.
자고 일어나니 비가 조금 와 있었다. 영산홍 꽃잎과 이파리에 물기가 보였다. 오후에 감자를 잘게 잘라 튀김을 했다. 처음 만들어 본 건데 그럭저럭 먹을만 했다. 아이들 생각을 했다. 저녁엔 여태까지 쓴 시들을 정리했다. 버릴 건 버리고 그나마 좋은 건 챙기고 애매한 건 구석에 처박았다. 결국, 남은 건 진심이 보이는 것들이다. 껍데기는 모두 떠났다. 피곤하다.
2020.06.12. 금요일. 흐리고 선선함.
사소한 일로 낮에 어머니와 다투었다. 코로나 마스크로도 가릴 수 없는 마음이 보였다. 나의 연약함으로 인해 많이 예민해지셨다. 언 마음을 풀어드리려고 족발을 시켜 함께 먹었다. 드신 후 많이 좋아지셨다. 저녁에 공원에 가서 삼십 분 가량 앉아 있다가 왔다. 자작나무 한 그루 낯설게 서 있었다. 내리는 비를 자작나무처럼 서 있다,고 비유했던 전에 썼던 시가 떠올랐다. 시는 언제나 내 주위에 머물고 있었다.
2020.06.13. 토요일. 종일 가는 비 내림.
어머니가 오후에 식혜를 만드셨다. 두 그릇 정도 마셨는데, 괜찮았다. 깊은 맛이었다. 문득 깊은 시를 한 편 쓰고 싶었다. 맨 오브 스틸이라는 영화를 봤다. 묵은 영화지만 볼 만 했다. 우리의 슈퍼맨은 하늘에서 보내신 그 분이다.
2020.06.14. 일요일. 흐리고 비 조금.
어머니와 함께 요즘 세태에 대한 걱정 가득 담은 기도를 드렸다. 점심 땐 며칠 전에 깍아 놓은 감자로 감자볶음을 해 주셨다. 중학교 다닐 때 점심 도시락으로 자주 해 주셨던 기억이 났다. 기도란 다른 것이 아닌 도시락 싸 주시던 어머니의 마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2020.06.15. 월요일. 흐리고 더움.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었다. 재난 지원금으로 사만 원 치 잡화를 주문했다. 에스마트라는 곳에서 식자재를 샀다. 어머니는 오후에 어린이집엘 다녀오셨다. 저녁은 라면에 양배추, 계란 두 개를 넣어 요리해 먹었다. 밤이 되자 더위가 조금 누그러졌다. 내 속에 남아 있는 이름들을 생각하며 누워 있다가 문득 일어나 시를 한 편 썼다. 나의 사소함과 너의 사소함이 맞닿아 만들어지는, 우주보다 깊은 우리의 삶이라고.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우리 사소함을 바라보는 저 물푸레나무의 푸른 마음을 생각했다.
댓글목록
솔바람님의 댓글
오랫만에 시인님의 글을 읽습니다
진심과 감동이 함께 깃든 깊은 맛의 글
읽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덜길님의 댓글의 댓글
고맙습니다.
좋은 글 많이 빚으시길 빕니다.
늘 평안하시길.




